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66)화 (166/300)

“비비 너, 왜 린한테 눈을 그런 식으로 떠?”

“내가 뭘?”

비비의 천연덕스러운 반문에 다이안은 더욱 성이 난 것 같았다.

“왜 귀여운 척하냐고!”

“귀여운 척하다니? 난 원래 귀여운데?”

“웃기지 마! 그런 짓은 네 양육자한테나 가서 해! 내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게 무슨 되먹지 못한 짓이야!”

예전에도 다이안은 내가 다른 아이들에게 단순한 관심만 보여도 그들을 귀엽게 견제하곤 했었다. 그런데 더군다나 비비가 이렇게 대놓고 내게 다가와 친한 척을 하는 것에 다이안은 더욱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내가 언제 네 양육자를 빼앗는다고 했어? 그냥 오늘 하루만 빌린다는 건데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내 양육자를 네가 뭔데 빌려? 아니, 그것보다 린은 네가 마음대로 빌린다 만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거든? 린이 물건도 아니고!”

“아, 그럼 어쩌라고? 네가 같이 나랑 같이 자 줄 거야?”

“그래, 차라리 내가 너랑 같이… 뭐, 뭐?”

하지만 상황은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비비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다이안이 당황해서 목소리를 더듬었다.

“왜, 왜 내가 너랑….”

“너라도 같이 자 주면 양육자 누나 없어도 돼. 그러니까 네가 골라.”

비비는 꼭 다이안에게 특별히 선택권을 주겠다는 듯이 선심 쓰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이안은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히다 못해 이제 황당하기까지 한 것 같았으나, 결국은….

“푸읍…. 좋은 꿈 꿔요, 다이안.”

“린도 잘 자….”

“비비도 잘 자고.”

“안녕, 양육자 누나. 내일 봐!”

다이안이 비비와 함께 나란히 침대에 누워 시들시들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했다. 영혼 없는 눈빛을 한 다이안과 달리 비비는 밝게 웃으며 내게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결국 다이안은 비비를 그의 방에 들이고 말았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왜 얘랑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하는 듯이 현타 섞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삼키며 문을 닫고 다이안의 방을 나섰다.

이것 참 예상치 못한 해피엔딩이로세. 혹시 이게 다 비비의 큰 그림이었던 건 아닌지 의혹마저 들었다.

나한테 친한 척하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계속 다이안의 눈치를 살피던 비비를 보면, 아무래도 오늘 다이안과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핑계를 댄 게 맞는 것 같았다.

다이안도 정말 비비와 상종하기 싫었다면 그의 말을 그냥 무시해 버려도 되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사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아도 다이안이 그동안 비비를 은근히 신경 써 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나는 오늘 밤 두 소년이 조금이라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어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쪽은 오늘도 감감무소식이구먼.’

그날 밤, 나는 또 라파엘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한 번도 내게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카드리고 저택에서 내가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분명 다른 사람은 몰라도 라파엘만큼은 손가락 하나 건들지 않았는데….

하지만 나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상태는 원래부터 썩 좋지 않아 보였으니, 어쩌면 지금도 그래서 이렇게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인지도 몰랐다.

‘역시 라파엘에게 다른 소식을 들을 수는 없겠네.’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미카엘 카드리고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도 어려워 보였다.

하기야, 마지막에 봤을 때도 라파엘은 미카엘 카드리고의 이름이 나오자 예민하게 반응했었다. 그 이후 나사 하나가 아니라 열 개는 빠진 듯이 가뜩이나 이상하던 상태가 더 심각해졌었고 말이다.

라파엘뿐만이 아니라, 대주교 쪽에서 불이 나게 쏟아지던 연락도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뚝 끊겼다. 그나마 이쪽은 자꾸 시끄럽게 구는 게 성가시던 참이라 이렇게 잠잠한 게 낫긴 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져서 오히려 불안함을 느낄 만도 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만 너무 한꺼번에 복합적인 일들이 연달아 벌어져서 피곤하기는 했다.

지난 주말에 44세계에서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기껏 돌아온 레드포드에서는 또 콘라드를 앞세운 이상한 단체까지 다이안을 노리고 행동 개시에 나선 상태였다.

나는 역시 다이안에게 격투기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는 연약한 소년을 노리는 몹쓸 것들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물론 우리 다이안이 워낙 개복치라, 격렬한 운동을 시키는 건 걱정스럽긴 한데….

그래도 인간이든 모로스든, 위험한 것들이 접근할 때 조금이라도 대처할 수 있게 기본적인 호신술 정도는 익혀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실은 요즘 레드포드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한 명씩 사라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거든요.”

그러다 나는 저녁에 들은 사라로사의 말을 떠올리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벌써 밤이 깊었는데 잠은 안 오고, 자꾸 쓸데없는 생각만 났다.

멜로디아처럼 저택의 사람들이 서서히 사라지는 기묘한 일까지 벌어지고 있는 것도 나를 신경 쓰이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였다.

“아, 그리고 어떤 고용인은 밤에 화장실에 가려고 복도로 나갔다가 흰옷을 입고 혼자 돌아다니는 여자를 언뜻 봤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용인들 사이에서는 혹시 사람들을 잡아먹는 악마가 그 흰옷을 입은 여자가 아니냐고….”

한 5초 정도 침대에 앉아 있다가 다시 누워서 다른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잠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침대 밑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결국 화병 속에서 성수에 젖은 꽃을 꺼내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곧바로 싸늘한 공기가 온몸에 훅 끼쳐왔다. 짧은 시간 동안 금세 찬 기운을 머금은 잠옷의 치맛자락이 걸음마다 스산하게 발목을 휘감았다.

나는 도대체 뭘 확인하고 싶은 걸까?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지만, 사라로사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일전에 꿈에서 본 것처럼 희미한 기억을 좇아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등불이라도 가지고 나올까 싶었지만, 다른 사람의 눈에 띄고 싶지는 않아서 금방 생각을 접었다.

스르륵.

호수 위에 번지는 안개처럼 어둠을 가르며 소리 없이 움직이는 무언가를 내가 발견한 건 바로 그때였다.

인공적인 빛이라고는 한 점도 들지 않은 복도는 온통 무채색 세상이었다. 시야에 비친 모든 사물은 오직 흑백의 구분만이 가능했다.

그래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붉은 머리칼만큼은 이 어두운 밤중에도 여전히 선명히 타오르고 있을 것처럼 느껴졌다. 실제로 지금 내가 본 것은 모퉁이 너머로 사라지는 옷자락뿐이라, 머리카락 같은 건 한 올도 직접 보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지금 내 시야에 잔상을 남기며 사라진 게 누구인지, 내가 이미 알고 있다는 것도 사실은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꼭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그 뒤를 따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기이하게도 내가 점점 그날의 꿈속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을 쫓아 이 길을 따라가면, 왠지 그날 내가 보았던 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안 돼요.”

만약 그때, 전조도 없이 내 귀를 스치듯이 어루만지며 다가온 조용한 속삭임이 없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호기심에 나쁜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된다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콘라드가 있는 별채에서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의 손에 시야가 가려졌다.

이어진 목소리는 늦은 가을밤 고요히 잠든 숲 사이로 부는 바람처럼 낮고 적요했다. 온화하면서도 건조했고, 다정하면서도 묘하게 냉연하게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살짝 낮은 체온을 가진 큰 손이 이번에는 내 손목과 손을 전부 감쌌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내가 이 이상 앞으로 걸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는 듯이 단호했다.

나는 나를 붙잡은 사람의 의지인지, 내 의지인지 알 수 없는 형체 없는 힘에 이끌려 복도에 멈춰 섰다. 어느새 몸은 옆으로 돌려져 있었다.

옥을 깎아 만든 듯한 매끄러운 남자의 얼굴에는 구름 뒤에 숨은 창밖의 달빛처럼 보일 듯 말 듯한 은은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밤의 저택은 위험해. 게다가 저쪽은 청소 중이라 더럽기까지 하고.”

체스휘가 내게 그 미소만큼이나 나지막한 음성으로 권유하듯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더 관심 갖지 마요.”

나는 체스휘의 말을 듣고, 조금 전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사람을 뒤쫓으려던 마음을 버렸다.

그냥,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체스휘의 말이나 행동에는 어떤 강요나 강제도 없었지만, 그저 당연히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이유 없이 그러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러니까 마음대로 체스휘의 침실을 찾아갔던 그 린 도체스터에 가까웠다. 스스로도 그런 자각이 있었다.

“알겠어요.”

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체스휘가 착하다는 듯이 내 귀밑머리를 가볍게 쓸어넘겼다.

“잠이 안 와서 나왔어요?”

“네.”

눈앞에서 비스듬히 기울여지는 체스휘의 고개를 따라, 자연스럽게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곧게 뻗은 그의 눈썹을 가리며 흘러내렸다. 체스휘가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럼 나랑 조금 걸을까요? 한밤중의 산책도 나름대로 운치 있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체스휘가 내 손을 잡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뒤로 돌려 원래 목적지였던 곳을 힐끗 쳐다봤다. 그러다가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들어 보니, 체스휘가 미소를 띤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시선이 마주친 순간, 복도의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사람을 향한 미련과 망설임은 깨끗이 자취를 감추었다.

내 손을 잡고 걷는 체스휘는 그리 오래지 않아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손이 내 잠옷 주머니에 꽂혀 있던 반쯤 시든 꽃을 빼냈다. 그런 뒤 체스휘는 그가 가지고 있던 성수 꽃을 그 자리에 바꿔 넣어 주었다. 금방 방에서 나온 듯, 체스휘가 가지고 있던 꽃은 아직도 싱그러웠다. 그는 내가 걸치고 온 가운도 잘 여며 주었다.

그런 뒤 우리는 달빛이 내린 조용한 복도를 다시 거닐었다.

“역시 밤의 저택은 조용하네요.”

잠시 후 체스휘의 입에서 소리가 거의 없는 여트막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꼭 이 저택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아요.”

그가 장난스럽게 속삭였을 때, 나도 그 생각에 동의했다.

전에는 어둡고 써늘한 저택이 조금 으스스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상하게 편안하기만 했다. 옆에 체스휘가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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