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입술 사이로 헛웃음만 흘리다가 체스휘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하지만 체스휘가 놓아주지 않았다.
“여긴 또 왜 이래요?”
잠깐 실랑이를 벌이다가, 나는 문득 체스휘의 손등에 긁힌 자국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 린 씨가 없는 주말 동안 청소를 좀 하느라고요.”
체스휘는 대수롭지 않게 가볍게 대꾸한 뒤 내 손을 잡고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뭔가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데…. 그런데 체스휘의 얼굴만 보면 이상하게 다른 건 아무려면 어떠냐는 생각이 드니까 참 헛웃음만 나올 뿐이었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 가요?”
“린 씨한테 보여 줄 게 있어서요.”
나를 돌아본 얼굴에 맺힌 햇살 가득한 미소가 이온 음료 광고를 수백 개는 찍어도 될 정도로 청량했다.
그렇게 나는 체스휘에게 이끌려서 어디인지 모를 곳으로 향했다. 다이안에게 다시 가 봐야 해서 시간을 오래 내지는 못한다고 말하자 체스휘가 잠깐이면 된다고 말했다.
나는 체스휘가 내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게 뭔지 궁금해졌다.
혹시 깜짝 선물 같은 건가…? 왠지 혼자 설레발을 치면서 괜히 김칫국을 마시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앞뒤 정황상 따로 짐작 가는 게 없다 보니 마음 한편으로 그냥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내가 속으로 뭔가를 많이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정말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나는 저택에서 느껴지던 미세한 위화감이 어느새 사그라진 것을 느꼈다. 주변에는 어느새 체스휘와 나 둘밖에 없었고, 우리는 건물을 나서 노란색으로 물든 가로수가 햇빛에 반짝이고 있는 길을 걷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체스휘 씨, 오늘 저택이 뭔가 좀 미묘하게 평소랑 다른 느낌이지 않아요? 지금은 괜찮아졌긴 한데… 방금까지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체스휘가 묘하게 웃음 지었다.
“그런 게 느껴져요?”
체스휘는 내 말에 동의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이상한 직감이었지만, 왠지 체스휘는 뭔가를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사실 아까부터 쉽게 입을 떼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체스휘에게는 이런 것보다 따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맑은 오전 햇살에 물든 남자는 티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투명해 보였지만, 어젯밤에 내가 본 남자는 그렇지 않았다.
사실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은 이 저택에 있는 누구보다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제 그걸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체스휘에게 직접 수상한 점을 꼬집어 묻기에는 좀 망설여졌다. 이상하게도, 체스휘에게 비밀이 있는 것 자체보다는 그의 비밀을 파헤치는 쪽에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입술을 열었다 닫으면서 체스휘를 쳐다봤다.
그러자 내 시선을 느낀 체스휘가 정면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돌려 내 눈을 마주했다. 눈을 두세 번 깜빡일 정도의 시간 동안 빛무리 속에서 시선이 얽혔다. 그러고 나서….
쪽.
…응? 방금 뭐가 지나갔지?
훔치듯이 입술을 스친 부드러운 감촉을 곱씹는 중에, 어느새 가까워져 있던 체스휘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게 보였다. 뒤이어 체스휘의 고개가 내 쪽으로 다시금 기울어지더니, 입술 위에 또 한 번 가벼운 온기가 눌러 찍혔다.
깜… 짝이야!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표정 관리가 잘 안 됐다.
“…갑자기 뭐 하는 거예요?”
“귀엽게 쳐다보길래요.”
내 얼굴에 담긴 당황과 의문을 읽었는지, 체스휘가 나한테 가까이 숙였던 고개를 들면서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나한테 뭔가를 바라는 것 같은 표정이라 혹시 이런 걸 원하는 건가 하고.”
“내가 언제… 허, 참나….”
나는 기가 막혀서 헛숨만 들이마셨다.
와, 어이가 없네, 진짜. 그래도 지금까지는 때와 장소를 가리더니, 이제는 막 이렇게 아무 때나 자기 마음대로….
그런데 또 이상했다. 왜 이번에도 기분이 안 나쁘지? 체스휘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라서 그런지 심장만 두근두근 뛰었다.
“난 딱히 이런 걸 원해서 쳐다본 게 아니거든요?”
“그랬어요? 난 하고 싶어서 한 거였는데.”
체스휘는 내 말문을 막히게 하는 데도 선수였다.
게다가… 사람을 뭐 저런 눈으로 쳐다본담?
전에도 언뜻 느꼈는데, 내 입으로 뭐라고 설명하기에도 낯간지러울 만큼 달짝지근한 눈빛이었다.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래서 입에 넣어서 양껏 물고 빨고 싶어 안달이 나는 무언가를 보는 듯한 애정 넘치는, 그런 눈빛…. 내가 덕질을 하다가 가끔 화면에 비친 내 얼굴을 우연히 목격했을 때 꼭 저런 표정을 짓고 있던 것 같은데….
어쨌든 가끔 체스휘의 눈빛을 보면, 내가 그에게 세상에 단 하나뿐인 아주 중요한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체스휘에게 화를 내기 어려운 건 그래서인지도 몰랐다.
나는 또 손으로 마구 긁고 싶을 정도로 속이 근지러워져서 체스휘의 눈을 오래 보지 못하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비꼈다.
“아무튼,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래요?”
“보긴 누가요. 아무도 없는데.”
체스휘의 말대로 주변에는 방금 우리의 만행을 목격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이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별관 쪽이었기 때문이다.
“린 씨는 다른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는 편인가 봐요. 참고할게요.”
그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나는 이상하게 자꾸 말문이 턱턱 막혀서 ‘나 원 참’, ‘허, 참’ 같은 노인네 같은 소리만 연거푸 내뱉으며 체스휘의 손에 이끌려 걸었다.
체스휘가 내게 보여 주고 싶다는 것이 별관에 있는 게 맞는지, 그는 나를 데리고 별관의 출입구로 들어섰다.
“보여 줄 게 도대체 뭐기에 여기까지 온 거예요?”
“궁금해요? 이제 금방 알게 될 거예요.”
체스휘의 태도는 그저 한결같이 평온하기만 해서 도대체 이곳에 뭐가 있을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이 방이에요. 들어와요, 린 씨.”
“…읍! 읍읍!”
그래서 잠시 후, 열린 방문 안에서 포박된 콘라드를 발견했을 때 더욱 경악하고 말았던 것이다.
***
“뭐….”
아니,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뭐, 뭐예요? 이게?”
처음에는 두 눈을 의심했고, 그 후에는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했다.
옆에 서 있던 체스휘가 모르겠냐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여상한 어조로 답변했다.
“닥터 콘라드예요.”
아니, 누가 그걸 진짜 몰라서 묻나요?
나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면서 의자에 묶인 콘라드를 보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행여나 누가 볼까 싶어 얼른 등 뒤로 열려 있던 문을 닫았다.
“설마 보여 줄 거라는 게 이 사람이었어요?”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체스휘와 나, 그리고 의자에 묶인 콘라드뿐이었지만, 저절로 목소리가 작게 낮춰졌다.
애초에 뭐 대단하고 특별한 걸 기대했던 것도 아니긴 한데, 그래도 설마 체스휘가 나를 데리고 온 곳에서 콘라드가 튀어나올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더욱이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콘라드는 의자와 한 몸인 듯이 사지가 의자의 등받이와 다리에 꽁꽁 묶인 채 눈과 입까지 천으로 가려진 상태였다. 그래서 드러난 얼굴의 면적은 적었지만, 전체적인 이목구비와 체형, 또 옷차림과 머리 색 같은 것으로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콘라드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귀는 멀쩡히 들려서인지, 그는 체스휘와 내가 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버둥거리면서 뭉개진 소리를 냈다.
사실 콘라드가 이렇게 포박당한 모습을 보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익숙한 광경을 보자, 자연스럽게 일전에 총괄 집사가 콘라드를 오해해 그를 방에 묶어 놨을 때의 일이 연상되었다.
체스휘가 내 황망한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유감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침부터 보기에는 시각적으로 좋지 못한 광경이죠. 하지만 린 씨한테 최대한 빨리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러니까 도대체 왜….”
도대체 체스휘의 의중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장르가 로맨스물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서스펜스로 가기 시작하죠?
“으으읍!”
내 물음에 대답해 주려는 듯이 체스휘가 입을 연 순간, 콘라드에게서 터져 나온 소리가 그를 가로막았다. 체스휘의 시선이 나를 떠나 콘라드에게 향했다.
“읍…! 크읍!”
체스휘는 의자에 묶인 콘라드를 보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그에게 걸어갔다.
“쉬잇. 너무 시끄럽네요. 잠깐만 조용히 해요, 닥터 콘라드.”
체스휘의 손이 콘라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달래려는 목적으로 다독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성의하게 툭툭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한 손짓이 이어졌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콘라드에게서 흘러나오던 소리가 멎었다.
나는 괴리감이 드는 두 사람의 모습을 살짝 아득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소음이 그치자, 체스휘는 내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 뒤 긴 다리를 움직여 방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멈춰 선 곳은 책상이 있는 곳이었다. 체스휘는 거기에서 무언가를 들고 와서 내게 건네줬다.
그것은 진료 내역을 모아 놓은 듯한 파일철이었다.
“아이들 진료 기록이네요.”
“읽어 봐요.”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아무래도 이 상황을 이해하려면 체스휘가 준 걸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종이에 적힌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체스휘는 느슨히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지켜봤다.
“주말에 의사 선생님의 연구실에 우연히 들렀다가 이상한 걸 발견해서 린 씨에게 보여 줘야 할 것 같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