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저택 안에 뭔가가 들어왔어.’
얼핏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지만, 노이즈가 낀 것처럼 어딘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소곤거림이 멀리서부터 밀려와 내 귀에까지 흘러들었다.
‘이건… 인간 냄새?’
‘맞아, 인간 숨소리다! 게다가 여기, 갓 만들어진 인간 발자국이 있어!’
‘이상하다, 여긴 분명 그놈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텐데?’
‘그런 건 상관없어. 저쪽에서 싱싱한 인간의 숨결이 느껴져!’
‘신선한 인간의 피와 살…! 전부 내 것으로 만들 거야!’
‘헛소리! 저건 내 거다! 내가 가장 먼저 발견했어!’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지…!’
어쩐지 촉이 별로 안 좋더라니, 어디에서 경험해 본 듯한 스산한 기운이 내 뒷덜미를 파고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금 전부터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섬뜩함이 머릿속에서 경종을 울리고 있던 참이었다. 멀리서 작게 웅성거리는 것처럼 들려오는 광기 어린 음성들에, 나는 시간을 더 지체하면 안 되겠다는 사실을 깨닫고 바로 몸을 움직였다.
콰앙!
어차피 내 위치를 들킨 듯하니, 굳이 조용히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 앞다투어 내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저 양아치 같은 놈들이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척을 죽이는 게 효과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놈들은 멀리서 내 숨소리마저 감지할 수 있었으니, 호흡을 멈출 수 있는 게 아니고서야 전부 쓸모없는 노력이었다.
‘저기 있다, 싱싱한 인간…!’
역시나 문밖으로 뛰쳐나가자마자 복도를 빠르게 이동해 오는 하얀 구름 같은 형체가 보였다.
내 몸을 빼앗고 싶어서, 혹은 나를 죽이고 싶어서 무섭게 쫓아오는 저 존재들은, 조금도 반갑지 않은 악령들이었다.
‘어…? 그런데 뭐지? 새로운 인간이 아니잖아? 저건 원래 여기에 있던 놈인데….’
‘설마 우리가 뭔가 착각했나? 아닌데…?’
그런데 그들은 나를 발견하고 나서 더욱 득달같이 달려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무언가에 당황한 듯이 주춤거리면서 저들끼리 뭐라고 숙덕거렸다. 그 꼴이 어쩐지 우왕좌왕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나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어 고마운 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안에서 두 개의 영혼이 느껴져.’
‘그럼 설마, 새로 흘러든 영혼이 저놈의 육신 안에 들어가서 주도권을 빼앗는 데 성공했나?’
‘뭐? 저 육체는 전부터 내가 눈독 들이고 있었는데 감히…!’
‘하지만 그게 가능해? 우리 모두가 예전부터 탐내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손끝 하나 못 건드린 인간을?’
‘아무튼, 저놈이 빼앗았으면 나도 빼앗을 수 있다는 거지?’
‘내가, 내가 가질 거야! 거기 서라, 인간…!’
하 씨, 진짜 귀찮게!
악령들끼리 금방 결론을 내렸는지, 그들은 탐욕으로 점철된 눈을 희번덕거리며 다시 빠르게 나를 추격해 오기 시작했다. 나는 악령들을 상대하지 않고, 먼지 쌓인 복도를 달렸다.
이 몸의 원래 주인은 피지컬이 상당히 좋은지, 달리는 속도가 원래의 내 몸보다 확실히 빨랐다. 나도 육체적인 조건은 뛰어나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이 사람의 다리가 더 길고 몸에 근육량도 훨씬 많아서 그런가?
방금 내가 빠져나온 방에는 거울이 없었고, 복도에 있는 창문이나 시계의 유리들도 전부 다 지저분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육신을 차지한 사람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도 당연히 볼 수 없었다. 뭐, 머리카락 정도는 한 올 뽑아 보면 색깔을 알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었다. 이 사람이 누구든 간에, 어차피 내가 이곳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멈춰! 얌전히 내 것이 되면 고통스럽지 않게 죽여 주겠다!’
어제 지하실에서 쏟아져 나왔던 악령들만큼은 아니었지만, 지금 나를 쫓아오는 영혼들도 숫자가 적지는 않았다. 처음에 내가 느낀 감상처럼, 정말 이곳은 악령들만 사는 유령 저택이 맞았던 모양이다.
탕, 타앙!
‘아악…!’
나를 뒤쫓아오는 악령들과의 거리가 좁혀졌을 때, 팔을 움직여 들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총에 맞은 악령들이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나를 추격하던 악령들의 속도가 늦춰졌다.
내 총은 아니었지만, 아까 확인해 봤을 때 다행히 안에는 총알이 거의 다 채워져 있었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이것은 일반 총알이 아니라, 악령들을 상대할 수 있도록 제조된 탄환이었다. 이런 폐허가 된 유령 저택에 혼자 남아 있는 사람이라 혹시 싶었는데, 예상대로 남자가 가지고 있던 총이 악령들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어서 잘된 셈이었다.
‘이 사악한 놈이…! 우리 손에 잡히면 마지막 영혼 한 톨까지 쪽쪽 빨아먹어 버릴 테다!’
그래도 악령들은 끈질겨서, 처음보다 나를 경계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뒤쪽에 따라붙었다.
“꺼져, 이것들아! 나쁜 짓 해서 악령이나 된 주제에, 누굴 보고 사악하대!”
나는 그들을 달고 그대로 지하실로 향했다. 혹시 여기도 지하실이 잠겨 있으면 문고리를 총으로 쏴 버리려고 총알을 아끼고 있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곳에 출입했던 사람이 문을 활짝 열어 놓은 듯이, 지하실로 통하는 길은 가로막는 장애물 하나 없이 뻥 뚫려 있었다. 나는 단번에 내 목표물인 검은 문이 있는 곳까지 달려가서 앞으로 손을 뻗었다.
“작동해, 빨리!”
너, 여기서 또 먹통이면 진짜 눈치 없는 거라고! 알지?
다행히 검은 문은 눈치가 있었다. 꼭 내 마음의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지금까지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낡아 보이는 문에서 선명한 보라색 광채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내 등 뒤까지 다가온 악령들이 뭐라고 시끄럽게 아우성쳤다. 하지만 그들에게 잡히기 전에 빛이 나를 집어삼키는 게 먼저였다.
나는 하얀 먼지가 쌓인 바닥에 발자국만을 흔적으로 남긴 채 그곳을 벗어났다.
***
“으….”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나는 어딘가에 누워 있었다. 가물가물한 시야에 익숙한 격자무늬의 바닥이 비쳤다.
뭐야? 내가 방금 그 유령 저택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건가? 눈에 보이는 바닥에 먼지 한 톨 없는 걸 보면 그런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차가운 맨바닥에 누워 있지?
“아, 드디어 눈을 떴군요. 내 얼굴이 보입니까?”
“으악!”
바로 그때, 갑자기 누군가 내 앞으로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바로 직전까지 악령들에게 추격당하고 있었던 터라, 방어 기제가 발동해서 반사적으로 손이 튀어 나갔다.
퍽!
“어억…!”
주먹에 생생한 타격감이 전해진 것과 동시에, 남자의 짧은 비명이 귀청을 때렸다. 악령이라기에는 손에서 느껴지는 감촉이 지나치게 현실성 있었고, 또 귀에 울린 비명도 노이즈가 걷힌 것처럼 또렷했다.
그럼 악령이 아니라 진짜 사람인가?
나는 엉거주춤 주먹을 말아쥔 상태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당신…! 이게 무슨 짓입니까? 갑자기 사람을 왜 쳐요?!”
나한테 얻어맞은 얼굴을 손으로 감싸고 있던 남자가 다음 순간 내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며 매서운 시선을 쏘아 보냈다. 이번에는 잔뜩 성이 난 남자의 얼굴을 정면에서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두 눈을 크게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코, 콘라드?”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됩니까? 나 참, 레드포드 저택의 유일한 의사인 나한테 주먹을 날리다니. 여기에 들어온 이후로 이런 황당한 경우는 또 처음이군.”
주먹에 힘이 거의 들어가지 않아서 별로 세게 치지도 못했구먼, 콘라드는 한껏 엄살을 부리면서 성질을 냈다. 그래 봤자 콘라드의 얼굴은 맞은 흔적 하나 없이 멀쩡하기만 했다. 오히려 그를 때린 내 주먹이 더 빨갛게 부었을 정도였다.
어쨌든, 콘라드의 얼굴을 보니 눈이 번쩍 뜨이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콘라드의 몰골이 너무 정상적이었다. 분명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콘라드는 별관에 갇혀 추레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콘라드는 한동안 잘 먹고 잘 자고 잘 관리받은 듯이 윤기가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콘라드가 나를 대하는 태도도 지나치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지금 내가 자신의 얼굴을 때린 것에만 불만이 있는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없는 동안에 콘라드가 갇혀 있던 별관에서 풀려난 거라면, 지금 나를 보고 이런 태도를 보일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내 의문은 바로 다음 순간 풀렸다.
“엠버, 너 완전히 정신이 들었구나! 다행이야!”
콘라드에게 정신이 팔려 그동안 옆에 있는 줄도 몰랐던 메이드가 갑자기 크게 소리치면서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콘라드의 얼굴을 때렸을 때, 주변에서도 놀라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았다.
“멀쩡히 걸어가다가 갑자기 쓰러져서 얼마나 놀랐는데! 너 자꾸 사람 놀라게 할래?”
갈비뼈가 으스러질 듯이 나를 한번 세게 끌어안았다가 팔을 풀어 준 메이드의 얼굴이 낯익었다.
그러니까… 이 메이드의 이름이 분명….
“모리나?”
“그래, 이 바보야! 너 머리는 괜찮아? 아까 바닥에 머리를 찧은 것 같았는데?”
그녀는 나를 걱정하는 눈으로 훑어보다가, 그때까지도 옆에서 혼자 구시렁거리고 있던 콘라드를 쳐다보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에 콘라드가 못마땅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면서 마지못한 듯이 입을 열었다.
“머리에 혹이 좀 나긴 했지만, 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평소에 빈혈이 있어서 잠깐 현기증이 난 모양인데요.”
“그럼 엠버는 이제 괜찮은 건가요?”
“방금 괜찮다 못해 쓸데없이 기운이 넘쳐서 내 얼굴에 주먹질을 한 걸 못 봤습니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나는 방금 콘라드의 광대뼈를 때려서 얼얼한 주먹을 펴고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하실의 검은 문에 손을 대기 직전에 보았던 남자의 크고 단단한 손은 온데간데없이, 굳은살 하나 없이 곱기만 한 작고 말랑한 손이 시야에 비쳤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폐허 같던 레드포드 저택에서 빠져나와 다시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으로 오게 된 모양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나는 또다시 메이드 엠버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