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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49)화 (149/300)

‘왜지? 왜 기억이 나는 거지?’

그러나 도대체 왜 내 기억이 멀쩡한지 의문이었다.

일전에 이런 일이 발생했을 때는 중간에 기억이 송두리째 날아가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제는 내가 다른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분명 카드리고 저택에서 집사 토마스와 접전하다가 머리에 타격을 입었을 때, 그때부터 내 상태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마치 뇌의 회로에 연결된 스위치가 그 순간을 기점으로 꺼지고, 대신 다른 것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꼭 내 안에 숨겨져 있던 다른 인격이 그 순간 껍질을 뚫고 나온 듯한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런 상태로 내가 아무렇지 않게 ‘린 도체스터’로서 생각하고 움직였던 기억을 떠올리자, 갑자기 마음속에 혼란스러운 감정이 밀려왔다.

게다가 린 도체스터는 도살자라는 별명을 괜히 가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한번 스위치가 켜져서 원래의 본성이 튀어나올 때마다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어제 새벽에 카드리고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이번에는 내가 한 짓에 전처럼 심하게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혹시 이번이 두 번째라고, 그나마 조금은 적응이 된 걸까? 이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맞나?

나는 심각하게 얼굴을 굳힌 채 고민에 빠졌다.

…혹시 이 몸에 나와 린 도체스터의 영혼이 둘 다 들어 있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내 게임 캐릭터에 불과했던 린 도체스터에게 원래 다른 영혼이 있다는 가설은 이상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이중인격이기라도 하다는 건지, 나로서는 더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만 떠올랐다.

아무튼… 일단은 이 방에서 나가고 난 뒤에 다시 생각을 이어 가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나를 꽁꽁 감싸고 있는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굳어 있던 몸을 최대한 조용히 움직였다.

그런데 내가 꾸물꾸물 움직여 이불 밖으로 빠져나가려 하는 걸 알았는지, 허리를 옥죄고 있던 남자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기껏 조금 벌렸던 틈이 다시 좁혀지면서, 가뜩이나 밀착해 있던 몸이 더 바싹 맞붙었다. 꼭 빨려 들어가듯이 남자의 너른 가슴팍에 내 등이 완전히 파묻혔다.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체스휘가 잠결에 그러는 것처럼 내 목덜미에 콧날을 문지르고 입술을 더 깊게 포갰다. 차라리 거기까지면 괜찮았을 텐데, 그는 그걸로도 모자라서 솜털이 일어난 내 목에 어젯밤처럼 요망하게 입술을 지분거리기까지 했다.

“흡.”

나는 급히 숨을 들이마셨다.

참기 어려운 간지러움에 자꾸만 몸이 들썩이려고 해서 아주 곤혹스러웠다.

차라리 계획을 변경해 체스휘가 깨든 말든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 했으나, 허리를 붙든 팔은 돌덩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떼어 내려 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차선책으로나마 자꾸만 목을 파고드는 체스휘의 얼굴만이라도 떼어 놓자 싶었다.

아, 그런데 나도 모르는 새 내 몸에 접착제라도 발라진 건가?

꽉 붙잡힌 허리는 일단 놔두고 상반신을 비틀어서 슬금슬금 앞으로 기울이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어째 마음처럼 수월하게 거리가 벌려지지 않았다. 기울어지는 내 몸을 따라 체스휘까지 덩달아 딸려 왔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생각한 것과 달리, 나는 거의 엎드린 자세로 침대와 체스휘 사이에 샌드위치 속 햄처럼 낀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악, 무거워…!’

조금 전과 다른 의미로 숨이 막혀서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혼자 끙끙거렸다.

그런데 불현듯 귓가에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처음에는 체스휘가 잠결에 흘린 소리를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한번 목덜미에 흩어지는 부스러진 웃음소리에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드디어, 아까부터 계속 내 목을 자극하던 입술이 떨어졌다.

“린 씨, 아침부터 혼자 잘 노네요.”

잇따라 간지러운 속삭임이 고막을 훑는 순간, 나는 파드득 몸을 떨었다. 아침이라 조금 가라앉은 상태이긴 했지만, 지금 막 일어난 사람이기라기에는 지나치게 명료한 목소리였다.

“일어났…!”

설마 진작 깨어났으면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던 건가 싶어, 나는 목소리를 높이며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바로 코앞에 있는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뒤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으면 그렇다고 말을 했어야죠….”

너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나? 체스휘의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체스휘가 침대에 팔을 짚어 나한테 완전히 붙어 있던 상체를 조금 들어 올린 상태긴 해도, 여전히 그의 몸이 위에서 나를 짓누르고 있는 모양새인 걸 깜빡했다.

게다가 체스휘도 아까 내가 이불을 들춰 확인한 내 행색만큼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평소보다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는데, 나른함에 젖어 유독 짙은 색으로 물든 눈과 어우러지니 왠지 형언하기 어려운 오묘하고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 처음에는 따지듯이 언성을 높였던 내 목소리도 갈수록 잦아들다가, 끝에 가서는 거의 흔적만 남긴 채 조용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나는 또다시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한 눈을 체스휘에게서 비끼며, 침대와의 혼연일체가 꿈인 사람처럼 옆으로 살짝 틀었던 몸을 다시 원래대로 얌전히 복귀시켰다.

“아예 잠든 적이 없어서 일어났다고 말하기는 좀 그런데.”

그런 내 위로 웃음기 담긴 목소리가 다시 한번 울렸다. 나는 그냥 무시하기 어려운 내용에 흠칫해서 다시 눈을 돌렸다.

“뭐… 밤새 깨어 있었다고요?”

“린 씨는 잘 자더라고요. 나만 혼자 그런 식으로 버려두고.”

체스휘가 나른하게 내리뜬 눈으로 나를 보며 침대 위에 흩어진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장난을 치듯이 만지작거렸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그러다 이내 그가 미약한 불만을 담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어 보인 뒤, 내 얼굴 옆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얏!”

그 직후 갑자기 귀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서 당황했다. 나는 얼른 손으로 귀를 감싸며 난데없는 입질을 한 체스휘를 경계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왜, 왜 갑자기 깨물어요?”

“빨개서.”

“아니, 그게 무슨 맥락 없는….”

“왠지 여기서도 단맛이 날 것 같아서요.”

그 말에 거의 반사적으로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면서 말문이 막혔다.

“역시 단맛이 나는 것 같아요.”

“다른 곳도 그럴지 궁금한데.”

“쉬잇. 괜찮으니까 가만히 있어요….”

“린 씨, 무슨 생각 해요?”

바로 그때, 내가 막 떠올린 기억 속의 목소리와 동일한 음성이 바로 가까이에서 속삭여졌다.

나는 그만 티 나게 몸을 크게 움찔거리고 말았다.

“지금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는데.”

꼭 내가 무엇을 떠올렸는지 아는 듯이, 체스휘가 내 눈을 정면에서 응시하며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렸다.

나는 꼭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면서도, 혼자만 여유로워 보이는 그 얼굴이 얄미웠다.

가만, 그러고 보니 방금 이 남자가 나한테 뭐라고 했었지?

지난번에… 지난번에도 이랬었다고?

그 말을 곱씹는데, 이상하게 왠지 속이 조금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눈을 슬그머니 치켜올리면서 체스휘의 옷깃을 확 붙잡아 끌어당겼다.

“체스휘 씨야말로 방금 그 말 무슨 뜻이에요?”

“무슨 말이요?”

“지난번에도 그랬다니, 설마 그때도 나랑 이런 짓 했어요?”

나한테 순순히 끌려온 체스휘가 잠깐 말없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내 기분이 왜 이렇게 나쁜 건지,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는 상태로 체스휘를 노려봤다.

체스휘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재미있다는 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요. 그땐 아무 일 없었다고 했잖아.”

“그럼 지난번에도 그랬다는 건 뭔데요?”

“말 그대로인데요. 그때도 날 옆에 두고 혼자만 잘 잤다고.”

의심스러운 눈으로 체스휘를 뜯어 봤지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서서히 눈에서 힘을 풀며 체스휘의 옷깃을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내게 말했다.

“이상하네요. 왜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자신을 질투하는 것 같지?”

그 순간 나는 꼭 불시에 정곡을 찔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발끈했다.

“무슨 소리예요, 내가 언제 질투… 그런 걸 했다고 그래요?”

“그보다 린 씨. 이번에는 어젯밤 일이 전부 다 기억나나 봐요.”

하지만 체스휘가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매끄럽게 화제를 돌려 어젯밤의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입에 담은 순간, 나는 또 한 번 말문이 막혀 입술만 달싹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어제 그건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죠?”

그런 나를 보며 체스휘가 배부른 사자처럼 입꼬리를 올려 한결 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 어젯밤의 일은 체스휘의 말처럼, 그냥 가볍게 없던 거로 치고 넘어가자고 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물론 결정적인 마지막 선까지 넘은 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입에 담기 어려운 그 엇비슷한 짓을 하긴 했단 말이다.

사실 체스휘의 침대에서 일어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소한 지난번에는 정말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당당하게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른 척하는 게 불가능했다. 이미 내 표정에서 전부 티가 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내가 어제의 일을 전부 기억한다고 체스휘에게 곧이곧대로 말해도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제 체스휘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말하기 낯부끄러운 그런 종류의 일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내 앞에 있는 남자를 조용히 주시하며, 그의 인물 정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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