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아무 말 없이, 이불 밖으로 나온 내 머리와 이마를 손으로 훑었다. 그냥 쓰다듬어 주는 것 같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꼭 나한테 열은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죠?”
체스휘가 못내 의심스럽다는 듯이 의구심 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방금 내가 돌발적으로 보인 행동이 그 정도로 이상하긴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침실 밖에 나갔다 온 내 체온은 평소보다 떨어져 있었다. 체스휘도 그걸 느꼈는지, 금방 내 이마에서 손을 떼고 이번에는 이불에 둥글게 말린 내 몸을 끌어안았다.
이불을 사이에 두고 체스휘와 완전히 맞붙은 등이 금방 뜨끈해졌다. 온몸에 스며드는 온기에, 차가워졌던 손끝과 발끝까지 금세 피가 돌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보다 확연히 큰 남자의 몸에 푹 파묻히다시피 감싸 안겨 있자니, 조금 우스운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사실 다른 사람도 아닌 체스휘의 품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모순적인 일이었다. 나를 이 낯선 저택에 혼자 떨어뜨려 내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다름 아닌 체스휘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 유일하게 나를 안아 주는 사람은 체스휘밖에 없었고, 그의 품은 내가 먼저 거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따뜻하긴 했다.
나는 내 안으로 형체 없이 스며드는 체스휘의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왠지 오늘따라 피곤해서 더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어디 뜻대로만 되는 법이던가? 애써 머리를 비우려고 노력했더니, 오히려 그 반작용으로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 연쇄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체스휘도 내가 아직 깨어 있는 걸 느꼈는지, 그만 자라는 듯이 내 몸을 도닥였다. 그가 그렇게 해 주자 거짓말처럼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안 되는데…. 지금 이렇게 잠들면 체스휘가 그사이에 또 내 기억을 지워 버릴지도 모르는데.
“그만 자요. 시간이 많이 늦었어.”
그러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여지는 체스휘의 인사말을 마지막으로, 내 의식도 뚝 끊겨 버렸다.
눈앞이 완전히 흐려지기 전에, 복잡하게 뒤엉킨 실타래 속에서 작은 실마리 같은 검은 무언가가 어른거리는 것을 언뜻 본 것 같기도 했다.
***
댕, 댕.
멀리서 괘종시계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한 복도를 가르며 울려 퍼지는 소리에, 한 폭의 그림처럼 창가에 가만히 서 있던 소년의 몸이 작게 움직였다.
다이안은 커튼을 잡고 있던 손을 내리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침부터 어떻게 시간이 가는지도 몰랐는데, 어느새 오후 4시였다. 창밖에 스미던 햇빛도 이제는 어렴풋한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잠시 후 다이안은 조용히 방을 나섰다. 레드포드 저택은 오늘도 아주 고요했다. 평소라면 복도를 걷는 동안 다른 고용인들을 한두 명 정도 봤을 법도 하지만 지금은 다이안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평소라면 위험하게 혼자 돌아다니지 말라고 걱정 어린 푸념을 했을 사람도 지금은 그의 옆에 없었다.
어떤 방 앞에 멈춰 선 다이안은 조금 망설이다가 눈앞에 있는 문고리를 살며시 잡아 돌렸다.
소리 없이 매끄럽게 문이 열리고, 그 틈새로 방 안의 모습이 비쳤다.
주황색 햇빛이 고인 방 안에 검은 머리칼을 가진 소년이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따뜻한 색채를 가진 햇빛이 그의 피부에도 스며 있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아주 창백해 보였다. 아주 가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는 모습만 아니었다면, 그 소년을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인형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다이안은 잠깐 망설이다가 소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루스카.”
그는 다이안이 방문을 여는 소리는 듣지 못한 듯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의자에 미동 없이 가만히 앉아 있던 검은 머리칼의 소년이 마침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들어가도 돼?”
이어진 다이안의 물음에 루스카는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봐도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거부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다이안은 그냥 허락을 받은 셈 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아, 잠깐만! 나도 들어가게 옆으로 좀 비켜 봐.”
그러고 나서 그가 다시 문을 닫으려던 찰나에, 누군가 다이안의 뒤를 따라 좁은 문틈으로 불쑥 몸을 비집고 들어왔다.
“미뉴엘? 너 뭐야?”
“뭐긴 뭐야? 너만 여기에 오라는 법 있어?”
미뉴엘이 다이안의 물음에 콧방귀를 뀐 뒤, 문에 껴서 구겨진 옷을 불만스럽게 탁탁 털었다.
다이안은 괜히 방의 주인인 루스카의 눈치를 한번 살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루스카는 침입자… 아니, 자신의 방을 찾아온 손님이 한 명 더 늘어나도 별다른 상관이 없는 눈치였다.
그는 여전히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다이안과 미뉴엘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이안은 어느 때보다도 생기 없는 루스카의 얼굴을 보자 왠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야, 밀가루 포대처럼 멀뚱히 서서 뭐 해?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난 먼저 앉는다.”
미뉴엘은 그런 다이안의 마음도 모르고, 서슴없이 걸어가 루스카의 맞은편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느 때처럼 눈치 없는 모습에 오히려 다이안이 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다이안은 곧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정했다.
아니다, 미뉴엘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성격이 자기중심적이라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신경 쓰지 않는 것뿐이었다.
다이안은 빨리 안 오고 뭐 하냐는 듯이 자신을 쳐다보는 미뉴엘을 약간 심란한 눈으로 마주하다가, 이내 걸음을 옮겨 미뉴엘의 옆자리에 앉았다.
“…….”
“…….”
“…….”
그런데 세 사람 다 같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을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루스카야 그럴 줄 알았다고 해도, 늘 거침없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왔던 미뉴엘까지 이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건 좀 의외였다. 다이안이 찌푸린 눈으로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리자, 미뉴엘도 의아한 눈으로 다이안을 쳐다보았다.
두 소년 사이에 잠깐 소리 없는 눈싸움이 오고 갔다. 물론 그 조용한 실랑이 끝에 패배한 건, 고집과 뻔뻔함이 부족한 다이안이었다.
“루스카. 너,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결국 다이안이 대표로 먼저 입을 열어 루스카에게 물었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 자리에 온 덕분에 제법 차분한 목소리를 내뱉을 수 있었지만, 다이안으로서도 쉽게 건넨 질문은 아니었다.
며칠 전, 루스카의 양육자인 마리엔이 죽었다.
새벽녘 고용인에게 발견된 사건 장소에는 마리안의 옷가지만 놓여 있었다. 그 주변에는 부스러진 검은 재와 아직 형체가 유지된 검은 꽃이 흩어진 상태였다.
레드포드 저택에 사는 사람이라면 모로스의 등장과 죽음에 익숙했기에, 이 어수선한 현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도 아닌 양육자가 모로스가 되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렵긴 했다. 하지만 루스카는 분명 양육자와의 교감이 완전히 끊긴 것을 느꼈다고 했으니, 마리안이 죽은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이제 루스카는 선택해야 했다. 차후에 올 새로운 양육자와 함께 저택에 남을지, 아니면 이대로 모든 걸 포기하고 혼자 저택을 떠날지.
“뭘 어떻게 해? 아직 유예 기간이 남았잖아. 그사이에 양육자 후보들의 목록이 정리되면 거기에서 새로운 사람을 하나 뽑아서 저택에 남으면 되지.”
다이안의 말에 반박한 사람은 미뉴엘이었다. 그는 다이안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가만히 있다가 기껏 다이안이 어렵사리 먼저 말문을 열고 난 뒤에야 불만을 토로하는 모습이 여간 황당한 게 아니었다.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잖아.”
“어려울 건 또 뭐야? 루스카는 마리엔이 오기 전에도 양육자로 지원하는 사람이 몇 명 더 있었잖아?”
미뉴엘은 별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다이안은 그 말을 듣고 속이 조금 불편해졌다.
확실히 린과의 페어가 깨지면 다음 양육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보장할 수 없는 다이안과 달리, 루스카나 미뉴엘은 그리 어렵지 않게 다음 기회를 잡을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은 예비 양육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은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걸 떠나서도, 다이안은 양육자와의 유대감을 가볍게 여기는 미뉴엘의 태도가 전부터 못마땅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루스카의 마음도 중요하잖아. 어제 비비한테도 물어봤는데, 이제 지쳐서 다 그만하고 싶다고 그랬단 말이야.”
미뉴엘은 이번에도 다이안의 말에 코웃음만 흘렸다.
“야, 너는 그 말을 믿냐? 걔는 예전에도 그랬어. 유지니아 전에 비비한테 붙었던 양육자 이름이 뭐였더라…. 아무튼, 기억은 안 나지만 그때 걔 양육자가 막상 저택에 오고 나니까 여기 생활에 적응을 못 하겠다고 페어 끊고 돌아갔을 때도 몇 날 며칠 동안 울고불고하면서 세상 다 끝난 것처럼 굴었었다고. 하지만 바로 새 양육자가 오니까 멀쩡해졌었잖아?”
“그때 양육자는 비비랑 같이 지낸 시간이 짧았잖아. 하지만 유지니아는 거의 2년이나 같이 있었는데…. 그래서 비비도 이번에는 정말 충격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단 말이야. 게다가 단순히 페어가 취소된 이전 양육자와는 달리, 이번에는… 그렇게 된 거니까.”
다이안은 이 자리에 없는 비비의 마음을 대신 변명해 주기라도 하듯이 미뉴엘에게 맞서다가, 앞에 있는 루스카의 존재를 깨닫고 뒷말을 얼버무렸다.
“아, 얘네들 진짜 안 되겠네. 하여간, 또 쓸데없는 감상에 빠져서 헛소리하고 있어.”
미뉴엘이 이제는 정말 짜증이 난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리면서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