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75)화 (175/300)

“저한테요?”

확인하듯이 반문했으나 마리엔은 대답 대신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이렇게 마리엔이 먼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부른 건 처음이라 의외이기도 했고, 의아하기도 했다.

“알겠어요.”

마리엔의 창백한 얼굴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침 요즘 들어 이상해 보였던 그녀의 상태가 신경 쓰이기도 했던 참이라 모처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체스휘가 잠시 후 계단을 내려가는 길에 나한테 물었다.

“오늘 저녁에 1호실의 마리엔 씨하고 단둘이 만날 거예요?”

“네,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니까요.”

체스휘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잠깐 말이 없었다.

“참, 체스휘 씨. 악마의 화원에 있는 씨앗이요.”

“힉.”

그런데 내가 막 체스휘를 찾던 이유가 생각나서 입을 열었을 때, 갑자기 밑에서 흠칫 놀란 듯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체스휘의 팔에 들려 있다가 내 말에 크게 동요해서 몸을 들썩인 것은 비비였다.

아, 맞아. 아직 비비가 옆에 있었지? 답지 않게 너무 얌전히 있어서 잠깐 존재를 잊고 있었다.

자신이 예전에 지은 죄를 알긴 아는지, 비비는 조심스럽게 눈을 굴려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물론 나는 새삼스럽게 비비를 질책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건 아니라, 그를 힐끔 쳐다본 뒤 다시 체스휘에게 질문을 이었다.

“혹시 안 위험한 씨앗도 있을까요?”

“위험성의 기준이 뭐냐에 따라 다르겠죠?”

체스휘의 답변은 모호했다.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말했다.

“지난번처럼 갑자기 뿌리가 나온다든가, 아니면 독성이 있다든가…. 어쨌든 가지고 있으면 인체에 해로운 영향을 끼치는 씨앗만 있는 건지 궁금해서요.”

“그냥 가지고 있는 정도로는 인체에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 거…. 그런 종류의 씨앗도 있기는 해요.”

“그럼 그런 건 어떻게 구분해요?”

“여러 가지 기준이 있는데, 일반인도 알아보기 쉬운 구분법은 역시 색이죠.”

“색이요?”

“보통 완전히 하얗거나, 완전히 짙은 보라색을 띠는 건 그냥 가지고 있어도 무해해요.”

왠지 체스휘는 알 것 같았는데, 역시나 그는 내 질문에 막힘 없이 대답해 줬다.

흰색과 보라색 씨앗이 인체에 무해하다면, 다이안이 부적 삼아 가지고 있던 것도 안전한 셈이었다. 혹시 내가 체스휘에게 준 게 씨앗이 맞다 해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나는 그제야 약간 마음을 놓았다.

“체스휘 씨는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아요?”

“그냥 어쩌다 보니까.”

체스휘는 내 물음에 그냥 의뭉스럽게 웃기만 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역시 다른 사람들도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내용은 아닌 모양이다.

체스휘에게 별관의 침입자에 대해서도 알려 주려고 하다가, 다른 이야기를 더 하기에는 비비의 귀가 신경 쓰여서 그냥 나도 그쯤 해서 입을 다물었다.

똑똑!

“유지니아 씨.”

잠시 후, 우리는 유지니아의 방 앞에 도착했다. 비비를 그의 방에 바로 데려다줘도 되었지만, 역시 비비를 이대로 두기에는 위태로워 양육자인 유지니아에게 방금 있었던 일을 알려야 할 것 같았다.

“유지니아 씨, 안에 계세요? 저 잠깐 들어갈게요.”

물론 오늘도 유지니아의 방에서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비비가 유지니아를 보지 못한 지도 벌써 며칠이나 지났다고 하고, 그 이유도 병환 때문이라고 하니 이대로 모른 척하는 것도 찝찝했다. 적어도 멀쩡히 있는지는 확인해야 나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비록 유지니아의 허락은 없었지만, 체스휘를 문 앞에 둔 뒤 비비를 데리고 그녀의 방에 들어갔다. 지금은 유지니아의 메이드도 자리를 비워서 나를 막는 사람도 없었다.

“유지니아가 쉬는 동안 찾아오지 말라고 했는데…. 마음대로 들어오면 혼날 텐데….”

비비는 침울함과 긴장감이 섞인 얼굴로 주춤주춤 나를 따라왔다. 나는 그런 그를 달래면서 어두운 방 안으로 더 깊이 걸어 들어갔다.

“유지니아 씨. 유지니아 씨?”

유지니아를 불렀지만 방은 여전히 조용했고, 커튼이 틈 없이 드리워져 어두웠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가구나 물건들을 분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혹시 지금도 자고 있나? 몸이 많이 안 좋다고 했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밖에서 확인할 때마다 유지니아의 방 창문에는 내내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소파 밖으로 삐져나온 팔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유지니아를 찾았다는 생각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소파에 비스듬하게 누운 사람의 형체가 보였다.

쿠션을 벤 유지니아의 머리는 옆으로 기울어져, 짧은 단발이 그녀의 어깨 위에 흩어져 있었다. 깊게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얼굴에는 깊은 음영이 져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설명하기 어려웠지만, 기묘한 위화감이 내 걸음을 멈추게 했다.

내게 확실한 깨달음을 준 건, 바로 그 순간 울린 인물 정보의 변동 사항을 알리는 시스템 알림이었다.

“7호실 누나, 유지니아 지금 소파에서 자고 있는 거야? 그럼 깨워서 침대로….”

나는 내 옆을 지나쳐 유지니아에게 다가가려고 하는 비비를 무심코 잡아당겼다.

“어? 뭐,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난데없이 나한테 붙잡혀 끌어안긴 비비가 의아하게 물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도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서 다시 한번 소파에 누운 사람을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 유지니아(25)/사망

유지니아가 죽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태에서 맞닥뜨린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나로서도 알 수가 없었다.

***

유지니아의 사망 소식은 일단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비비는 먼저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는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낀 것 같았지만, 조금 떼를 쓰다가 이내 조용히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물론 유지니아는 비비의 양육자였으므로, 그녀에게 변고가 생긴 사실을 언제까지나 그에게 숨길 수는 없었다.

소식을 들은 총괄 집사와 메이드장은 한껏 당황한 얼굴로 달려왔다. 그들은 자리를 비운 닥터 콘라드 대신 유지니아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침음했다.

양육자들 사이에서도 숙연한 기운이 감돌았다. 유지니아와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올리비아도 인상을 찡그린 채 말이 없었다.

“갑자기 왜 죽은 거지?”

“사인을 명확히 알려면 닥터 콘라드가 있어야 할 듯한데….”

“그 돌팔이는 도대체 이런 때 어딜 간 거야?”

갑작스러운 유지니아의 죽음에 다들 동요하는 눈치였다.

어쨌든 표면적으로는 한동안 평화로웠던 저택인 만큼, 아무리 경쟁자라고는 해도 양육자 한 명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 게 그들에게 새로운 긴장감을 불러들인 것 같았다. 유지니아의 사인이 아직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단순한 돌연사일 수도 있지만, 혹시 누군가가 고의로 그녀를 해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유지니아의 전담 메이드들을 불러 관련한 일을 캐물었지만, 그들 역시 유지니아의 명령을 따라 다른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을 뿐, 아무것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유지니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에 빠지던 얼굴을 보니,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양육자들이 각자의 생각에 잠긴 동안 방에는 냉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3호실이 죽은 이유가 뭐든, 굳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이유가 뭐든 간에 약해서 죽은 거고, 그런 자는 저택을 떠나면 그만이야.”

조용하던 양육자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침묵을 깨트린 것은 마리엔이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한기마저 느껴지는 써늘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곧 3호실에 새로운 양육자가 올 테니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고용인들에게 말해서 새로운 사람을 맞이할 준비나 제대로 하게 하면 돼.”

마리엔의 한결같음이 드러나는 냉정한 발언이었다. 마리엔이 떠난 곳에는 방금보다 더 짙은 적막감이 내려앉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1호실 누님도 참 정 없게….”

레이븐이 작게 구시렁거렸지만, 당연히 이미 사라진 마리엔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7호실이 3호실의 방에 갔다가 죽은 걸 제일 먼저 발견했다고 했지?”

“네.”

올리비아의 물음에 나는 짧게 답했다.

“감기라도 걸려서 방에 처박혀 있는 줄 알았더니….”

올리비아도 유지니아의 죽음이 석연치 않은지 얼굴을 굳힌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마음이 안 좋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비한테도 알려 줘야 하는데….”

“이미 메이드장하고 총괄 집사가 갔을 거예요.”

옆에 있던 체스휘가 나를 다독이듯이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체스휘는 양육자들 중에 가장 동요가 적어 보였다. 호시탐탐 체스휘에게 시비 걸 기회만 노리고 있던 레이븐이 그것을 걸고넘어졌다.

“2호실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네. 역시 겉으로는 말랑한 척해도 속은 냉혈한….”

“글쎄요. 양육자가 죽은 걸 보는 게 처음이 아니라 그런가.”

하지만 담담하게 내뱉어진 체스휘의 말에 레이븐의 입이 다물렸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 중에 제일 오랫동안 저택에 있던 게 2호실하고 3호실이었지?”

“네, 뭐. 그래 봤자 1년이 조금 넘을 뿐이지만. 저보다는 유지니아 씨가 오래 있었죠.”

다시금 나온 유지니아의 이름에 양육자들은 또 조용해졌다.

“1호실은 3호실이 죽은 이유가 뭐든 상관없다고 했지만 난 이대로는 찜찜해. 그러니까 상황이 명확해질 때까지 3호실의 방은 한동안 이대로 놔뒀으면 좋겠는데.”

“저도 5호실 양육자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난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저도요.”

과반수의 찬성으로 올리비아의 요구는 받아들여졌다.

양육자들은 일단 유지니아의 미심쩍은 죽음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하고 해산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