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주 순순한 움직임이었고, 체스휘의 얼굴도 딱 그만큼 태연해 보였다. 그래서 혹시 조금 전에 그가 콘라드를 두고 처리하니 뭐니 했던 건 나의 뇌내망상이나 환청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잠시 후, 별관에서 나오자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환기되지 않은 방 안의 공기가 답답해서 머리가 아팠던 것 같다.
“그럼 이따 약속한 시간에 봐요.”
체스휘와 나는 3층에서 헤어졌다. 내가 다이안에게 가 봐야 하는 것처럼 체스휘도 맡고 있는 미뉴엘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린 씨,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인데 위험할지도 모르니까 별관에 혼자 갈 생각은 하지 마요.”
그런데 내가 막 몸을 돌렸을 때, 체스휘가 난간을 사이에 두고 팔을 뻗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방금 봤죠? 닥터 콘라드가 얼마나 난폭하게 구는지.”
꼭 언제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는 어린애를 눈앞에 둔 것처럼 염려스럽게 당부하는 소리에 나는 떨떠름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 혼자서 가든 둘이서 가든, 꽁꽁 묶여 있는 콘라드가 딱히 위험할 것 같지는 않은데…. 오히려 그 방에 있던 세 사람 중에 가장 위험한 건 체스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려고 했지만, 일단은 그냥 체스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겠어요. 어차피 오전 중에는 따로 찾아갈 시간도 없고….”
“우와…! 손 잡았대요! 7호실 누나랑 2호실 형이랑 손 잡았대요!”
그런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웬 주머니 같은 걸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쪽을 삿대질 중인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색 솜사탕 같은 머리칼을 가진 3호실의 비비였다.
“손 잡았대요~ 손 잡았대요~ 가서 소문내야지!”
그는 계단을 통통통 뛰어 내려오면서 일부러 놀리듯이 경망스러운 곡조의 노래를 불러댔다.
“비비, 너 그렇게 계단에서 뛰다가 넘어지면 다쳐! 그리고 지금 손 안 잡았거든?”
아까는 정말 체스휘와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비비의 말을 듣고 뜨끔했지만, 지금은 아니었기 때문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잘 봐, 이건 손이 아니라 손목이야!”
“손이든 손목이든 그게 그거지! 양육자 누나랑 형이 그런 사이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가서 다 얘기할 거야! 애들한테도 다 소문낼 거야!”
하지만 비비는 괜히 열두 살짜리 꼬맹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내 말에 콧방귀를 뀌면서 계속 우겨댔다.
사실 아까 마주쳤던 올리비아와 고용인들의 입을 통해 이미 어느 정도 소문이 퍼졌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비비의 말을 듣고 나서 뒤늦게 아차 했다.
아까는 어쩌다 보니 올리비아에게 휩쓸려서 체스휘와의 관계를 공인해 버린 셈이 되었으나, 이것이 바로 사내 연애의 치명적인 단점이란 것을 새삼스럽게 자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야 특별히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애들은 달랐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 마음에 걸리는 건 다이안이었다.
우리 고양이가 얼마나 예민하고 섬세한 성격이던가?
가뜩이나 내가 잠깐만 자리를 비워도 혹여나 버려질까 봐 무서워하는 다이안이었다. 그런데 체스휘와 나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면 더욱이 불안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하나뿐인 보호자에게 자신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는 아이들의 사례는 의외로 많았으니 말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로서 지금까지 이런 중차대한 부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니!
물론 이 게임은 육성 장르와 연애 시뮬레이션 장르가 섞여 있었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연애 자체가 문제의 요소는 아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게임 내에서 육성 대상이 플레이어의 연애 사실을 알게 되는 일은 없었다. 그런 만큼, 혹시 이런 부분이 육성 대상의 성장에 결정적인 방해 요소로 작용하는 건 아닌지 퍼뜩 경계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고 나를 지나쳐 계단을 내려가려고 하는 비비를 붙잡았다. 그러고 나서 그를 향해 최대한 상냥하고 다정한 표정과 말씨를 꾸며 냈다.
“우리 비비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양육자 형이랑 누나는 좋은 동료 사이인데? 한마디로 친구 같은 사이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거든.”
거참, 콘라드의 일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인데 첩첩산중이네.
물론 내가 이렇게 체스휘가 보는 앞에서 그와의 관계를 정면으로 부정했을 때 이어질 그의 반응이 살짝 우려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멀쩡한 듯하다가도, 가끔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이상한 방향으로 삐뚤어져서 예상 밖의 행동을 보이던 체스휘였으니까.
“그렇죠, 체스휘 씨?”
하지만 체스휘도 같은 양육자의 입장으로, 이 정도는 이해하지 않을까? 세상에 하얀 거짓말이라는 게 왜 있는데? 그러니까 빨리 그렇다고 해!
나는 ‘내 마음 알지?’ 하는 눈빛으로 체스휘를 쳐다봤다. 내 손목을 놓은 체스휘가 손가락으로 계단의 난간을 툭툭 가볍게 두드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흠…. 일단 그렇다고 할까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체스휘는 다소 미묘하기는 하나 그래도 내 말에 긍정하는 뉘앙스로 대꾸했다. 하지만 비비는 콧방귀를 뀌었다.
“흥, 내가 그런 말을 믿을 것 같아? 책에서 보니까 강한 부정은 오히려 긍정이랬어. 양육자 누나는 그런 것도 몰라?”
왠지 얄미웠지만, 어린애가 상대라 역시 조금 난감했다. 그때, 체스휘가 옅은 웃음소리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 비비. 그냥 계획대로 지금 가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나하고 린 씨가 손도 잡았고, 이 저택에서 제일 친한 사이라고 말해 줄래요?”
이 남자가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 순간 비비가 멈칫했다.
“난 그게 더 좋거든요. 나 대신 저택에 소문을 내 주겠다니 고맙기도 해라.”
정말 비비를 칭찬이라도 하듯이 체스휘가 다정하게 웃었다. 그러자 혼란스러운 듯이 눈을 깜빡이던 비비가 얼굴을 찌푸리며 조금 전과 완전히 정반대되는 소리를 제 입으로 내뱉었다.
“…거짓말하지 마! 7호실 양육자 누나하고 2호실 양육자 형하고, 둘이 이 저택에서 제일 친한 사이 아니잖아! 그리고 방금 두 사람 손 안 잡았잖아! 손목 잡았지!”
“손이든 손목이든 그게 그거 아닌가. 방금 비비가 한 말인데.”
“그게 그거긴, 뭐가! 전혀 다르거든!”
“어쨌든 방금 비비가 말한 거 난 환영이니까, 나중에 친구들 만나면 얼마든지 얘기해도 돼요.”
“말 안 해! 2호실 형이 좋아하는 건 절대 말 안 할 거야…!”
비비는 약이 오른 듯이 들으란 것처럼 크게 소리친 뒤 나를 뿌리치고 후다닥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어째 조금 전과 상황이 반대가 된 느낌이라 나는 얼떨떨해졌다.
“이러면 되겠죠? 생각해 보니 애들까지 알게 되는 건 저도 귀찮을 것 같아서.”
순식간에 원하던 대로 상황이 종료되어서 놀라웠으나, 체스휘는 처음부터 이것을 계획했던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비의 반응을 유도한 체스휘에게 감탄했다.
“체스휘 씨, 은근히 애들 잘 다루네요…. 그런데 얼마 전부터 궁금했는데, 비비랑 무슨 일 있었어요?”
방금 비비가 체스휘에게 까칠한 반응을 보이던 것도 그렇고, 지난번에도 체스휘의 이름을 들은 비비가 발끈했던 것이 떠올라 물었다.
“아…. 지난번에 린 씨가 연못에 빠진 날에요.”
그러자 체스휘가 비비의 잔상이 사라진 곳을 응시하며 살짝 난감한 듯이 대답했다.
“비비가 던진 공에 머리를 맞았다는 얘기를 듣고, 계속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러면 안 된다고 한마디 했더니… 저렇게 심통을 부리네요.”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어쩐지 지난번부터 비비가 이상하게 체스휘한테 날을 세우더라니.
그래도 원래 비비는 체스휘와 나름대로 친하다고 할 수 있는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그 한 번으로 이렇게 체스휘에게 심술을 부리게 되다니, 조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이제 제가 싫어졌나 봐요.”
그런데 문득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저절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아련하게 들리는 음성이었다. 체스휘는 나처럼 비비가 사라진 곳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원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러서 본의 아니게 실수할 때가 있거든요. 이번에도 그래서 미움받은 것 같아요.”
긴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리자, 그림자 진 보라색 눈동자에 한결 깊은 수심이 드리운 것처럼 보였다.
갑자기 상처받은 고독한 사슴 한 마리가 내 눈앞에 뚝 떨어진 느낌이었다. 어쩐지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 나도 모르게 조금 당황해서 체스휘에게 손을 뻗었다.
“아니….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아니에요. 비비도 체스휘 씨를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건 아닐 거예요.”
위로하듯이 등을 도닥이자 체스휘가 가만히 서 있다가 나한테 살며시 몸을 기대 왔다.
“정말요?”
“그럼요.”
“그럼 린 씨도요?”
“저요?”
“린 씨도 나 안 미워해요?”
“내가 체스휘 씨를 왜 미워해요.”
“지금은 아니어도… 앞으로 내가 실수하면 미워할 수도 있잖아요.”
“아니라니까요.”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체스휘가 꼭 주인에게 치대는 개처럼 내 어깨에 이마를 문질렀다. 뒤이어 작은 속삭임이 귀를 간질였다.
“고마워요. 나도 린 씨가 정말 좋아요.”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내 어깨를 간질였다.
뭐야, 귀엽게….
별관에서 들었던 쎄한 기분이 단숨에 증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강아지 털을 쓰다듬듯이 체스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헉…. 저, 저기.”
바로 그때,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얼른 체스휘에게서 떨어졌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들자, 막 층계참을 내려오던 메이드를 볼 수 있었다.
“혹시 방금 3호실 도련님이 이 앞으로 지나가지 않으셨나요?”
“네, 방금 저쪽으로 뛰어갔는데….”
“아, 감사합니다!”
메이드는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비비를 쫓아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다가 나는 퍼뜩 여기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만 가 봐야겠네요.”
체스휘도 나를 더 붙잡지 않았다.
“그래요, 이따 봐요. 그럼 좋은 오전 시간 보내요, 린 씨.”
체스휘가 인사하듯이 내 손을 한번 살짝 잡았다가 놓았다. 마지막으로 내 손목을 훑듯이 스쳐 지나간 손가락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그렇게 어렴풋한 미소를 지은 체스휘를 뒤로한 채 다이안의 방으로 향하다가, 점점 기묘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왜 방금 체스휘한테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