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안은 정곡이 찔려 당황한 사실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요.”
지금까지 네 입에서 이름이 나온 메이드는 딱 한 명밖에 없잖니, 애기야….
나는 다이안의 협소한 인간관계를 떠올리며 애잔한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애매한 기분으로 손에 쥔 것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게 그 거대한 꽃들이 있던 악마의 화원의 씨앗이란 말이지?
이제 보니 엠버 그 여자, 이상한 여자 아니야? 찝찝하게 그런 괴물 꽃들이 피어나는 곳의 씨앗을 우리 애한테 주고 있어?
이걸 가지고 있는 다이안도 미묘하긴 마찬가지였다.
지난번에 엠버 얘기가 나왔을 때 분명 날카롭게 반응하지 않았었나? 나중에 알아보니, 예전에 엠버가 다이안을 죽이려고 했었다느니 하는 얘기도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엠버가 준 걸 부적 삼아 가지고 있다니, 다이안의 행동에는 모순이 있었다.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다이안과 엠버의 관계가 단순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게 악마의 화원의 씨앗이면, 체스휘가 가지고 있는 건? 분명 굉장히 흡사하게 생겼는데 단순히 생김새가 닮은 건가, 아니면 체스휘가 갖고 있는 것도 이것과 같은 씨앗인가?
다이안은 이게 발아하지 않는 씨앗이라 위험하지 않다고 했지만, 정말 그럴지도 사실 의심스러웠다.
“다이안 도련님. 이거 잠깐만 제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될까요?”
“뭐?”
“오래는 아니고, 한 일주일 정도만요. 정말 안전한지 확인될 때까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걸로 하면 어떨까요?”
자칫 잘못하면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는 걸 애한테 맡기자니 불안해서 다이안에게 권유하듯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이안이 허락하면 한동안만 내가 가지고 있으면서 이 씨앗에 대해 좀 더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래도 역시 다이안이 오늘 오전 내내 예민하게 반응할 만큼 중요하게 여기던 물건이니, 쉽게 수락하진 않겠지?
나는 어떻게 그를 설득할까 고민하면서, 취준생 시절에 어렵사리 습득한 신뢰감 있어 보이는 미소를 얼굴에 장착했다.
“다이안 도련님한테 소중한 물건인 거 알아요. 그러니까 꼭 흠 하나 안 생기게 저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가, 일주일 후에 다시 돌려드릴게요. 어때요?”
“알았어.”
앗, 그런데 다이안은 생각보다 굉장히 선선히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쉽게 수락해서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정말 제가 가지고 있어도 괜찮아요?”
“린은 내 양육자니까 괜찮아. 안심될 때까지 가지고 있어도 돼.”
나를 향한 다이안의 눈빛에서는 내 어쭙잖은 미소보다 백 배는 더 강렬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순수한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발하는 것 같았다.
누, 눈부셔…! 만약 다이안을 교주로 한 종교가 있다면 난 그곳의 일 등 신도가 되었을 게 분명했다.
나는 감동적인 마음으로 다이안이 내게 준 것을 고이 품에 넣은 다음 그의 방을 나섰다.
혹시나 내 말이 괜한 반발심만 자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이안이 흔쾌히 나를 따라 줘서 다행이었다.
내가 체스휘에게 준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체스휘는 다이안처럼 내 보호가 필요한 연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준 선물이 위험한 씨앗일 수도 있다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겸사겸사 악마의 화원에 있는 씨앗에 대해 아는 게 있는지도 물어보고.
그런 생각에 나는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
지난 주말에 새로 레드포드 저택에 들어온 고용인 제이스는 주변을 살피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꼭 무언가를 탐색하는 듯했고, 발소리를 죽인 움직임 역시 비밀을 감춘 것처럼 지나치게 주도면밀했다.
제이스는 미심쩍게 주위를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규모에 비해 일하는 사람 수가 너무 적은 것 같은데… 원래 이런가?’
한낮임에도 저택은 응달에 갇힌 것처럼 이상하리만치 써늘했고, 한적한 복도에는 지나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지금이 점심시간이라 대부분이 식당에 가 있다고 해도 지나친 적막감이었다.
레드포드 저택에 대해서는 제이스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부터 들은 말이 많았다.
악마들을 사육하는 저택. 저주받은 재배꾼들이 악마의 씨앗을 배양하는 오염된 땅.
그 위명에 걸맞게 저택은 과연 음침했고, 삭막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생각보다 저택에 있는 사람의 수가 적은 것도 분위기를 음산하게 만드는 데 한몫하는 것 같았다.
제이스는 그런 것 따위야 아무래도 상관없었지만, 인력 부족으로 한 사람이 배정받는 하루 업무량이 꽤 많은 편인 건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높은 급료 때문인지, 레드포드의 고용인들은 일개미라도 되는 양 고된 노동에도 아무런 투정 없이 기계처럼 움직였다.
제이스는 미처 업무에 익숙해지지 못한 채 오늘 오전에 정신없이 일하다가, 세탁실에서 나온 물건들을 잘못 배달해 총괄 집사에게 한참이나 잔소리를 들었다.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허드렛일이나 해야 하는지 못마땅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고용인들의 수가 적은 탓에 자리를 조금이라도 오래 비우면 바로 티가 나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그나마 지금이 점심시간이기에 망정이지, 만약 업무 시간이었다면 채 10분도 되지 않아 그를 찾는 사람이 쫓아왔으리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제이스에게 퍽 곤란한 일이었다. 그가 이 저택에 들어온 데에는 사실 은밀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니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제이스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숙소를 빠져나와 옆쪽의 건물로 향했다.
식당에서부터 훑으며 여기까지 왔지만, 어디에서도 찾는 사람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설마 이 깍쟁이가 나하고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피해 다니나?’
성깔 더러운 그녀의 성격대로라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 아무래도 의심이 되었다.
제이스가 계속 찾아다니고 있는 것은 레드포드 저택에 먼저 위장 투입된 동료였다. 그와 같은 단체에 속한 동지이기도 했다.
제이스는 그녀를 돕기 위해 이번에 레드포드 저택에 한발 늦게 투입된 지원조였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좀처럼 그녀와 접촉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차라리 다른 고용인들에게 니아의 위치를 물어볼까 싶었지만, 혹시라도 괜한 의심을 살까 봐 저어되어 아직은 혼자서 그녀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겸사겸사 저택의 구조도 파악하고 있어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니아가 이 저택에서 사용하는 이름이 세라라고 했던가?
언제 생각해도 참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하기야, 위장용 이름으로 웬 시골 농부에나 어울릴 법한 ‘톰’이라는 이름을 받은 자신보다는 나았지만….
“흐으… 킁… 흡….”
그러다 문득 제이스는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자그마한 소음을 포착해 냈다. 조용한 복도를 걷던 그의 발이 멈추었다.
‘뭐야? 이 귀신이 곡하는 것 같은 소리는….’
그러고 보니 저택에 들어올 때 받은 안내 책자에서 별관에 대한 주의 사항을 봤던 기억이 났다. 보라색 방이 어쩌구, 검은 베일이 어쩌구 했던 것 같은데….
별관에서 웬 어린애와 여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을 옆방 고용인에게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들려오고 있는 신음은 분명 남자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굵직했다.
제이스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움직였다.
이상한 신음은 문이 굳게 닫힌 어느 방 안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무턱대고 문을 벌컥 열었다가, 그는 바로 아차 했다.
‘앗, 씨. 혹시 모로스 아니야?’
레드포드 저택에서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온다는 모로스를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그만큼 괴상하게 들려서 갑자기 수상쩍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문은 열린 상태였고, 제이스가 다시 뒤로 물러나 방문을 원상 복귀시키는 것보다 그의 눈이 방 안에 있는 사람을 발견한 게 더 먼저였다.
“헉! 뭐, 뭐야! 설마… 닥터 콘라드?!”
제이스는 두 눈을 부릅뜬 채 의자에 묶여 있는 남자에게 황급히 다가갔다.
의자에 묶인 채 축 늘어져 있는 남자는 갈색 머리를 산발하고 있었다. 하지만 레드포드 저택에 들어오기 전에 그의 얼굴을 몇 번이나 자료로 봤던 제이스는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닥터 콘라드 맞으시죠?! 아니, 왜 이런 꼴로 이런 곳에 있는 겁니까? 네?”
니아보다도 먼저 레드포드 저택의 주치의로 들어와 확실히 자리를 잡고 있던 닥터 콘라드가 이런 몰골로 발견된 것은 충격적이었다. 이번 임무에서도 그가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들었는데….
“흑… 흐읍, 읏….”
“잠깐만요, 제가 금방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그를 이런 꼴로 만들었단 말인가?!
제이스는 탈진한 듯이 작은 신음만 토해 내고 있는 콘라드를 보고 놀라 얼른 그의 입을 막은 천부터 빼내 주었다.
침에 젖은 천이 지나치게 축축해서 찝찝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제이스는 기분 나쁜 축축함이 밴 손을 콘라드의 옷에 문지른 뒤, 이번에는 그의 몸을 묶은 밧줄을 풀기 시작했다.
“닥터 콘라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 좀 해 보세요.”
“흐으…. 이제 그만 좀… 내가… 그런 게 아니….”
“닥터 콘라드, 설마 악마 재배꾼들에게 우리 임무를 들킨 겁니까?”
하지만 콘라드는 제이스의 어깨 너머를 멍한 눈으로 보며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제, 제발…. 손 좀….”
“예? 손이요? 아, 금방 풀어 드릴 테니 잠깐만 기다리….”
“아, 잠깐 자리를 비웠을 뿐인데 불청객이 왔네요.”
그때, 등 뒤에서 콘라드가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어떤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터라, 제이스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놀랐다.
“닥터 콘라드를 도와주러 온 건가 봐요?”
뒤이어 귀를 파고든 나지막한 말에 제이스는 경악해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리를 세게 강타했다.
“어쩔 수 없네. 당신도 잠깐 기절해 있어요.”
제이스는 뒤에서 나타난 사람의 얼굴도 확인하지 못하고 그 길로 바로 의식을 잃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