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레드포드 저택의 주인
오늘은 새벽부터 날이 흐렸다. 요즘 레드포드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맑고 화창한 하늘이 갑자기 우중충해지며 폭우를 퍼붓는 경우도 많았다.
동이 틀 무렵부터 짙은 안개 속에서 점차 모여들던 먹구름이 결국 점심 무렵 우르릉, 낮게 포효하며 비를 쏟아냈다. 바람에 날아온 굵은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번에도?”
“네, 식욕이 별로 없으신가 봐요.”
부엌에서 일하는 보조 요리사가 생각보다 일찍 트롤리를 끌고 돌아온 메이드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메이드가 가져온 트롤리 위의 접시에는 거의 모든 음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주인님은 별말씀 없으셨고?”
“다행히 음식이 남은 접시를 한번 쳐다보기만 하시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요.”
“얼마 전에 억지로 식사하시다가 체한 적이 있어서 그런가?”
“그것도 그렇고….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하긴….”
고용인도 메이드의 말에 그럭저럭 납득한 듯이, 별다른 얘기 없이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레드포드 저택의 여주인이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게 된 것은 이틀 전부터였다. 고용인들로서는 제법 신경 쓰이는 일이었지만, 여주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늘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주인도 별말이 없었으니 그들이 더 관여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저택의 주인은 성품이 냉정해서, 고용인들이 선을 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그가 데려온 여주인에게 허가받은 영역 이상으로 간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금기였다.
그러니 아무리 여주인의 앞에서만 영혼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이 달라진다고 해도, 그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되었다.
“비가 많이도 쏟아지네요…. 이번 비는 좀 빨리 그치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두 사람은 그쯤에서 입을 다문 뒤 조용히 각자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창밖에서는 아직도 멈출 낌새가 보이지 않는 폭우가 시야를 가리며 퍼부어지고 있었다.
***
“그만 먹을래요.”
저녁 식사 때도 어김없이 군침이 도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 만찬이 눈앞에 차려졌다.
하지만 이미 뚝 떨어진 입맛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 식사도 거의 맛만 보다시피 한 뒤 포크를 내려놨다.
체스휘도 내 말을 듣고 덩달아 손을 내렸다. 그는 내 맞은편도 아니고, 바로 옆에 앉아 방금까지 나한테 직접 음식을 덜어 주고 있었다.
“계속 식욕이 없나 봐요. 어쩌지. 다른 걸 만들어 오라고 할까요?”
“아니요.”
내가 거절하자 체스휘는 두말하지 않고 식탁을 치우게 했다. 그의 작은 고갯짓에 메이드들이 곧바로 움직여, 아직도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음식들을 내 눈앞에서 치웠다.
나는 그렇다 쳐도, 체스휘도 나를 따라 식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있었다. 저러고도 배가 고프지 않은가 싶었지만, 쥐가 고양이 생각을 해 주는 꼴이 아닌가 싶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왠지 속이 타서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탁 소리 나게 컵을 내려놨다.
“린 씨, 잠깐만.”
거의 동시에 옆에서 뻗어진 손이 내 얼굴에 닿았다.
나도 모르게 주춤하며 고개를 뒤로 살짝 뺐다. 그러다가 내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체스휘의 손을 피한 것 같아서 멈칫했다.
“여기, 소스가 묻어서요.”
체스휘는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 행동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기색으로 부드럽게 손을 움직여 내 입가를 마저 닦아 줬다.
나는 작게 인상을 쓰며 체스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나를 향해 가볍게 웃어 보였다.
간지러울 정도로 애정이 담뿍 담긴 눈빛에 옆구리를 쿡 찔린 느낌이 들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먼저 방에 갈게요.”
쨍그랑!
그런데 뒤쪽을 보지 않고 몸을 돌리다가, 하필 그릇을 치우기 위해 테이블 가까이 서 있던 고용인과 부딪혔다.
그녀가 들고 있던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지고, 파편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식당에 또다시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수많은 눈이 일시에 나한테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접시를 깨트린 고용인이 놀란 듯이 잠깐 굳어 있다가, 서둘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제 부주의로….”
“괜찮아요. 내가 잘 안 보고 움직여서 그런 건데요.”
나는 기묘한 긴장감이 떠돌기 시작한 식당 안의 분위기에 덩달아 신경을 곤두세우며 눈만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식당에 있던 고용인들이 숨소리까지 죽인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린 씨. 발목에서 피 나요.”
그때, 체스휘에게서 흘러나온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를 스쳤다.
그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말 깨진 접시의 파편이 튀면서 피부를 살짝 벴는지, 복사뼈 부근에 붉은 실선이 그려진 게 보였다.
체스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바닥에 작게 끌렸으나, 식당이 워낙 조용해서 상대적으로 소리가 크게 울린 것처럼 느껴졌다.
“방으로 가서 치료해야겠네요. 위험하니까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체스휘는 나한테 할 말과 달리, 정작 자신은 바닥에 있는 유리 조각을 서슴없이 그냥 밟고 내게 다가왔다.
다음 순간 팔을 뻗은 체스휘가 나를 훌쩍 안아 들어서, 나는 무심코 ‘앗’하고 얕은 숨을 들이마시며 그의 어깨를 손으로 짚었다.
체스휘는 무슨 가벼운 어린애라도 들어 올리듯이 나를 거의 한 팔로 안아 지탱한 채 옆에 있는 고용인을 한번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여기, 치워요.”
“네.”
단지 그것뿐이었는데도 고용인은 이상할 정도로 사색이 되어서, 나와 체스휘 쪽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분위기에 압도되어 쉽게 입을 열지 못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또다시 체스휘와 한 쌍의 사이좋은 잉꼬 커플처럼 소파에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다.
‘뭐지, 이 데자뷰는…?’
이번에는 장소가 식당이 아니라 방인 것만 달랐다.
“린 씨, 비가 안으로 들이치는데 창문을 좀 닫을까요?”
그윽한 차향과 느긋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뒤섞여 방 안에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은은한 음률 같은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 사이로 날아들어 매끄럽게 내 귀를 감쌌다.
나는 체스휘를 구겨진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는 깨진 유리에 베인 내 발목에 직접 약을 바르고 거창하게 붕대까지 감아 준 뒤에야 만족했다. 그러고 나서 지금은 내 옆에 앉아 느슨히 턱을 괴고 책을 읽다가, 잠깐 창가에 시선을 둔 참이었다.
사실 오늘뿐만이 아니라 지난 사흘 동안 체스휘는 하루의 거의 모든 시간을 나와 함께 하고 있었다.
물론 딱히 내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 그냥 정신을 차려 보면 구렁이가 담 넘듯이 항상 상황이 이렇게 되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상에 깊은 의문을 느끼는 건 오직 나뿐인 듯했다.
“아니요. 지금 시원하고 딱 좋은데요.”
나는 체스휘에게 강한 반발심을 느끼며 그의 말을 부정했다.
어쩐지 오늘 아침부터 공기 중에 습기가 느껴지더니, 점심부터 한바탕 비가 쏟아졌다.
레드포드 저택에서 이렇게 장마라도 온 것처럼 비가 많이 내리는 건 처음 봤다.
체스휘의 말처럼 빗물이 방으로 들이닥치는 게 보였지만, 창문을 닫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오늘도 먹은 것 없이 꼭 속이 얹히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갑갑했다.
나는 꼭 청개구리 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그의 말을 듣고 오히려 옆에 있는 창문을 더 활짝 열어젖혔다.
“하긴, 비에 씻긴 공기가 상쾌하긴 하네요.”
당연히 안으로 들어오는 빗물이 더 많아졌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체스휘도 내게 같은 권유를 또 하지는 않았다.
그는 대신 소파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담요를 가져와 내게 덮어 줬다.
“그래도 혹시 또 탈이 날지도 모르니까 몸은 따뜻하게 하는 게 좋아요.”
눈이 마주치자 체스휘가 나를 향해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을 접어 나붓이 미소 짓는 얼굴이 오늘도 변함없이 예뻤지만….
나는 퍽 다감한 태도로 내게 담요를 덮어 준 뒤 다시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한 체스휘를 힐끔 쳐다보았다.
내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여전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체스휘의 앞에서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는 나와 달리, 그는 정말 얄미울 정도로 태평해 보였다.
꼭 지금뿐만이 아니더라도, 지난 사흘 동안 내가 원하는 걸 체스휘가 굳이 하지 못하게 막는 건 거의 보지 못했다.
나는 내 앞에 앉은 남자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으로 뜯어봤다.
그러는 동안, 내가 체스휘에게 강한 의혹을 느낀 사흘 전의 일이 어김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요?”
“린 씨…. 어젯밤에 또 ‘그 꿈’을 꿨나 보네요.”
마리엔이 죽은 날 밤에 의식을 잃고 다음 날 깨어나 보니, 레드포드 저택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지나치게 평화로웠다. 고요한 호수처럼 물살 하나 없이 잔잔한 모습에 기묘한 위화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당연히 나와 함께 있던 체스휘에게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들은 답변은 참으로 황당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니, 여긴 원래 우리 둘밖에 없었잖아.”
체스휘는 이 레드포드 저택에 내가 말한 아이들과 양육자 같은 건 없고, 고용인을 제외하고는 우리 둘뿐이라는 엉뚱한 소리를 했다. 심지어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일상이 지속되어 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나요? 내가 다이안을 만나고, 양육자로 지냈던 시간들이 모조리 꿈이라니?
‘아, X발 꿈….’ 같은 엔딩이 먹혔던 것도 옛날이지, 요즘은 소설도 그런 내용으로 쓰면 욕먹어!
그런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처럼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건 체스휘만이 아니었다.
“사라로사, 다이안 못 봤어요? 다른 아이들하고 양육자들도요. 왜 아무도 안 보여요?”
“이 저택에는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다.”
저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체스휘의 말처럼 생각하는 듯해서 소름이 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