짹짹.
어디선가 새가 영롱하게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살짝 잠에서 깨 몸을 뒤척이다가, 눈꺼풀 사이를 강제로 비집고 들어오는 밝은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벌써 아침인가?
이제 그만 일어나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포근한 침대와 이불의 유혹을 이겨 내기가 어려웠다. 어쩐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피곤해서 좀 더 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옆쪽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져서 반짝 눈을 떴다.
“아, 일어나셨어요?”
곧바로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고막을 스쳤다.
“혹시 저 때문에 깨셨나요? 죄송해요. 조용히 화병만 가져다 둔다는 게….”
“사라로사?”
“네, 린 님. 혹시 좀 더 주무실 건가요?”
“아니….”
“그럼 세안하실 물을 들여올게요. 언제 일어나실지 몰라서 계속 따뜻하게 덥혀 놓고 있었거든요.”
사라로사는 손에 들고 있던 화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바로 방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잠깐 침대에 누운 상태로 눈을 깜빡이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시야에 비친 광경이 어딘가 이상했다. 내 방은 이렇게 화려하지 않은데?
방 안에 있는 가구들과 벽을 꾸민 장식품들, 하다못해 바닥에 깔린 양탄자까지 하나같이 전부 값비싼 최고급품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누워 있는 침대와 그 위에 있는 침구들도 낯설 정도로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던 게 뒤늦게 떠올랐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자고 있던 거지?
잠들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꼭 술을 마시고 필름이라도 끊긴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의구심을 느끼고 있을 때, 사라로사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내게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사라로사, 여기 어디예요? 내 방이 아닌데.”
“무슨 말씀이세요? 이곳은 린 님 방이 맞아요.”
“뭐….”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으나, 사라로사가 너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세안하실 동안 갈아입으실 옷을 준비할게요. 혹시 오늘 따로 원하시는 스타일이 있을까요?”
그녀는 내 의혹 어린 시선을 느끼지도 못했는지, 여전히 태연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또 한 번 황당해졌다. 나한테 있는 옷은 원단이나 색상, 스타일도 거의 다 비슷비슷했다. 그래서 따로 고르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데, 뭘 묻는 거지?
“…그냥 아무거나요.”
내 대답을 들은 사라로사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자리를 비웠다.
내가 알 수 없는 위화감과 찜찜함에 주저하며 세안을 마쳤을 때쯤, 사라로사가 다른 메이드들을 우르르 이끌고 돌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어디로 봐도 낯선 옷들과 구두, 장신구들 같은 게 들려 있었다.
나는 진심으로 이 상황이 기이하게 여겨졌다.
“뭐예요? 이거 내 거 아니잖아요.”
“전부 린 님 거예요.”
사라로사는 이번에도 내 말을 부정했다. 그녀뿐만이 아니라 뒤에 있던 다른 고용인들도 사라로사처럼 감정의 동요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유리알 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이 저택에 있는 모든 게 린 님의 것입니다.”
사라로사가 나를 보며 읊조린 순간,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당연한 진실을 말하는 듯한 저 태도만 보면, 여기서 이상한 건 저들이 아니라 나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니…. 혹시 정말 그녀의 말이 맞는 건가? 지금 이상해진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나인가?
지금까지 내가 어떻게 지냈었는지 기억을 돌이켜 봤다. 하지만 안개가 낀 것처럼 머릿속이 뿌옇기만 했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로 사라로사와 다른 고용인들의 손에 이끌려 옷을 갈아입었다.
“식사는 식당에 준비되어 있어요.”
“방이 아니라요?”
방에는 시계가 없어서 지금은 몇 시쯤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환한 창밖을 보니 이미 오후에 가까운 시간인 것 같기는 했다.
나는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인 채 방을 나섰다. 복도에도 눈 부신 햇빛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동안 마주친 고용인들이 나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들 역시 내게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만큼은 사라로사처럼 낯설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괴이하게 생각하는 사람 역시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이 뭐가 괴이하냐고 하면, 나도 명확히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이상하다. 내가 뭔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도대체 뭐지?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리며 도착한 식당에는 고용인들밖에 없었다. 나는 그중 한 명이 빼 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에는 식기와 물컵, 포크와 스푼, 냅킨 같은 것들이 모두 두 벌씩 준비되어 있는 상태였다.
“주인님께서도 금방 오실 겁니다.”
다른 고용인이 먼저 내 컵에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레드포드 저택에서 좀처럼 사용할 일 없던 낯선 용어에 내가 누구를 말하는 거냐고 질문하려 했을 때, 식당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먼저 내려와 있었네요.”
귓가에 울린 나지막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늦어서 미안. 잠깐 해결할 일이 있어서요.”
나는 막 식당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보고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거운 의자가 뒤쪽으로 끌리면서 듣기 싫은 소음이 식당 안에 울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살짝 흐트러진 금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나를 응시하던 눈이 설핏 가늘게 좁혀지는 듯했다. 그는 그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채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내가 반가워서 인사해 주려고 일어난 거예요? 나도 보고 싶었어요.”
웃음기가 어린 장난스러운 목소리 뒤로 애정 어린 입맞춤이 떨어졌다. 체스휘는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인사한 뒤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아침에 눈뜰 때 옆에 있어 주고 싶었는데 미안해.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 모습이 참으로 여상해서, 꼭 이런 일상이 그와 내게 매일같이 있어 왔던 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린 씨 배고프겠다. 앉아요.”
나는 체스휘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체스휘도 착석한 뒤, 기다렸다는 듯이 고용인들이 다가와 테이블에 음식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평온했다. 그 속에서 오직 나 혼자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체스휘의 얼굴을 본 순간 깨달은 위화감의 정체를 그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어요?”
그러자 물잔을 들어 올리던 체스휘의 손이 멈췄다.
“다른 사람들이라니?”
잠시 후 그가 내게 느릿하게 시선을 돌리며 반문했다.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저택에 있던 아이들하고 양육자들이요. 어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한가롭게 우리 둘이 아침 식사나 하고 있어도 되는 거예요? 저택은 또 왜 이렇게 조용하고….”
그 순간 식당 안에 있던 고용인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도 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움직이던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정말 바늘 굴러가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인위적인 적막감이 느껴졌다.
그 부자연스러운 침묵에 나도 흠칫해서 입을 다물었다.
체스휘의 얼굴빛도 살짝 변했다. 꼭 응달 속에 있는 것처럼 짙어진 눈빛이 나를 향했다.
체스휘가 천천히 팔을 내려 테이블 위에 물잔을 다시 내려놓자, 고용인들도 언제 부자연스럽게 움직임을 멈췄었냐는 듯이 다시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고요한 눈으로 나를 가만히 주시하던 체스휘가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어딘가 조심스럽고 애틋함마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린 씨…. 어젯밤에 또 ‘그 꿈’을 꿨나 보네요.”
“꿈?”
“응, 꿈.”
내 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도 그의 손길만큼이나 부드러웠다. 하지만 묘한 단호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음성으로, 체스휘가 내 눈을 똑바로 직시하며 덧붙여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니, 여긴 원래 우리 둘밖에 없었잖아.”
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가늠하지 못한 채 가만히 그와 시선을 맞댔다.
그러다가 헛웃음을 흘리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체스휘는 식당을 뛰어나가는 나를 붙잡지 않았다.
“다이안!”
나는 복도를 뛰어 내 침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출입했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다이안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기존의 가구 같은 것은 그대로 있었지만, 소년이 사용하던 개인적인 물품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하루아침에 누가 치웠다고 하기에는, 사용감조차 느껴지지 않는 방의 모습에 나는 두 눈을 부릅떴다.
다른 양육자들과 아이들의 방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 같이 이용했던 티룸이나 휴게실, 악기들이 있는 방도 그대로 있었지만, 누군가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뭐야….”
“린 님.”
“사라로사, 다이안 못 봤어요? 다른 아이들하고 양육자들도요. 왜 아무도 안 보여요?”
어느새 나를 따라온 사라로사에게 묻자, 그녀가 내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이 저택에는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다.”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더군다나 나를 대하는 사라로사의 태도도 낯설어서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저택 어디에서도 내가 알던 사람들이 보이지 않자, 나는 뭐가 뭔지 알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린 씨.”
그러다 뒤에서 나지막하게 나를 불러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문가에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조용히 주시하고 있던 체스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내게 다가왔다.
“이리 와요.”
온기 어린 손이 나를 살며시 잡아끌었다. 달래듯이 나를 당겨 품에 끌어안고 등을 쓸어 주는 손길을 느끼며 나는 숨소리를 죽였다.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인가 봐요.”
다정한 속삭임이 꼭 꿈결처럼 아득하게 귓가에 번졌다.
“괜찮아. 당신한테는 내가 있잖아.”
지금 나를 둘러싼 모든 게 다 이상한데, 오직 체스휘만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그래서 힘이 빠진 몸을 그에게 기대고 싶어졌다. 그러면 마음속의 혼란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아서.
만약 그때 체스휘의 뒤에 서 있던 사람과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면 더 오랫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다른 고용인들 사이에 조용히 서 있던 사람이 혼자 창백한 얼굴을 살짝 들어 내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도 반짝 불이 들어온 것 같았다.
“그러게요…. 내가 아직 꿈에서 덜 깨서 이상한 소리를 했나 봐요.”
다행히 내 입에서는 아까보다 한결 차분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체스휘가 몸을 살짝 떼고 내 얼굴을 내려다봤다. 차갑게 가라앉은 듯한 날카로운 눈빛이 내 속을 모조리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체스휘에게 더 가까이 붙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나와 맞닿은 남자의 몸이 멈칫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인지하지는 못했지만, 꼭 내가 먼저 체스휘에게 선뜻 안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잠시 후 머리 위에서 한숨 섞인 미약한 웃음소리가 울리며 내 등에 단단한 팔이 둘러졌다.
“그만 들어갈까요?”
“네.”
나는 낯설면서도 익숙한 남자에게 안겨 그 어느 때보다 기묘한 저택 안으로 발을 들였다.
<1부 끝.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