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 또 이러네. 체스휘와 함께 있을 때, 가끔 이렇게 한 번씩 쎄한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변명하듯이 말했다.
“체스휘 씨 말처럼 제가 마음이 약해서 그래요. 닥터 콘라드가 저렇게 연약하게 구는 모습은 처음 보기도 하고….”
“그러게요. 닥터 콘라드 같은 사람이 갑자기 어울리지도 않게 이렇게 질질 짜고 있으니까 더 수상해 보이네요.”
온화한 말투치고는 퍽 신랄한 소리였다.
체스휘는 걸어오면서 바닥에 떨어진 천을 발로 툭 밀어 치웠다. 콘라드의 얼굴을 닦았던 눈가리개와 그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이 아까보다 더욱 얼룩덜룩하게 더러워진 상태로 바닥에 뒤엉켜 떨어져 있었다.
“설마 린 씨 마음이 여린 걸 알고 일부러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고.”
의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으로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눌러 거기에 앉히는 체스휘의 일련의 움직임이 참으로 자연스러웠다. 나는 살짝 불편하게 체스휘가 가져온 의자에 앉아, 닥터 콘라드와 마주 보았다.
“글쎄요. 닥터 콘라드가 그렇게 연기를 잘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요.”
오히려 그런 방법으로 은근슬쩍 사람을 방심시킨 뒤 낚아대는 사람은 콘라드가 아니라 체스휘였다.
“어쨌든, 닥터 콘라드도 참 매정한 사람이네요.”
체스휘가 한숨을 낮게 내쉬면서 내 뒤에 서서 내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얹었다. 그가 상반신을 기대듯이 앞으로 기울인 탓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내 앞에서는 한결같이 무서운 협박만 해대서 얼마나 상처받았는데….”
정말 그 말처럼 듣는 이의 연민을 퍽 자극하는 음성이었다. 하지만 나한테 ‘처리할까요?’ 내지는 그 유사한 내용의 말만 몇 번을 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이렇게 약한 척해 봤자….
“알고 보면 나도 마음이 굉장히 약한 사람인데, 나한테는 동정할 기회도 안 주고. 이제 보니 닥터 콘라드가 사람을 꽤 가리네요, 린 씨.”
약한 척해 봤자… 속지는 않았지만, 제법 귀엽긴 했다.
여전히 내가 앉은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고개를 앞으로 기울여서 시선을 맞춰 오는 체스휘를 보고 무심코 생각했다.
크흠. 하지만 곧 나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괜히 멋쩍어져서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는 척했다.
이런 빤히 보이는 수작질에 속지는 않았지만, 닥터 콘라드가 일부러 내 앞에서 불쌍한 척 연기하는 것 같다는 소리를 참 노골적으로 하고 있는 체스휘는 오히려 귀여운 맛이 있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아무래도 지금 체스휘는 질투를 하는 것 같았다. 표정이나 말투는 천연덕스러웠지만, 눈빛 속에서 느껴지는 날 선 감정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질투할 상대가 없어서 콘라드를 질투하나?
물론 방금 콘라드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살짝 마음이 동하기도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의외의 상대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목격한 데에서 오는 신선함에 불과했다.
아무튼, 체스휘가 아닌 척하면서 지금 질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자, 왠지 눈에 보이는 그의 얼굴이 살짝 토라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전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남자…. 역시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고 성가신 스타일인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모습도 제법 귀여워 보이니 어쩌면 이미 내 눈에는 콩깍지가 단단히 씐 건지도 몰랐다.
“알겠어요. 닥터 콘라드한테 손을 빌려주는 건 관둘게요.”
지금 체스휘가 하는 걸 보니 내가 콘라드한테 손가락 하나 대는 것조차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이 상태로 콘라드와 대화를 할 수도 없으니….
나는 앞으로 다리를 뻗어, 발로 콘라드의 발목 부근을 툭 치듯이 건드렸다. 예상대로 꼭 손이 닿지 않아도 괜찮았던 건지, 시름시름 앓던 콘라드가 어깨를 움찔 떨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7, 7호실 양육자님….”
꼭 서서히 진통 효과가 돌기 시작한 환자처럼 콘라드의 구겨진 얼굴이 다림질하듯이 펴지기 시작했다.
“저, 저를 버리지 않으실 줄 알았습니다….”
그는 감동한 듯이 부담스럽게 아롱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런 콘라드가 거슬리는 듯, 체스휘에게서 또 살짝 까끌까끌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닥터 콘라드, 그렇다고 내가 지금 그 쪽한테 유감스러운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아요.”
그것과 별개로, 나도 콘라드에게 다소 기분이 상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얼굴을 매정한 눈으로 마주했다. 잠깐 예기치 못한 상황으로 당황해서 콘라드를 추궁하지 못했을 뿐이지, 아까 내가 본 것을 잊은 건 아니었다.
“다이안한테 부적격 판정은 왜 내렸어요?”
우리 귀염둥이 고양이의 이름 옆에 삭막하게 쓰여 있던 글자를 떠올리자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전투력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젖어 있는 콘라드의 지저분한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두 눈이 정처 없이 흔들리는 걸 보니, 아까의 일을 잊고 있다가 갑자기 취조당해 당황한 모양이었다.
이내 콘라드가 입이 마르는 듯이, 침을 한번 삼킨 뒤 입술을 뗐다.
“…그건 레드포드의 주치의인 제게 내려진 고유 권한으로, 거기에 간섭하는 건 명백한 월권….”
“내가 대답하라고 한 건 그게 아닐 텐데.”
이어진 콘라드의 말은 동문서답에, 심지어 듣기 좋은 소리도 아니었다. 콘라드와 닿아 있던 발을 가차 없이 치우자, 그가 다시 불판 위에 올라간 낙지처럼 몸부림쳤다.
“아,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저, 전부 대답하겠습니다!”
“제대로 해요.”
콘라드는 억울함과 원망이 섞인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 뜨끔한 듯이 얼른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후 콘라드가 머뭇거리면서 더듬더듬 내 물음에 대한 답을 이었다.
“주치의의 소견으로 내리는 부적격 판정은…. 기본적으로 아이들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심각하게 취약한 경우…. 또 검은 공기에 적응하지 못하는 체질을 가지고 있어, 만약 최종적으로 선발된다 하더라도 이후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 여겨지는 경우에 내려집니다.”
“그래서 주치의의 소견으로, 다이안은 그중에 어떤 경우?”
“제 소견으로… 7호는 검은 공기에 거부 반응을 드러내는 유전 인자를 가지고 있어….”
“다른 보류 판정을 받은 아이들은?”
“한 명은 7호와 같은 경우이고, 다른 한 명은 정서적인 결함이 원인입니다.”
“왜 그 아이들은 보류고 다이안은 벌써부터 최종 판정을 내린 건데요?”
“보류 판정을 받은 아이들은, 차차 나아질 가능성이 있어서….”
“그럼 우리 애는 가망이 없다고?”
내 물음에 콘라드가 침묵했다.
긍정의 의미를 담은 침묵이라기보다는, 대답을 고민하느라 난처함의 의미로 내보이는 침묵인 것 같았다. 그는 조금 전보다 한결 더 곤혹스러워 보였다.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는지, 콘라드가 초조한 듯이 혀로 입술을 축이는 게 보였다.
“닥터 콘라드, 그 이유 아니잖아요.”
나는 그런 그에게 좀 더 직설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까 본 편지에 표본 확보라고 써 있던데. 그건 무슨 뜻이에요?”
“…….”
“저택의 아이들을 왜 표본이라고 불러요?”
“…….”
“다이안한테 부적격 판정을 내려서 탈락시키고 신원을 확보해서 뭘 어쩌려고요?”
콘라드는 입에 접착제라도 바른 것처럼 순순히 입을 열지 않았다.
“닥터 콘라드, 대답 안 해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그 편지의 내용은 그런 게 아니었는데요.”
내가 다시 한번 콘라드에게서 발을 떼려고 하자, 그가 튀어 오르듯이 서둘러 대답했다.
“거기에 쓰여 있던 건 저택의 아이들이나 7호실 얘기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속한 의료 단체에서 진행 중인 연구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뭔가를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절차상 외부에 발설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설명하기 어렵지만….”
하지만 이번에도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주저리주저리 변명을 늘어놓는 콘라드를 못마땅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양육자님에 대한 조사를 부탁한 건, 뭐든 확실한 게 좋으니까…. 저야 당연히 양육자님을 믿지만 말입니다….”
누가 봐도 수상한 짓을 해 놓고, 저런 변명을 믿으라는 건가?
물론 그에게서 쉽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예상대로 흘러가는 상황이 썩 달갑지 않았다.
“닥터 콘라드가 그렇다니 할 수 없네요.”
나는 애석함을 느끼며 콘라드에게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오해가 풀리신 겁니까?”
기껏 좋게 말할 기회를 줘도 발로 걷어차니, 나도 어쩔 수 없었다.
“체스휘 씨, 닥터 콘라드는 여기에 두고 우리는 그만 나가요.”
내 말에 콘라드가 멍청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이, 이대로 저만 두고 간다고요?”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콘라드에게 친절하게 말해 주었다.
“어차피 저택의 문은 주말에만 열리잖아요. 닥터 콘라드가 지난 주말에 외출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치면, 다음 주말까지 앞으로 일주일 정도 여유가 있네요.”
“그게 무슨….”
“닥터 콘라드가 제대로 대답할 마음이 생길 때까지 앞으로 일주일쯤은 기다려 주겠다는 소리예요. 기쁘죠? 반갑죠? 고맙죠?”
선심 쓰듯이 생색을 내며 꺼낸 내 말에 당연히 콘라드는 기겁했다.
“아, 아니, 지금 저더러 일주일 동안 여기에 갇혀 있으라는 소리입니까? 게다가 7호실 양육자님이 이대로 가 버리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나더러 어쩌라고.”
나는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다소 매정하게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주일이나 갇혀 있기 싫으면 더 빨리 자수하고 광명 찾든가.”
물론 콘라드의 상태를 봤을 때, 그가 일주일은 고사하고 하루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