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61)화 (161/300)

“체스휘 씨?”

뭐야, 아직 약속 시간 안 됐는데? 남은 한 시간 중에서 아직 반 정도밖에 안 지났을 텐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더라니, 공교로운 시점에 갑자기 체스휘가 문을 열고 나타나서 당황했다.

“왜 벌써 왔어요? 아직 약속 시간 아니잖아요?”

현대인에게 시간 엄수는 필수!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시나요? 누구 마음대로 약속 장소에 일찍 나타나는 거야!

물론 체스휘에게 말하지 않고 별관에 일찍 온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게 양심이 찔릴 만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막상 이런 식으로 체스휘와 맞닥뜨리자 괜히 속이 뜨끔거렸다.

“그러는 린 씨야말로… 일찍 왔네요.”

내가 별관에 먼저 도착해 있을 줄 몰랐던 걸까, 아니면 문을 열자마자 보인 광경이 뜻밖이었던 걸까? 나만큼이나 놀란 듯이 휘둥그레졌던 체스휘의 눈이 서서히 원래 크기로 줄어들었다.

“흐으, 하아….”

그 순간, 거슬리는 거친 숨소리가 내 목덜미에 뜨끈한 온기를 흩뿌렸다.

어쩌다 보니 나와 자석처럼 달라붙어 있던 콘라드의 존재를 잠깐 잊고 있다가 다시 떠올린 것도 그 때문이다.

콘라드는 자신을 이곳에 가둔 체스휘가 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조금 전부터 계속 손으로 자신을 만져 달라는 헛소리를 하더니, 지금 그는 나와 접촉한 피부 면적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넓히느라 바빴다.

물론 콘라드는 의자에 묶인 상태라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내 쪽으로 넘어지는 의자를 붙잡느라 본의 아니게 몸을 가깝게 밀착한 나한테 1mm라도 더 달라붙으려고 애쓰는 꼴이 퍽 필사적으로 보였다.

문가에 선 체스휘의 시선이 그런 콘라드에게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콘라드의 떡 진 머리카락이 계속 내 목덜미를 간질이고 있어서 그런지, 한순간 이상하게 등줄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나와 콘라드의 모습을 보던 체스휘의 얼굴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린 씨….”

나는 그가 아련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자마자 또 한 번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날 두고 벌써 한눈을 파는 거예요?”

아니나 다를까, 체스휘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소리가 내뱉어졌다.

“아니, 지금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하고 몰래 밀회할 수가 있어요?”

“밀회요…? 그거 동의할 수 없는 단어 선택인데….”

“더군다나 내 앞에서 이렇게 부둥켜안기까지 하고.”

옹달샘을 빼앗긴 토끼처럼 나를 아련하게 쳐다보는 체스휘를 보자, 진짜 내가 그를 버리고 외간 남자에게 눈길이라도 돌렸다가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나한테 매달려서 이상야릇한 숨소리를 흘리는 콘라드가 거기에 한몫했다.

“그냥 넘어지려고 해서 잡아 주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닥터 콘라드, 좀 떨어져 봐요!”

“하아…. 이제 좀 살 것 같아….”

콘라드는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듯이 내 말을 흘려들었다. 심지어 그는 내가 자신의 쿠션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내 옷에 얼굴까지 비비면서 체중을 더 실어 왔다.

그러는 바람에 당연히 콘라드와 혼연일체이던 의자까지 같이 딸려 와 나한테 무게를 더했다. 나는 완전히 넘어지기 직전까지 기울어진 의자를 손으로 붙잡았다. 콘라드에게 정신 차리고 떨어지라고 한마디 더 하려다가, 문득 내가 바보처럼 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지. 콘라드를 붙잡고 있는 건 나니까, 그냥 내가 손을 놓으면 되잖아?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나는 콘라드를 뒤로 밀어 원래 있던 자리로 복귀시킨 다음, 그를 붙들고 있던 손을 떼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콘라드의 저항이 거셌다.

“아, 안 돼! 가지 마…! 손 떼지 마!”

자신이 무슨 멜로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아는지, 콘라드가 제법 애처롭게 나를 향해 부르짖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의욕 없는 눈을 하고 있는 콘라드는 무시해도, 제정신이 아닌 듯이 눈이 벌게진 콘라드는 함부로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제 딴에는 정말 절박하긴 했는지, 이 미친 남자가 갑자기 내 옷 칼라를 이로 물고 늘어졌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미쳤어요? 이거 안 놔?”

“므 느! 은 느!(못 놔! 안 놔!)”

“그러다 강냉이 다 털려도 책임 안 져요?”

“느그 쁘끌 즐 을그!(누가 뺏길 줄 알고!)”

이건 뭐, 입에 물고 있던 뼈다귀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개도 아니고…. 나는 이상한 집착과 광기를 폭발시키는 콘라드를 보고 질겁했다.

아니, 당신 원래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해서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드네?

그렇게 내가 당혹감에 잠깐 멈춰 있을 때, 체스휘가 서 있던 문가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내 등 뒤로 바짝 다가온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어깨 너머에서 손이 뻗어져 나왔다.

“린 씨가 달라붙지 말라고 하잖아요, 닥터 콘라드.”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그때서야 체스휘의 존재를 알아차렸는지, 콘라드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이런 식으로 질척거리는 남자는 매력 없어요. 그리고….”

듬직한 손이 콘라드의 머리를 인형 뽑기 하듯이 느슨히 붙잡았다. 다만 인형 뽑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체스휘의 손은 움켜잡은 걸 가까이 끌어오는 게 아니라 가차 없이 뒤로 떠밀어 버렸다는 점이다.

“내 눈에도 거슬리네요, 당신.”

정말 강냉이가 털리고 싶지는 않았는지, 콘라드는 체스휘의 손에 밀려나는 순간 턱을 벌려 이빨로 물고 있던 내 옷깃을 놓았다.

콘라드와 함께 뒤로 기울어진 의자가 오뚝이처럼 기우뚱거렸다.

콘라드는 내게서 완전히 떨어지는 순간 솜사탕을 물에 씻은 너구리처럼 가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콘라드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읏…! 안 돼, 시끄러워….”

다행히 휘청이던 의자는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잡았으나, 콘라드는 또다시 환청이 들리기 시작한 것처럼 고통스럽게 신음하면서 몸을 비틀었다.

“가, 가지 마세요…. 7호실 양육자님, 제발, 저 좀 어떻게….”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는 콘라드를 보고 멈칫했다.

어라? 콘라드가 이렇게 유약한 모습으로 나한테 애원하는 꼴을 보자 생각보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의외로 지금까지 나도 모르던 이상한 취향에 살짝 눈을 뜰 것 같기도 하고….

비록 내가 한 짓은 아니지만, 이렇게 결박당한 채 엉망이 된 몰골로 우는 남자의 모습은 생각보다 구미를 당기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렇게 보니 그동안 콘라드를 파던 한줌파 플레이어들의 심리를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 나도 모르게 오묘한 시선으로 내 앞에 있는 콘라드를 뜯어보고 있을 때, 내 뒤에 서 있던 체스휘가 손으로 내 눈을 가렸다.

“린 씨, 저런 지저분한 걸 보면 정신 건강에 안 좋아요.”

꼭 부모가 유해 매체를 보는 아이를 엄격하게 관리하는 듯한 어투였다.

나는 괜히 뜨끔해서 괜히 크흠, 헛기침을 한 뒤 방금의 이상한 상황에 대해 체스휘에게 변명… 아니, 설명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닥터 콘라드가 계속 이상한 환청이 들린다나 봐요. 그런데 저한테 닿아 있으면 괜찮아진다고 조금 전부터 이러네요.”

“그런 수작질을 믿다니. 역시 순진하네요, 린 씨는.”

내 눈을 가린 체스휘의 손을 잡아 내리며 말하자, 귓가에 나지막한 옅은 웃음이 섞인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어딘가 메말라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냉소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마주한 체스휘의 얼굴은 여전히 말갛고 다정하기만 했다.

나는 그런 체스휘를 살짝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런데 체스휘 씨. 왜 이렇게 일찍 왔어요? 약속한 시간은 아직이지 않나?”

“당연히 린 씨가 기다릴까 봐 일찍 온 거죠.”

“그래도 이건 너무 일찍인 것 같은데….”

“마침 운 좋게 시간이 비어서요. 저야말로 설마 린 씨가 이렇게 빨리 와 있을 줄은 몰랐네요.”

“아하…. 저도 마침 운 좋게 시간이 비었는데, 혹시 체스휘 씨가 일찍 와서 기다릴까 봐 먼저 와 있었어요.”

“제가 기다릴까 봐 이렇게 일찍 온 거라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우리 둘 다 똑같은 생각을 했네요.”

체스휘의 입술이 미소를 짓는 건지, 아니면 비틀린 건지, 구분하기 어려운 모양새로 살짝 움직였다.

나는 그런 체스휘를 천연덕스럽게 마주했다. 그러나 내심은 아쉬웠다. 체스휘가 오기 전에 콘라드와 따로 대화를 나누어 보려던 계획이 허망하게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콘라드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닥터 콘라드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저 상태로는 말이 안 통할 것 같은데 손가락 하나만 살짝 대 주는 게 어떨까요?”

내 말을 들은 체스휘가 말간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는 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반문했다.

“글쎄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말이 안 통하면 그냥 말을 안 하면 되지 않나요?”

꼭 아까 아침에 들은 ‘처리할까요?’의 하위 호환 버전인 것 같은 말이었다.

내가 입을 열어 뭐라고 하기 전에, 체스휘가 이번에는 확실히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리며 덧붙였다.

“하지만 린 씨가 닥터 콘라드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다고 했으니까 그런 말은 이제 안 할게요.”

“아, 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선선히 수긍하는 모습에 나도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내뱉으려던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어정쩡하게 호응했다.

“그런데 린 씨는 이상하게 닥터 콘라드에게 유하네요.”

그런데 체스휘가 걸음을 옮겨 구석에 있던 다른 의자를 끌어오면서 혼잣말처럼 읊조린 말이 내 머릿속에 까닭 모를 은은한 빨간 불을 켜지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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