하지만 꼭 그런 소품의 영향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이 체스휘는 좀 더 유하고 맑은 느낌이기는 했다.
뭔가… 미래의 체스휘가 늪처럼 속내를 헤아리기 어려운 느낌이라면, 이쪽의 체스휘는 투명한 1급수 개울처럼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확실히 수수께끼 같은 미래의 체스휘에 비해 과거의 체스휘는 겉과 속이 동일한 느낌이었다.
‘이상하다…? 이렇게 다시 보니까, 이쪽의 체스휘는 왜 이렇게 착해 보이지? 같은 사람인데 이 정도로 인상이 다르다니….’
처음에는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체스휘를 보고 반사적으로 경계했는데, 지금 보니 괜한 짓이었던 듯했다. 불과 일 분도 안 지난 일이긴 하지만, 어떻게 이 얼굴을 보고 내가 아는 체스휘와 똑같다고 생각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마주한 얼굴을 몰래 뜯어보는 동안, 무의식중에 내 몸을 굳히게 했던 긴장감이 거품 가라앉듯이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닥터 콘라드까지 다녀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바로 움직여도 돼요?”
체스휘가 나를 향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보는 눈동자에도 염려가 담겨 있었다.
“괜찮아요. 그냥 빈혈이라 조금 쉬면 나을 거래요.”
“그런데 왜 밖에 나와 있어요? 침대에 누워 있지 않고.”
“아, 잠깐 깜빡한 일이 생각나서요.”
“급한 일이에요? 나한테 말해 주면 대신….”
“아뇨, 제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 건 고마웠지만, 솔직히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리 반갑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철벽을 치듯이 체스휘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자 방금 내가 그의 손을 뿌리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체스휘가 일순간 멈칫하는가 싶었다.
“그래요…. 많이 아픈 게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그는 더 권유하지 않고 물러났다. 아무래도 내가 부담스러워하는 걸 알고 배려해 준 것 같았다. 이런 반응조차 내가 알고 있는 체스휘와 달랐다.
‘역시, 지금의 체스휘에게는 미카엘 카드리고가 섞이지 않은 것 같지?’
어쩌면 내가 느끼는 이런 차이점은 체스휘에게 미카엘 카드리고가 함유(?)되어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미래의 체스휘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해서 나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분명 그의 안에는 두 개의 영혼이 들어 있다고 했다.
“체스휘 씨, 어떻게 섞인 상태로 그렇게 멀쩡하게 있어요?”
“합의했거든요. 어차피 둘 다 똑같은 걸 원해서 그냥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기로 했어요.”
그 증거로, 가끔 그를 볼 때 인물 프로필이 두 개가 떠오를 때가 있었고….
‘어?’
그러다 나는 퍼뜩 지금까지 완전히 새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닫고, 소름이 돋아 몸을 파르르 떨고 말았다.
‘맞아, 그러고 보니 왜 지금까지 게임 시스템 창 확인을 한 번도 안 해 봤지?’
머릿속의 안개가 걷히듯이, 갑자기 내가 깨끗이 잊고 있던 시스템 창의 존재가 기억났다. 한 가지 더 오싹한 건, 이 세계가 게임 속이라는 사실도 내가 얼마 동안 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잊을 수가 있어?’
따져 볼 것도 없이, 양육자와 아이들이 없는 레드포드 저택에서 눈을 뜬 직후부터였다.
체스휘의 최면인지 세뇌인지 모를 것 때문에 잠깐 머리가 이상해졌을 때도 있었지만,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그것도 내 착각이었을 뿐, 사실은 줄곧 정상이 아니었던 걸까?
다이안 같은 아이들의 존재와 양육자들에 대해서만큼은 기억하고 있었으나, 게임과 시스템 창에 대한 사실만큼은 완벽하게 망각하고 있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시스템 창!’
내친김에 시스템 창을 불러 봤으나, 반응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엠버가 되었을 때도 시스템 창은 먹통이었다.
혹시 린 도체스터의 몸일 때만 시스템 창을 이용하는 게 가능한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 44회차에서는 스텔라에서 지급해 준 가이드가 시스템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설정이었으니까.
이런 씨, 그럼 얼마 전 린 도체스터의 몸일 때 시스템 창을 열어 봤으면 체스휘와 고용인들의 말이 진짜인지 긴가민가하면서 혼란스러워하는 일이 없었을 것 아닌가? 다이안이 있는 세계가 꿈이라는 말을 부정할 증거가 없어서, 그렇게 저택 안을 밤낮 없이 돌아다니며 방을 열심히 뒤지고 다녔던 것이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아까 콘라드의 앞에서 떠올렸던 중차대한 의문이 다시 한번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런데 역시 이상하단 말이지…?
체스휘가 나를 속이며 가두려고 한, 아이들과 양육자들이 없는 레드포드 저택.
분명 그곳은 원래 내가 있던 레드포드 저택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내 육신은 린 도체스터 그대로였던 걸까? 추측대로 체스휘가 나를 데리고 지하실의 검은 문으로 이동했던 거라면, 지금처럼 영혼만 옮겨 갔어야 맞는 게 아닌가? 혹시 내가 뭔가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건가?
똑똑.
그때, 앞에서 노크하듯이 손으로 창문틀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들자, 내 얼굴을 응시하고 있는 체스휘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엠버 씨?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혹시 또 몸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아, 제가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네요.”
아무래도 내가 고민하느라 앞에서 체스휘가 부르는 걸 못 들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다른 방법으로 내 주의를 끌려고 창틀을 두드린 듯했다. 그 와중에도 조금 전의 내 반응을 염두에 둔 듯이, 손으로 나를 직접 건드리지 않은 게 제법 신사다웠다.
“그럼 전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요. 체스휘… 님도 살펴 가세요.”
나는 여기에서 너무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했다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엠버 씨.”
그런데 몇 걸음 옮기지도 않아, 내 뒤에서 체스휘가 다시 한번 나를 불러 왔다. 그냥 무시해도 되었지만 왠지 그러기가 어려워서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던 체스휘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어제 그 일 때문에 어색해하는 거면,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뭐?
나는 체스휘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서 눈매를 찡그렸다.
어제 그 일? 뭘 말하는 거지?
“어차피 사고였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도 그렇고, 엠버 씨도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되는 일이 아닐까… 하고.”
“…….”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처럼 앞으로도 얼굴을 볼 때마다 계속 서먹해하고, 그러다가 멀어지면 난 그게 더 서운하고 아쉬울 것 같아서요.”
체스휘의 얼굴에 쓴웃음 같기도 하고, 애써 장난스러운 미소를 꾸며낸 것 같기도 한 표정이 떠올랐다. 일부러 내 마음을 약하게 만들려고 그런 건 아닌 듯하지만, 묘하게 상처받은 것처럼 보이는 저런 얼굴은 내 동정심을 자극했다.
나는 더욱이 뭐라고 말해야 할지 가늠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내가 이곳에 왔던 이후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전의 경험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아무래도 지하실의 검은 문 바깥과 안쪽의 세계는 각기 시간의 흐름이 다른 듯했다.
일단 창밖의 풍경을 보면, 지난번에 왔을 때와 비슷한 계절인 듯한데…. 그때 손님으로 왔던 미카엘 카드리고는 돌아갔나?
어쨌든, 역시 체스휘가 말하는 어제의 그 사건이 뭔지 모르니 섣불리 입을 열기가 난감했다.
“음…. 네, 이해했어요.”
그래서 그냥 체스휘가 알아서 해석하기를 바라며, 그를 따라 어중간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기만 했다. 내 기대대로 체스휘는 그런 내 반응을 마음대로 해석한 것 같았다. 나를 마주한 그의 얼굴이 좀 더 환해졌다.
“다행이네요. 그럼 앞으로도 그 얘기는 그냥 안 하는 걸로 하는 게 낫겠죠?”
“아….”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내가 아니라 엠버랑 직접 얘기해!
댕, 댕, 댕.
때마침, 그 타이밍에 괘종시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때다 싶어서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아이구, 제가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요! 정말 먼저 가 볼게요!”
체스휘가 뭐라고 더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을 벌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후다닥 복도를 뛰어갔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목적지인 지하실에 도착하지 못했다.
체스휘와 헤어져 복도를 달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고용인들이 나를 붙잡았기 때문이다.
“응? 왜 이러는… 으읍!”
순식간에 입이 막히고, 무언가가 내 머리에 뒤집어씌워져 시야를 가렸다. 한두 번 이런 일을 해 본 게 아닌 것처럼, 고용인들은 빠르게 내 손발을 묶었다. 이후 누가 나를 들어 올린 듯이 발이 바닥에서 떼어졌다. 당연히 저항했으나 엠버의 몸은 솜 뭉치 같아서 별로 유효한 타격을 입히지는 못했다.
“빨리 움직여!”
고용인 중에 이 일을 통솔하는 듯한 사람이 명령하자 사람들이 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말씀하신 메이드를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머리에 씌워졌던 포대 자루 같은 것도 벗겨졌다. 입을 막은 천과 묶인 손발은 그대로였지만, 그래도 나를 이곳에 끌고 오도록 명령한 사람의 얼굴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저런, 많이 놀랐나 보구나.”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별로 반갑지 않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렇게 다시 나하고 단둘이 만나게 될 줄 몰랐던 모양인데, 생각보다 멍청한 계집애네.”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을 땋아 묶은 마리네즈가 내 앞에 서서 입술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헐, 맞다. 여기에 미래 악령 자리를 하나 예약한 빌런이 있었지?
그녀의 머리 스타일이나 옷차림은 지난번과 달리, 별로 어울리지 않는 청순한 분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경멸과 노여움 어린 눈만큼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엠버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은 한결 업그레이드된 것 같았다.
재빨리 눈을 굴려 주변을 살폈다. 나를 어디로 데려온 건가 했더니, 별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