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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77)화 (177/300)

‘뭐라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길이 내 등줄기를 쓸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한순간 내 발밑에 깔려 있던 검은 베일을 쓴 여인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미처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눈앞에 떠오른 글씨가 변했다.

[빙의된 동안 일시적인 수면 상태에 들어갑니다.]

“뭐 이런 개 쓰레기 같은 경우가…!”

나는 시스템 창이 전달하고 있는 명확한 의미를 한 박자 늦게 깨닫고 경악했다.

본능적인 위기감에 무심코 방아쇠를 당기려고 하던 손이 도중에 저절로 멈춰졌다. 누군가 전원 버튼을 눌러 일시에 모든 감각이 차단되는 것처럼, 순식간에 모든 소리와 빛이 내게서 사라졌다.

그 후 아주 찰나의 시간만이 지난 것 같았다.

댕.

다시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아까보다 어두웠다.

사방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리깔려 있었다. 나는 잠깐 숨을 죽인 채 신경을 바싹 곤두세웠다.

댕, 댕.

때마침 멀리서 울린 괘종시계 소리가 지금이 오후 9시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그 순간 찬물을 맞은 듯이 온몸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며 나는 바닥에 눕혀져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빙의의 여파 때문인지, 꼭 흠씬 두드려 맞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게다가 어째서인지 배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읏, 뭐야….”

통증이 이는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대자 금방 질척한 무언가가 흥건히 묻어 나왔다. 의식을 잃은 지 불과 5분 정도밖에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도대체 그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내 몸에 빙의가 되었던 건가? 지금은 풀린 상태고? 그런데 내 꼴이 왜 이래?

나는 얕은 숨을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눈을 감기 전에 내가 있던 곳이 밝은 복도였다면, 지금 나는 은은한 불빛만이 감도는 방 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조금 전 상체를 일으켜 앉을 때 바닥을 짚은 손에 바스락거리는 무언가가 스치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것은 누군가의 옷자락이었다. 나는 무의식중에 검은 물결처럼 이어진 천 조각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내 시선이 눈에 익은 얼굴 위에서 우뚝 멈췄다.

이, 게 뭐야….

아까 낮에 봤을 때보다 창백한 낯빛을 한 마리엔이 고요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심코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지만, 벌려진 입술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은 저녁 9시. 원래 이때 내가 만나기로 약속했던 사람이 정확한 시간에 눈앞에 나타난 것은 어찌 보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은 명백히 기이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목이 막히고 입 안이 바짝 말라서, 괜스레 침을 한번 삼켰다. 그러고 나서도 입술은 소리 없이 달싹여지기만 했다.

내가 그렇게 헛짓거리를 하는 동안, 마리엔은 줄곧 바닥에 가만히 누운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답지 않게 흐트러진 옷차림과 머리카락을 정리하지도 않고, 마리엔은 계속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했다. 미동 없이 떠진 푸른 눈이 어쩐지 섬찟했다.

나는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며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마리엔 씨….”

그런데 한기를 덧입힌 내 손가락이 몸을 가볍게 스치자마자 마리엔은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 순간 누가 머리를 세게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뒷목이 저릿해졌다. 덜컥 심장이 내려앉고 숨이 막혔다. 허공에 멈춘 손은 망연히 굳어서 움직일 줄 몰랐다.

나는 바닥에 쌓인 검은 재를 눈 한번 깜빡이지 못한 채 내려다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눈에 익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던 것은 지금 새까만 가루가 되어서 본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마리엔이 누운 자리를 덮고 있던 건 검은 옷자락만이 아니었다. 그 주변에 검게 흐드러진 꽃이 피어 있는 것이 이제야 눈에 띄었다. 내 손도 나한테서 흐른 피뿐만이 아니라 검은 액체까지 묻어서 얼룩덜룩했다.

원래 레드포드 저택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주변에 붉은 꽃이 피어난다. 그러나 지금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붉은색이 아닌 검은색 꽃이었다. 그리고 이런 어두운 빛깔의 꽃이 피어나는 경우는 모로스가 죽었을 때뿐이었다.

그런데 왜 마리엔한테서 검은 꽃이…. 아니, 방금 내가 본 게 정말 마리엔이었던 건 맞나?

걷잡을 수 없는 혼란스러움에, 방금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장면조차 사실 헛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의심이 자라났다.

- 마리엔(29)/사망

그러나 유지니아 때처럼 시스템 창에 떠오른 정보를 확인한 뒤에도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마리엔이 내 앞에서 검은 재가 되어 사라진 건 명백한 현실이라는 의미였다.

게다가 마리엔은 지금 모로스가 되어 죽은 상태였다.

즉, 그녀는 지금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었다. 전에 이미 한번 죽어서 다른 영혼을 몸에 받아들인 자만이 모로스가 되니까….

그럼 마리엔은 도대체 언제부터 모로스였지?

‘이미 알고 있잖아.’

바로 그 순간,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속삭였다.

‘마리엔이 모로스였던 걸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어.’

그에 반사적으로 부정하려 했지만, 이번에도 내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왜 또 혼자 이 늦은 밤에 저택을 돌아다니고 있지?”

문득,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어느 날 밤에 복도에서 마리엔과 마주쳤던 기억이 났다. 꼭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의식이 흐릿했던 그날 밤.

“잠깐, 왜 손에 피가….”

지금 마리엔의 검은 피로 물든 내 손 위에, 그때의 붉게 젖은 손이 한순간 겹쳐 보이는 듯했다.

작은 전구에 불이 들어오듯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희미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이제 기억이 났다.

그날, 마리엔은 죽었다. 그리고 그녀를 죽인 건 바로 나였다.

또한, 지금 그녀를 다시 한번 죽인 것도….

“…너였어?”

나는 어느새 소리 없이 내게 다가와 구경하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던 여인을 향해 물었다.

“그때도 네가 내 몸에 들어왔었어?”

검은 베일 너머에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얼굴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지만, 꼭 그녀가 나를 향해 웃는 것 같았다.

그날, 침실을 나서기 전에 누군가의 인기척에 언뜻 잠에서 깨어난 나를 보고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아까까지만 해도 내 발밑에 깔려 있던 영혼이 나를 비웃듯이 내려다보다가, 몸을 굽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유령이 살아 있는 인간처럼 호흡할 리가 없었는데도, 꼭 차가운 숨결이 내 뺨을 얼리는 것 같았다.

“윽!”

바로 그 순간, 차가운 손이 내 배를 뚫고 들어왔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꼭 상처를 헤집듯이 손을 내 안 깊은 곳까지 쑤셔 넣었다. 손톱을 세워 그녀의 팔을 붙잡았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어느새 내게 공격당해 입었던 상처를 전부 회복한 것 같았다. 그때 사용했던 총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이거, 흡… 안 놔?”

손발에 닿는 대로 여인을 공격했으나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찢어진 복부에서 흐르는 피가 점차 끈적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이건 단순한 상처가 아니라 모로스의 독에 당한 상처인 듯했다.

내게 이 부상을 입힌 모로스는 방금 내 앞에서 검은 재가 된 마리엔일 터였다. 짧은 시간 동안 도대체 얼마나 격렬한 사투를 벌였는지, 내 몸은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어쩌면 내 몸에 빙의한 영혼이 마리엔의 앞에서 저항하지 않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이 미친 유령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내가 모로스의 독에 오염된 탓에, 악령이 된 영혼이 이렇게 내게 물리적으로 간섭하기도 더 쉬워진 것 같았다.

혹시 그래서 일부러 마리엔의 앞에 나를 데려다 놨나? 하지만 그녀는 이 여자의 언니가 아닌가? 왜 내 손에 죽게 했지?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의 손은 여전히 내 안에 들어와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듯이 더듬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의 손이 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꽉 움켜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그녀에게 붙잡힌 것이 실체가 없는 무언가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래….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꼭 침입자의 손에 내 영혼이 붙들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의 다른 손이 이번에는 위쪽으로 올라와 내 얼굴을 스치는 순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베일로 가려진 얼굴이 내게 더 바짝 다가와 붙었다. 꼭 내 얼굴을 가까이에서 뜯어보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먹잇감의 냄새를 맡는 것 같기도 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마침내, 여인의 입이 베일 뒤에서 크게 벌어졌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이에 어깨를 물어뜯기는 느낌이 들었다.

뒤이어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밖으로 빨려 나가는 듯한 느낌이 덧씌워졌다.

“……! ……?!”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바로 그 순간 나와 맞닿아 있던 영혼이 경기하듯이 파드득 몸을 떨었다.

나를 덮치고 있던 검은 형체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아니, 단순히 멀어진 것뿐만이 아니라 그녀는 꼭 나한테 급소를 공격당하기라도 한 것처럼 혼자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내지르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고통스럽게 몸을 떨면서 경련하던 영혼은 그 와중에도 내게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는 듯이 엉금엉금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진 것과 누군가의 구둣발이 시야에 비친 것은 거의 동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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