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뭐요? 이 남자가 지금 뭐라는 거야?
나는 난데없이 나타나서 올리비아에게 별 낯간지러운 호칭의 독점권을 주장하는 체스휘 때문에 당황했다.
고개를 번쩍 들어 체스휘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아직도 그의 턱이 내 머리를 누르고 있어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니, 갑자기 튀어나와서 지금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러게요. 올리비아 씨가 참 이상한 소리를 하네요.”
아니, 올리비아도 그렇지만 지금은 너요, 너!
그러나 체스휘는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내 마음을 전부 다 안다는 듯이 한숨까지 내쉬면서 먼저 말을 이었다.
“복도를 지나가다 보니까 그냥 무시할 수 없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린 씨가 저 말고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있다니….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그 순간, 퍼뜩 뒤통수를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왠지 싸했다.
드디어 체스휘가 내 정수리에서 턱을 뗐다. 체스휘의 팔은 여전히 내 어깨를 휘감고 있었지만, 그가 내 앞으로 고개를 기울여서 그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죠, 린 씨?”
내게 되묻는 목소리와 눈빛은 분명 다정했는데, 이상하게도 다른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 듯한 느낌이 그 안에 물씬 배어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금 이 남자의 기분이 사실 조금 나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왠지 지금 그의 말을 부정하면, 꼭 달갑지 않은 오해를 산 라파엘에게 위험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응? 내 말이 맞죠?”
체스휘가 나를 채근하듯이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나는 한순간 머릿속에 울린 경고음도 잊고 옆으로 기울어진 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오늘따라 머리카락을 말끔히 정리해 가르마를 탄 뒤 반쯤 뒤로 넘겨 하얗게 드러난 체스휘의 반듯한 이마에 눈부신 햇살이 물들었다. 아래로 내리깔린 그의 긴 속눈썹이 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그 아래에 보석처럼 박힌 눈도 오묘한 색채로 반짝거렸다.
그 눈이 나를 향해 미약한 미소를 머금는 순간,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 렇죠. 그 말이 맞죠.”
젠장…. 내가 원래 이렇게 얼빠였나?
아닌데…. 난 덕질할 때 빼고 실제 이성을 만날 때는 외모보다 성격을 따지는 편인데. 그런데 왜 체스휘한테는 이렇게 매번 쪽을 못 쓰지?
게다가 체스휘의 외모가 원래 잘생기기는 했어도 내 이상형에 완전 백 퍼센트 들어맞는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보면 볼수록 이렇게 점점 더 잘생기고 예뻐 보이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봐, 지금도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까 그냥 원하는 대로 술술 대답해 주고 싶어지잖아.
체스휘가 내 말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짓자, 머릿속에서 작게 울리던 경보마저 곧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런데 올리비아 씨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해서 불쾌한 소리를 하는 걸 왜 다 들어 주고 있어요. 하여간 린 씨는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에요.”
체스휘는 세상 다정한 손길로 내 머리를 가까이 끌어당겨서 꼭 억울한 아이를 달래 주듯이 쓰다듬었다. 나는 졸지에 체스휘의 가슴팍에 뒤통수를 파묻은 채로 애정 어린 쓰다듬을 받으며 맞은편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올리비아를 보게 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이 활활 타오르는 듯하던 올리비아의 눈은 어느새 깨끗하게 진화되어 있었다.
“어머, 어머…! 세상에, 그런 거였어?”
그녀는 체스휘와 내 모습을 보고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듯이 손뼉까지 치면서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난 또 아직까지 서로 간만 보는 사이인 줄 알았더니, 그렇게 된 거였구나! 어쩜 소리 소문도 없이!”
“간을 보다니 무슨 그런 심한 소리를.”
“와, 아무튼 축하해! 그 뭐냐, 이런 걸 사내 연애라고 하던가? 아무튼 직장 내에서 사적인 관계로 발전하는 걸 반대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나는 아니거든. 나는 완전 찬성이거든!”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올리비아는 복도 전체에 다 울리도록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무래도 내가 라이벌인 줄 알았다가 아닌 걸 알게 되어서 신이 난 것 같았다.
다만 앞서 말했듯이, 지금은 고용인들이 한창 바쁘게 일하는 중인 오전 시간이라 우리가 있는 복도에도 오가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냥 양육자들끼리 모여서 담소를 나누는구나, 하고 옆을 지나치던 메이드들이 올리비아의 말을 듣고 갑자기 귀를 쫑긋거리면서 우리를 힐끔거렸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내 귀에도 무리 없이 들려왔다.
“사내 연애…? 방금 분명 사내 연애라고 했지?”
“누가?”
“방금 5호실 양육자님이 한 말 아니야?”
“그럼… 2호실하고 7호실 양육자님이…?”
나는 본의 아니게 체스휘에게 몸을 거의 기대다시피 한 상태로 메이드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았다.
“자기들도 참, 난 그것도 모르고 오해할 뻔했네. 아 참, 남의 자기한테 자기라고 부르지 말랬지? 아유, 아무튼 그동안 말도 안 하고, 이 새침데기들 같으니라고.”
올리비아는 이제 완전히 기분이 좋아졌는지 ‘호호호호!’ 하고 소리 내 웃기까지 했다.
“레이븐이 좀 안됐긴 한데, 4호실은 저돌적인 척하는 것치고 영 패기가 없어서 안 될 줄 알았어. 아무튼 다시 한번 축하해, 2호실, 7호실!”
나는 도대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얼이 빠진 채로 여전히 눈만 끔뻑였다.
“린 씨, 올리비아 씨가 축하를 해 주네요.”
체스휘는 이 상황이 제법 흥미로운 듯이 고개를 모로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았다. 올리비아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크게 손뼉을 쳐서 복도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전부 끌어모았다.
“다들 뭐 하고 있어? 방금 다 들었지? 우리 모두 어서 이 두 사람을 축복해 줍시다!”
그들은 나만큼이나 얼떨떨한 얼굴로 올리비아를 따라 어정쩡하게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추, 축하드려요.”
나는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이 레드포드 저택의 복도인지, 결혼식 피로연장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체스휘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체스휘가 나를 내려다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시선을 들어 앞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음, 고마워요?”
나는 기가 막혔다. 고맙긴 뭐가 고마워?
“그럼 우린 먼저 가 볼게요.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아, 그래. 내가 눈치 없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 그럼 나중에 봐!”
체스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럽지도 않은지, 내 손을 붙잡고 그 마굴 같은 복도에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갔다.
“뭐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에요?”
“그러게요. 필요도 없는데 굳이 축하를 해 주네요.”
“아니, 그게 아니고… 지금 우리가 빼도 박도 못할 사내 연애를 하는 것처럼 공표가 되어 버렸잖아요? 그런 사이도 아닌데….”
“그런 사이가 아니에요?”
나는 체스휘가 공을 띄우고 올리비아가 그걸 정통으로 후려갈겨서 폭격을 날려 버린 이 예상치 못한 상황이 그저 황당했다. 그러나 체스휘는 내 말에 걸음을 멈추며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은 것처럼 반문해 왔다.
“그럼 린 씨는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니면서 지금까지 손잡고 껴안고 키스하고, 또 어젯밤처럼….”
나는 체스휘가 말을 더 잇기 전에 급히 손을 들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갑자기 그 얘기는 또 왜 꺼내요?”
체스휘의 입에서 대낮부터 듣기에 민망한 노골적인 말들이 흘러나오자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난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런 거 안 하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들었다. 동시에, 체스휘의 입을 막은 내 손바닥에 간지러운 숨결이 닿았다.
“린 씨는 아니에요?”
체스휘가 내 손을 붙잡아 내린 뒤 나를 말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햇빛이 고인 눈을 마주하는데, 또 말문이 막히면서 무조건 그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체스휘의 눈을 보고 있으니, 왠지 우리가 사실 이 저택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이 통해 열렬히 연애해 왔던 사이인 것처럼 기억 조작이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하기야, 체스휘의 말마따나 이제 와서 우리가 아무 사이가 아니라고 딱 잘라 말하기도 애매하긴 했다.
물론 체스휘가 이미 우리를 그런 관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건 좀 의외였다. 하지만 열몇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니고 이 나이에 일일이 사귀자 어쩌자 말로 표현하고 동의해서 ‘그럼 우리 오늘부터 1일!’ 하는 것도 유치하게 느껴지긴 했다.
“그… 래요. 그럼 그건 그렇다 쳐도…. 왜 상의도 없이 이렇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이런 사적인 일을 마음대로 다 밝혀 버리는 거예요?”
“아, 말하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당연히 안 되죠.”
내가 정색하며 단호하게 반응하자, 체스휘가 속눈썹을 나풀거리면서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내리깔며 미안한 듯이 말했다.
“이런 게 처음이라 몰랐어요.”
살짝 풀이 죽은 듯한 얼굴이 얼마나 가련하고 처연해 보이던지….
하지만 이제 안 속는다. 체스휘의 말로는 몰랐다고 했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누굴 이렇게 좋아한 것도, 또 이런 관계가 된 것도 린 씨가 처음이라, 그래서 몰랐어요.”
하지만 체스휘가 내 손을 감싸 쥔 채 들어 올려, 거기에 가볍게 입술을 묻는 순간 그에게 더 따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나 미워할 거예요?”
참나…. 아니, 진짜 참나….
어딜 눈을 이렇게 앙큼하게 뜨면서 여우 같은 짓을….
아무리 그래도 사내 공개 연애 같은 게 얼마나 민감한 사항인데, 이걸 그냥 이러고 넘어가려고….
그런데 이상하다. 화가 전혀 안 나네…?
그런 내 기막힌 상황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체스휘가 나를 보며 천천히 눈꼬리를 휘어 미소를 지었다.
“나 안 미워할 거죠?”
이 남자가, 이제는 아주 대놓고 미인계를 쓰면서 내숭을 부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