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났어요?”
다음 날, 눈을 뜨자마자 시야에 비치는 환한 빛에 무심코 눈을 찡그렸다.
“오늘은 늦잠을 잤네요. 많이 피곤했나 봐요.”
밤늦게 방으로 돌아와 잠깐 잠든 것 같은데, 어느새 아침인 모양이다. 그새 비가 완전히 그쳤는지 창밖이 밝았다. 커튼을 잡고 창가에 서 있는 어렴풋한 남자의 모습이 빛과 어둠 사이에 반쯤 걸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림자 밖으로 얼추 드러난 몸의 윤곽과 목소리만으로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체스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메이드를 제외하고 이런 시간에 내 방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체스휘밖에 없었다.
“날씨도 좋은데 점심 먹고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는 게 어때요?”
내게 여상히 권유하는 목소리가 부드러운 음률 같았다.
체스휘가 팔을 움직여 커튼을 완전히 걷었다. 눈부신 빛이 방 안 가득 쏟아져 들어오고, 햇살에 잠긴 체스휘의 모습도 내 눈앞에 완전히 드러났다.
‘뭐 저렇게 얄미울 정도로 반짝거리고 있어?’
나와 달리 고민이나 걱정 근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신수가 환한 얼굴이었다. 창문 바로 앞에 햇빛을 한가득 받으며 서 있어서 그런지, 얼굴이 반짝반짝 빛나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창문을 열자, 비 온 후 특유의 상쾌한 공기가 밀려 들어와 코끝에 스몄다.
바람에 머리칼을 흩날리면서 나를 돌아보는 체스휘의 모습은 무슨 청춘물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처럼 유독 청량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띄는 게 있어서, 나는 체스휘의 손에 들린 걸 흘기듯이 힐끔 쳐다봤다.
창틀을 짚은 체스휘의 손에는 어디에서 뜯어 왔는지 모를 꽃이 들려 있었다. 창문에서 들어오는 바람에 보송한 꽃대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설마 나 주려고 가져온 건가? 내가 저런 꽃 한 송이에 흔들릴 줄 알고? 지금의 나는 이 거짓말쟁이 남자에게 마음이 꽉 닫힌 상태란 말이다.
“더 잘 거예요?”
내 시선이 곱지 않은 걸 느꼈는지, 체스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이불을 쭉 끌어 올려, 시야에서 체스휘를 차단시켰다.
“이상하다. 어제는 그래도 일찍 잠자리에 든 것 같던데.”
“…….”
“하긴, 그래도 거의 이틀 밤을 새우다시피 했으니 아직은 피곤할 만도 한가.”
침대의 한쪽이 살짝 내려앉는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체스휘가 걸터앉기라도 한 모양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를 계속 모른 척했다.
체스휘는 내가 밤마다 얌전히 자지 않고 방 밖으로 나와 돌아다니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아무 말도 안 했지? 지금도 그렇고.
체스휘의 방치는 사라로사와 다르게 기분이 나빴다. 왠지 내가 체스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린 씨, 잠깐만 이쪽 좀 봐요.”
약간은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더해, 무언가가 이불 밖으로 나온 내 머리를 스치듯이 툭툭 건드렸다. 꼭 고양이나 강아지가 공을 가지고 놀 듯이, 성가신 느낌마저 주는 가벼운 감촉이었다.
머리카락에서 미끄러져 이마에 닿는 느낌으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손에 들고 있던 꽃으로 나를 간지럽히고 있는 것 같았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어요. 진짜 계속 잘 거예요?”
채근하듯이 이어진 목소리는 서두르는 기색 없이 느긋했다.
오늘도 변함없이 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게 더 나빴다. 체스휘가 지금 어떤 표정, 어떤 몸짓으로 나한테 말하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되었다.
그의 얼굴을 보면 별수 없이 마음이 또 약해질 거다. 그래서 고집스럽게 얼굴을 이불에 반쯤 파묻은 채 다시 자는 척했다.
할짝.
“……?”
간지러운 풀의 감촉 대신 축축하고 따가운 무언가가 눈가를 스친 건 바로 그때였다.
뭐야, 방금 뭐가 지나간 거지?
순간 뒷덜미가 오싹거리면서 소름이 돋는 느낌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이불을 확 걷어 내리자, 하얀 무언가가 눈앞에서 휙 사라졌다.
“아, 도망쳐 버렸네.”
침대 끝에 걸터앉은 체스휘는 내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방금 뭐였어요?”
그의 시선을 좇아 침대 밑을 훑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궁금해요?”
궁금했다. 분명 방금 뭔가가 내 얼굴을 핥은 것 같은데, 물리적인 거리상으로나, 심적인 느낌상으로나 체스휘는 백 프로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까끌한 느낌이 남은 부분을 문지르며 주변을 살피다가 대답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다시 체스휘를 쳐다봤다.
체스휘도 나를 마주하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잠깐, 그런데 손에 들고 있던 거, 꽃이 아니었네?
이제 보니 강아지풀 같은 종류의 풀이었다. 아무래도 아까는 내가 언뜻 봐서 꽃으로 잘못 생각한 것 같았다.
체스휘가 창가에 서 있을 때, 열린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때문에 눈이 아릴 정도였다. 빛을 담뿍 머금은 하얀 커튼까지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펄럭이며 체스휘를 부드럽게 감싸 안아서 더욱이 눈이 부셨다.
아무튼, 꼭 화보라도 찍는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어서 이런 소박한 강아지풀 같은 것보다는 꽃이 더 어울린다고 내가 무의식중에 생각한 모양이었다.
체스휘가 손에 느슨히 쥔 강아지풀로 장난스럽게 자신의 턱을 간질이면서 흐음, 하고 잠깐 뜸을 들였다.
“말 안 해 줄래요.”
하지만 곧 가늘게 호선을 그린 체스휘의 입술에서 잇따라 내뱉어진 말은 이처럼 얄미웠다.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다고 했는데, 모른 척한 건 린 씨잖아.”
그 말을 듣고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다.
자고로 사람을 가장 열받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말을 하다가 마는 거라고 했다.
그런데 가뜩이나 나한테 고구마 먹은 것처럼 갑갑한 기분을 들게 하는 사람이 아침 댓바람부터 이런 상큼한 얼굴로 또 나를 우롱해?
“하,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요. 나도 별로 안 궁금하거든요?”
나는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나서 체스휘의 손에 들린 강아지풀을 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옷 갈아입을 거니까 나가요.”
물론 체스휘는 그런 내 행동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또 눈을 접어 간지럽게 웃기만 해서 더욱이 나를 열받게 했다.
“린 씨, 어디 가요? 산책은 점심 먹고 하자고 했잖아요.”
그날은 대낮부터 그냥 대놓고 저택을 돌아다녔다. 어차피 내가 밤중에 침실에서 빠져나와 방들을 뒤지는 걸 체스휘에게 들킨 상태였으니, 이제는 굳이 몰래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어쩐지 체스휘가 아침이 아니라 점심을 먹은 후에 같이 산책을 하자고 하더니, 벌써 정오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의 말처럼 내가 오늘 늦잠을 자긴 한 모양이었다.
“따라오지 마요.”
“내가 말 안 해 줘서 삐졌어요? 별로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됐거든요? 별로 안 궁금하다고 했죠?”
체스휘와 이런 시시껄렁한 실랑이를 하면서 복도를 가로질렀다.
이번에도 내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으면, 체스휘는 느긋한 움직임으로 그런 나를 쉽게 따라잡았다. 나는 더욱 약이 올랐다.
우리를 본 고용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고개 숙여 인사했다.
원래 양육자들에게는 깍듯하게 굴던 고용인들이었지만, 지금 체스휘와 내게 보이는 그들의 태도는 그것과는 종류가 달랐다.
그걸 보자 왠지 또 속이 불편해졌다. 체스휘를 힐끔 쳐다봤으나, 그는 고용인들의 이런 태도가 익숙한 듯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나는 체스휘를 무시하며 앞서 걷다가, 결국 다시 뒤돌아보았다.
“왜 계속 쫓아와요? 지금 나 감시해요?”
“감시?”
내 따지는 듯한 물음에, 체스휘가 재미있는 농담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입술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혹시 저택에 내가 알면 안 될 거라도 있나 해서요.”
사실은 네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숨기지도 않고 전했다.
“지금까지 내가 린 씨에게 하지 말라고 막은 게 있었던가요? 내 기억으로는 없는 것 같은데.”
“…….”
“뭐든 린 씨가 원하는 대로 해요. 저택 안에서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보고,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가고. 난 아무것도 강제하고 있지 않은데.”
체스휘의 미소가 기분 탓인지 살짝 삐딱하게 기울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그건 체스휘의 말이 맞아서 오히려 내가 더 기분이 언짢아졌다.
나는 체스휘에게서 찌푸린 눈을 떼고 몸을 홱 돌렸다.
‘역시 그 사람을 만나야 돼.’
이 기묘한 위화감 속에서 눈을 뜬 첫날, 고용인들 사이에 서서 내게 신호를 보냈던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비록 찰나라 할 만큼 짧은 순간뿐이었지만, 오직 그 사람만 내게 생동감 있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내 옆에는 늘 체스휘나 그가 붙여 둔 고용인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과 접촉하기란 쉽지 않았다.
복도를 걸으면서 눈에 들어온 고용인들의 모습을 살폈으나, 내가 찾는 사람은 역시나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혹시나 체스휘가 수상함을 느낄까 봐, 대놓고 수색 작업을 할 수도 없었다.
나는 고용인들을 티 나지 않게 훑으며 이동해, 어제 확인하지 못한 빈방들을 확인했다.
그러는 동안 체스휘는 팔짱을 끼고 문가에 기대서서 그런 내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조금 전에 했던 말처럼, 그는 내가 방을 엉망으로 들쑤셔도 말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내가 어디까지 하나 가만히 두고 보려는 것 같기도 했다.
내가 무언가를 발견한 것은, 몇 번 허탕을 친 뒤 빈 음악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처음에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가, 뒤늦게 이곳이 어딘지 깨닫고 흠칫했다. 체스휘와의 역사(?)가 있는 음악실이었기 때문이다.
딱히 내가 동요할 이유는 없었지만, 괜히 머쓱해서 반사적으로 체스휘를 슬쩍 뒤돌아봤다. 체스휘는 문에 팔을 대고 서서 그런 나를 보고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헷갈리는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썹을 설핏 끌어올렸다.
“안 들어가요?”
“아니….”
바스락.
바로 그때, 피아노 쪽에서 작은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