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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204)화 (204/300)

“또 그런 식으로 말 돌리려고….”

그런데 축적된 분노가 너무 컸나 보다. 생각보다 팔에 힘이 세게 들어가서 체스휘의 상체가 나한테 휙 기울어졌다. 그 반동으로 내 몸도 식탁 쪽으로 밀려났다.

물론 평소 같으면 이 정도로 별다른 문제가 생겼을 리 없지만, 문제는 지금의 내가 완전히 술에 절어 있는 상태였다는 점이다.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휘청이면서 옆으로 넘어갔다.

와장창!

아야…. 식탁 모서리에 부딪힌 허리가 아파서 저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식탁에 반쯤 옆으로 눕다시피 쓰러지면서 팔로 유리잔을 쳤는지, 무언가가 쏟아져서 팔을 축축하게 적셨다.

“진짜… 한시도 얌전히 있지를 않네.”

그림자가 진 머리 위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 음성을 따라 찡그린 눈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살짝 찌푸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체스휘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몸 밑에 뭐가 깔린 것처럼 조금 불편하다 했더니, 아무래도 체스휘의 손이 내 등을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다른 한 손은 내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 덕분에 생각처럼 과격하게 식탁 위로 넘어져 부딪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내 몸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옷감 너머로 스미는 손의 온도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나한테 밀려서 쓰러진 술병이 식탁 위를 굴러가다가, 뒤늦게 모서리 밖으로 떨어져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넘어진 곳은 내 앞의 식탁 자리였고, 그 자리에 있던 것은 빈 접시뿐이었다. 식당 안에 들어오고 나서 체스휘가 먹여 주는 음식만 억지로 조금 먹고, 내내 술만 마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인지 물인지 모를 액체에 팔이 젖은 것 말고는 옷을 더럽히는 일이 없었다.

어쨌든, 그나마 체스휘가 내 몸을 붙잡아 줘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완전히 식탁을 쓸면서 넘어져 더 큰 봉변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가 취한 행동은 체스휘를 올려다보던 눈을 찡그려, 그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으, 씨…. 뭐야, 왜 이렇게 순순히 끌려와? 지금 나 놀려? 일부러 그런 거죠?”

애초에 이런 상황이 된 것 자체가 체스휘의 탓이었다. 그러니 지금 일어난 일도 모두 체스휘의 잘못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지금 내 앞에 있는 남자에게 고맙기는커녕 오히려 부아가 더 치밀었다.

체스휘는 이 상황이 우스운 건지, 아니면 어이가 없는 건지, 얕은 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혀서 내뱉는 헛웃음 같기도 하고, 조금은 허탈감이 섞인 한숨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소리였다.

“말 잘 들으라면서. 그럼 내가 꼼짝도 안 하고 버텼으면 기분이 좋았겠어?”

“그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적당히 끌려왔어야지!”

“응, 알겠어요. 다음부터는 린 씨 말을 너무 잘 듣지 않고 적당히 들을게요.”

체스휘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지러운 머리에 바로 입력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내 말에 얌전히 수긍하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풀렸다.

그러고 나서 문득 생각해 보니, 나는 여전히 체스휘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방금의 격렬한 사투(?)로 체스휘의 상의에 달린 단추가 떨어져, 옷깃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그 탓에, 고전 영화 남주인공처럼 금욕적이던 체스휘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 드러난 목울대와 쇄골 같은 부분이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리고….

“뭐야…. 여기 왜 이래요?”

다음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에 무심코 숨을 들이켰다.

처음에는 그림자 때문에 잘못 본 줄 알았다. 체스휘의 목덜미에 문신, 혹은 흉터처럼 새겨져 있는 기이한 검은 자국.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문신이나 흉터 같은 게 아니었다.

매끄러운 피부 위에 얼룩처럼 새겨져 있는 그 자국은 꼭 살이 썩어 들어가는 흔적인 것처럼 보였다. 또는 깨진 도자기처럼 체스휘의 몸이 조금씩 갈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놀라서 굳어진 것과 달리, 체스휘는 그저 한번 내 눈길을 따라 힐끗 시선을 내린 뒤 무덤덤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알면서 뭘 물어봐요?”

뭐? 내가 알긴 뭘 알아, 당연히 모르니까 묻는 거지.

나는 체스휘의 말에 황당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나를 향해 체스휘가 말했다.

“린 씨가 그랬잖아.”

“뭐… 내가?”

상상도 못 한 말에 화들짝 놀라서 다시 체스휘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그런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다시 보니 흉측하게 살이 썩는 듯하던 광경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대신 빨간 잇자국만 나 있었다. 내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손에 잡힌 옷깃을 더 활짝 벌려 다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서 확인해 봐도, 체스휘의 목덜미에는 여전히 잇자국만 남겨져 있었다.

뭐야, 혹시 내가 또 술기운에 잘못 본 건가?

“정말 있는 힘껏 깨물더라. 혹시 그때도 안 그런 척하면서 질투했어요? 내가 다른 메이드를 쳐다봐서? 그래서 속으로 쌓아 두고 있었다가 폭발한 건가?”

체스휘가 아까 같잖은 핑계를 댄 나를 조롱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놀리는 건지 모를 소리를 하며 짐짓 장난스럽게 내 콧잔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아무튼, 오늘 일도 그렇고 정말 어디로 튈지 모르겠다니까. 난 그런 린 씨도 귀여워서 좋지만, 앞으로는 조금만 얌전히 있어요. 그럼 선물 줄 테니까.”

꼭 사고 치는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주면서 구슬리는 것 같은 어투였다.

나는 짜증스럽게 체스휘의 손을 붙잡으려다가, 이어서 귓가에 속삭여진 그의 말에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심연 화원에 데려가 줄게요.”

그 순간 나는 눈을 깜빡이는 것조차 잊고 내 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런 내 반응을 기민하게 눈치챘는지, 체스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린 씨, 전부터 거기에 가고 싶어 했잖아요.”

문득, 예전에 체스휘와 함께 섬뜩할 정도로 큰 꽃들이 피어 있던 기괴한 화원에 들어갔던 기억이 났다. 레드포드 저택에 있는 모두가 기피하는 장소였지만, 나는 그 안에서 그리운 과거의 시간과 아주 오랜만에 다시 조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체스휘가 다시는 나하고 같이 그 화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원래는 데려갈 마음이 없었는데, 같이 가 줄게. 린 씨의 말대로 좀 더 착하게 살아 볼 겸.”

체스휘가 내 얼굴을 가볍게 쓸면서 희미한 미소를 띤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소곤거리듯이 이어지는 목소리가 한 음절 한 음절, 귀에 새겨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가끔 체스휘를 악마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 순간도 마찬가지였다.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여지는 달콤한 목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얼굴을 가만히 주시하는 체스휘의 눈을 다시 한번 마주한 순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미카엘 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모르겠다고?”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이,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면서, 여전히 술기운이 올라와 후끈거리는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응…. 모르겠어. 악마의 화원? 거기가 어딘데요?”

어쩌면 아까 체스휘가 한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언제부터인지 나도 체스휘의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게 당연해지고 있었다.

“내가 거기를 왜 가고 싶어 했는데?”

이번에도 체스휘가 나를 믿을지, 의심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천연덕스럽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했다. 체스휘는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가 입술을 비틀 듯이 미소를 지었다.

“기억이 안 나면 할 수 없지. 아쉽게 됐네?”

고개를 숙인 체스휘가 장난스럽게, 하지만 아프게 내 귀를 깨물었다.

“악!”

그래, 반사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올 만큼 엄청나게 아팠다. 무의식중에 눈물까지 찔끔 새어 나올 정도였다. 혹시 체스휘가 내 귀를 뜯어 먹은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깜짝 놀라서 몸에 열이 오르자 머리가 더 어지러워졌다.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손을 더듬더듬 움직여 체스휘가 깨문 귀가 멀쩡한지 확인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전에 체스휘에게 손을 붙들렸다.

“내, 내 귀…! 구멍 난 거 아니….”

“구멍 안 났어요.”

“흐읍.”

그리고 다음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일었던 귓불에 따뜻하고 간지러운 감촉이 와 닿았다.

내가 호들갑을 떠는 게 영 안 돼 보였는지, 체스휘가 이번에는 달래듯이 자신이 깨물었던 귀를 부드럽게 핥아 줬다. 꼭 병 주고 약 주는 모양새라 어이가 없었는데, 그래도 방금처럼 인정사정없이 물어뜯는 것보다는 나았다.

…아니, 아니다. 이게 더 나은 게 아닌가?

촉촉하고 보드라운 입술이 예민하게 달궈진 살점을 머금고 핥을수록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왠지 숨이 점점 가쁘게 차오르고, 식탁에 기대고 있던 몸이 미약하게 움찔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아파?”

귓바퀴에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스치듯이 내려앉았다. 나는 목이 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하고 가까스로 소리 내 대답했다.

이번에도 웃음인지 아닌지 애매한 얕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체스휘가 입술을 움직였다. 온기가 눌러 찍힌 목덜미에서 심장이 펄떡펄떡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내 체온이 더 높았는데, 지금은 체스휘도 나와 비슷해진 것 같았다. 맞닿은 몸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뜨거웠다.

체스휘의 옷깃을 움켜쥔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아니, 그건 내 생각일 뿐 오히려 반대로 힘이 풀리는 것 같기도 했다.

지금 식당 안에는 체스휘와 나 말고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시선을 신경 써야 할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왠지 이런 상황이 좀 이상하게 여겨졌다. 체스휘와 내가 이러고 있는 것에 위화감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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