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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82)화 (182/300)

“그럼 우리가 언제부터 여기에서 같이 살았어요?”

“오래전부터요.”

체스휘는 내 갑작스러운 물음에도 한 번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린 씨가 기억하지 못할 오래전부터.”

고요한 목소리가 속삭이듯이 귓가에 나지막하게 흘러들었다. 여전히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평온한 음성이었다.

“체스휘 씨는 내가 꿈을 꾼 거라고 했잖아요. 평소에도 자주 그래요? 그러니까… 내가 그런 생생한 꿈을 꾸고 착각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냐고요.”

지난 사흘 동안은 이 화제를 체스휘의 앞에서 일부러 다시 꺼내지 않았지만, 오늘은 내 인내심이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어쩌면 진실이든 거짓이든, 체스휘의 입으로 다시 한번 직접 답변을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몰랐다.

“그것도 기억 안 나요? 어쩐지 계속 서먹하게 굴더니, 그래서 그런 거였구나.”

체스휘는 이런 내 질문마저 익숙하다는 듯이 동요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한숨인지 웃음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모를 희미한 소리가 날아와 고막을 간질였다.

“이번 꿈은 좀 길게 가네요. 그렇게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로 만족스럽고 즐거운 꿈이었다는 의미인가?”

손질이 끝났는지, 체스휘가 내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한쪽 어깨 앞으로 내려놓았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한결 가까이 다가와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현실보다 꿈이 더 좋았다는 뜻 같아서 좀 질투 나려고 하는데.”

장난스러운 어조와 달리, 다음 순간 마주한 체스휘의 눈에는 낮게 가라앉은 시린 광채가 도사리고 있었다. 정말 그의 말처럼 내 꿈을 질투하기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체스휘의 말을 듣고 있으면 진짜 그와 내가 이곳에서 단둘이 오랫동안 오늘 같은 일상을 보내 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고작 사흘이었지만, 나는 효과적인 기억 조작을 당하는 듯한 기분에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내가 할 말을 고르며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체스휘가 먼저 가볍게 입꼬리를 들어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는 위로하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요. 곧 생각이 날 테니까.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지 마요.”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체스휘가 몸을 일으켰다.

“그럼 사라로사를 불러올게요. 오늘은 뒤척이지 말고 푹 자요, 린 씨.”

체스휘가 인사를 남긴 뒤 방을 나서고, 나는 사라로사의 도움을 받아 잠자리에 들 준비를 끝마쳤다.

그러나 당연히 밤이 깊을 때까지 잠들지는 못했다.

한밤중, 나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갔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지 창밖에서 적막한 소음이 밀려들고 있었다. 창문에 달라붙은 물방울 때문에 바깥 풍경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불이 전부 꺼져서 어두운 복도를 발소리를 죽인 채 혼자 걸어갔다. 혹시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을까 싶어 주변을 살폈으나,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달빛조차 먹구름에 삼켜져 사방이 암흑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앞으로 내딛는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내가 향한 곳은 다이안의 방이었다.

당연히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곳이라, 눈을 감고도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끼이익….

오랫동안 기름칠을 하지 않은 듯이 녹슨 소리가 나는 문을 열자마자, 싸늘한 공기가 훅 밀려들어 피부에 스몄다. 조용한 복도에 울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져서 멈칫했다. 어제도 이래서 오늘은 더 조심히 문을 열었는데도 별 소용이 없었다.

오늘도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한 느낌에 입술을 깨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밤마다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저택을 돌아다니는 이유는 혹시 이 기묘한 상황을 해결할 작은 흔적이라도 찾을 수 없을까 해서였다. 그래서 다이안의 방을 비롯한 사라진 다른 아이들과 양육자들의 방을 차례대로 샅샅이 훑었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 아무런 단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방을 아무리 뒤져도 그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물건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던 것처럼 문의 경첩과 창문의 이음새도 거의 녹슬어 있기까지 했다.

‘진짜…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든, 물건이든, 다 어디로 사라졌지? 혹시 다른 방에 가두고 숨겨 놨나?

그런 생각에, 저택의 다른 빈방들도 닥치는 대로 뒤져 봤다.

저택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어서, 눈에 띄지 않게 무언가를 감출 만한 곳도 많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의 빈방이 한두 개가 아니다 보니, 나 혼자 모든 곳을 전부 다 확인하려면 생각보다 긴 시간을 소요해야 할 듯했다.

“린 님.”

“헉!”

그렇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방들을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뭐 대단한 걸 하고 있던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나 혼자 몰래 뭔가를 도모하는 중일 때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깜짝 놀랐다.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세차게 때리도록 고개를 급히 돌리자, 갑자기 환한 빛이 시야를 덮쳤다.

“아, 죄송합니다. 불이 너무 가까웠지요?”

짧은 사과의 말과 함께 강한 빛이 조금 멀어지자, 가늘게 뜬 눈동자에 나와 마찬가지로 잠옷을 입은 채 등불을 들고 서 있는 메이드의 얼굴이 비쳤다.

“사, 사라로사? 여긴 어쩐 일이에요?”

“중요한 일을 하시는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는데, 신도 신지 않고 맨발로 나가신 것 같아서요.”

“슬리퍼 신었는데….”

“실내용 신은 제대로 보온이 되지 않잖아요.”

사라로사는 내 앞으로 다가와서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신발을 바닥에 내려놨다. 내 방에 있던 내 신발인 걸 보니, 아무래도 밤에 내가 잘 자고 있는지 보러 왔다가 침대가 비어 있는 걸 발견한 모양이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몸을 움직여, 사라로사가 가져다준 신발을 신기 위해 슬리퍼를 벗었다.

주근깨가 박힌 사라로사의 귀여운 얼굴에 씁쓸하게도 여전히 나를 향한 친밀감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일부러 이렇게 안 하던 야근(?)까지 하면서 신발을 들고 찾아와 줬다고 생각하니 살짝 감동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데면데면하게 변한 사라로사가 나를 챙겨 주지 않았다는 건 아니지만, 전과 다르게 언제나 선을 지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신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런데 사라로사에게 들켰는데 어떻게 하지? 다시 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이왕 신발까지 갈아신은 김에 다른 핑계를 대고 좀 더 돌아다녀 봐?

차라리 체스휘가 나타났으면 시치미를 떼며 바로 방으로 갔을 텐데, 하필 마주친 사람도 사라로사라 상황이 더 어정쩡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최대한 미적거리면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사라로사는 허리를 숙여 내가 벗은 슬리퍼를 대신 주워들 뿐, 그런 나를 보며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사흘째 잠을 제대로 주무시지 않으셨어요. 그러다 몸이 상하실 수도 있으니 오늘은 그만 방으로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그러다가 이내 앞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멈칫했다.

…‘오늘은’이라고?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아무래도 내가 밤마다 몰래 침실을 빠져나온 걸 아는 눈치였다. 지금까지 전혀 그런 내색이 없었는데?

“혹시 밤마다 내 방에 왔었어요?”

“네. 혹시 잠을 설치고 계시지는 않은지, 혹시 그렇다면 불편하신 점이나 필요한 게 따로 없는지 확인하려고요.”

“내가 방에 없는 걸 체스휘 씨한테 말했어요?”

“제가요? 아니요.”

사라로사에게 살짝 경계심을 느끼고 물었으나, 그녀의 대답은 의외였다.

내 부재를 체스휘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지금 이 저택의 모든 건 체스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었나? 다들 그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며 그의 명령만 따르는 것 같던데 말이다.

하지만 사라로사의 의연한 얼굴을 보니 지금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 아닌 듯했다.

아무튼, 체스휘가 모른다면 다행이지만….

‘그럼 왜 지금까지 모른 척했지? 혹시 나를 도와주려는 생각이었던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나한테 관여하고 싶지 않았던 건가? 사라로사의 무미건조한 얼굴을 보면 왠지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방에 없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걸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서운해해야 하는 건지 기분이 좀 미묘했다.

“내가 지금 방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체스휘 씨한테 말할 거예요?”

“아니요.”

사라로사는 내 이번 질문에도 고개를 저었다.

나는 사라로사를 물끄러미 보다가 멈춰 있던 자리에서 걸음을 옮겼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사라로사는 자러 가요. 전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갈 테니까.”

사라로사의 얼굴을 오래 마주하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눌수록 껄끄러운 마음만 점점 커져 가는 것 같았다.

내가 아는 사라로사와의 괴리감이 너무 커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네, 린 님도 밖에 너무 오래 계시지 마세요.”

사라로사는 그냥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검은 공기 중독 증상 때문에 힘들어지시면 복도로 나오시고요. 빈방에는 성수 화병을 두지 않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마침 그저께 밤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그러고 보니 왜 밤에도 복도에 성수 꽃을 놔둬요? 원래 안 그랬잖아요.”

“주인님의 명령이세요. 린 님이 오늘처럼 혼자 침실 밖으로 나와서 돌아다니실 때 몸에 무리가 가면 안 된다고요. 그래서 오늘 저녁에도 복도에 있는 꽃병 수를 더 늘렸어요.”

담담하게 이어진 사라로사의 말에, 나는 갑자기 창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 하나가 뒷덜미에 툭 떨어진 것처럼 한기가 이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체스휘 씨가 내가 밤에 돌아다니는 거 알아요?”

“네.”

“말 안 했다면서요?”

“말씀드리지 않아도 이미 알고 계시던걸요.”

나는 그만 소름이 돋아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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