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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46)화 (146/300)

린은 자신에게 걸어오는 체스휘를 보면서, 그가 왜 이런 당연한 걸 의아해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깜빡였다.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요.”

체스휘는 린이 어제 레드포드 저택을 떠날 때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기민하게 눈치챘다. 오히려 그녀는 얼마 전 밤에 불안정한 모습으로 체스휘의 방에 찾아왔을 때와 비슷한 상태로 보였다.

하지만 체스휘는 그런 것을 내색하지는 않고, 린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그건 맞긴 한데, 린 씨가 오길 기다린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린은 체스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이해했다.

“착한 어린이는 잠들었을 시간이에요.”

“아아, 그런 이유로?”

린을 탐색하듯이 응시하던 체스휘의 눈이 살짝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난 또, 내가 제일 보고 싶어서 먼저 찾아온 줄 알고 기대했는데.”

“어…. 그것도 그렇긴 한데요.”

체스휘가 일부러 상심한 척 속눈썹을 내리깔자, 어물거리는 린의 말끝에 주저함과 난처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린은 거짓말을 잘 못 했다.

체스휘는 자신이 열두 살짜리 꼬마보다 린에게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사실에 진심으로 기분이 상하거나 실망하지는 않았다.

린의 코앞에서 멈춰 선 체스휘의 눈이 이내 가볍게 휘어졌다.

“하긴, 맞는 말이지. 난 늦은 시간까지 나쁜 장난 치면서 노느라 밤도 샐 수 있는 나쁜 어른이죠.”

그는 린을 향해 고개를 살며시 기울인 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투는 불순한 의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담박했는데, 정작 가까이에서 진득하게 얽혀 드는 눈빛이나 린의 얼굴을 문지르듯이 스치는 손길은 어딘가 야릇했다.

그래서 린은 지금 이 상황이 어쩐지 굉장히 불건전한 것처럼 느껴져서 저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아무튼 잘했어요. 지금 다이안한테 갔으면 린 씨가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챘을지도 몰라요. 꼬맹이들 눈치가 생각보다 빨라서.”

체스휘는 그런 린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얼굴을 한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지금은 반만 이상하네.”

꼭 의사가 사실 그대로의 진단을 내리듯이, 이렇다 할 감정이 담기지 않아 유달리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강아지풀을 가지고 노는 고양이처럼 린의 어깨 부근에 있는 머리카락을 괜스레 만지작거리던 체스휘의 손이 조금 밑으로 내려갔다.

“이건 또 못 보던 옷이고. 그나마 이번에는 남자 옷이 아니긴 한데.”

일전에 린이 콘라드의 코트를 입고 왔을 때처럼 약간 거슬린다는 듯이 옷깃을 가볍게 훑던 손가락이 잠시 후 떨어졌다.

“여긴 왜 다쳤어요?”

이번에 체스휘가 눈길을 두며 물은 건 코트의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목이었다. 상처가 깊지 않아 이미 피는 굳은 상태였지만, 피부가 찢어진 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린도 체스휘의 손길이 닿은 곳을 내려다보며 답했다.

“총에 스쳐서요.”

“총을 누가 쐈는데?”

“카드리고 가문 집사요.”

“카드리고 가문 집사?”

뜻밖의 소리를 들은 듯이 체스휘가 한쪽 눈썹을 추어올렸다.

“어제하고 오늘, 라파엘하고 같이 있지 않았나?”

“그때는 옆에 없었어요.”

사실 린의 입장에서는 체스휘가 라파엘을 아는 것에 의문을 가져야 마땅했으나, 어쩐지 그녀는 그 사실이 별로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새벽 카드리고 저택의 지하에서 나와 가까이에서 얼굴을 보자마자, 라파엘에게 체스휘의 손이 닿은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라파엘은 결함이 있는 불량품인지, 그녀처럼 체스휘에게 완전히 귀속되지 못한 느낌이었다. 린은 자신이 체스휘에게 더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에 남모를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꼈다.

린의 말에 체스휘가 흐음, 하고 마뜩잖은 듯이 낮은 소리를 흘렸다.

“라파엘이 생각보다 영 쓸모가 없네. 다친 데는 또 없어요?”

그는 린을 근처에 있는 테이블에 걸터앉게 한 다음, 그녀가 입은 케이프 코트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조금 전처럼 다른 의도가 내포된 은밀한 손길은 아니었고, 단순히 시중을 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아무래도 린에게 또 다친 곳이 없는지 직접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하도 자연스럽게 코트를 벗기기 시작해서 린도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체스휘를 그냥 놔뒀다.

“머리 아파요.”

“머리?”

“싸우다가 팔꿈치에 맞았어요.”

“그것도 카드리고 집사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손을 움직이던 체스휘가 시선을 들었다.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미끄러진 눈이 정면에서 마주쳐서 린은 괜히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체스휘와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탓이다.

“어디를 맞았는데?”

“여기, 이쪽이요….”

린은 자기도 모르게 상체를 살짝 뒤로 빼며 대답했다.

하지만 마침 코트의 단추를 다 푼 체스휘가 린의 머리를 손으로 감싸면서 끌어당겨서, 기껏 조금 벌렸던 거리가 전보다 두 배는 더 가까워졌다.

린은 그녀의 머리를 붙든 손길을 따라 고개를 엉거주춤 옆으로 기울인 채, 진지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체스휘의 얼굴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정말 살짝 부었네요. 그 카드리고 집사 이름이 뭐예요?”

“토마스요.”

“아아. 그 곰 새끼처럼 무식하게 힘만 센 보모 집사.”

작게 혀를 차는 목소리에서 다소의 짜증과 불쾌감이 느껴졌다. 체스휘는 린이 다른 사람 때문에 다친 게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다음에 그 집사 팔하고 머리를 잘라 줄게요.”

그는 린이 토마스의 팔꿈치에 가격당했다고 말한 부분을 손으로 살살 쓸면서 그녀를 달래듯이 말했다. 하지만 정작 누군가 기분을 달래 줘야 할 것처럼 보이는 건,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체스휘였다.

린은 그런 체스휘를 가만히 올려다보며 무슨 말인가를 할 듯 말 듯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이내 조금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도 아파요. 카드리고 집사가 총 들고 쫓아올 때 피하다가 삔 것 같아요.”

“어디, 이쪽 손목이요?”

“그리고 여기는 카드리고 집사 때문에 넘어졌을 때 까진 것 같고요.”

체스휘는 우물쭈물하다가 자신에게 먼저 슬며시 손을 내미는 린을 보고 입가에 미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린은 꼭 고자질을 하듯이 체스휘에게 몸의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먼저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만큼 앞에 있는 사람이 그녀의 말을 잘 들어 줘서 그런 것일 수도 있었고, 그녀를 향한 조심스러운 손길과 다정한 눈빛이 꾸며 낸 거짓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체스휘는 아까보다 말이 많아진 린을 보고 비스듬한 미소가 걸린 제 입매를 괜히 매만졌다.

“그리고 또?”

“무릎도 멍든 것 같고…. 이건 대주교님하고 만났을 때 그랬는데….”

“만나서 뭐 했어요?”

린은 본국에서 있었던 일을 체스휘에게 시시콜콜 죄다 이야기했다.

“그래서 카드리고 저택에 가게 된 거거든요. 그런데 라파엘 2등급 심문관이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해서 집사가 오해를 했지 뭐예요.”

“무슨 오해?”

“라파엘 2등급 심문관하고 제가 사적으로 긴밀한 관계라고요.”

“그것참 굉장히 기분 나빴겠네요.”

체스휘는 굉장히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들은 것처럼 피식, 냉소를 흘린 뒤 조금 전에 벗기려다가 만 린의 코트에 다시 손을 댔다.

“집사 눈이 삐었네. 라파엘은 역시 쓸모가 없고. 다음에 집사 눈하고 라파엘 입도 같이 없애 줄게요.”

짐짓 린을 위로하듯이 다정한 어투였지만 그 내용은 제법 살벌했다.

체스휘가 팔을 들어 올리라는 듯이 손짓해서 린은 그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이내 그녀의 팔에 꿰여 있던 코트가 체스휘의 손에 벗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어쩌지. 역시, 앞으로는 그냥 그런 데 보내지 말아야겠다 싶은데.”

“어차피 못 가요.”

“으음? 왜요? 내가 가지 말라고 해서?”

“카드리고에서 죄다 총으로 쏴 버려서요.”

이건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는지, 린에게서 벗긴 코트를 들고 아무 데나 던져 버리려고 옆으로 움직이던 체스휘의 팔이 우뚝 멈췄다. 그는 다시 시선을 돌려 린을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도체스터에서 소환 명령이 떨어졌는데 안 가고 그냥 여기로 돌아와 버렸거든요.”

린은 엄청난 이야기를 남 얘기하듯이 아무렇지 않게도 말했다.

그 후 잠깐 방 안이 조용해졌다.

한동안 린을 가만히 쳐다보던 체스휘가 손에 들고 있던 코트를 바닥에 그냥 떨어뜨린 뒤 린이 걸터앉은 테이블 위로 손을 짚었다.

“그래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의 상반신이 앞으로 기울어지며 달빛에 물든 고요한 눈동자와 낮게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도 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서 무섭고 속상하겠네요.”

“아니요. 별로 그렇진 않아요.”

체스휘는 린의 말이 진심인지 가늠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마주한 눈을 꿰뚫을 것처럼 들여다봤다.

“그렇지 않다니, 다시 돌아가면 위험할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돌아갈 곳이 없어질지도 모르고.”

“그렇긴 한데… 굳이 다시 안 가도 상관없으니까.”

그리고 이어진 린의 미지근한 목소리에 체스휘의 입술에 아까보다 한결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다시 안 가도 상관없어요?”

“네에.”

“정말?”

체스휘의 머리카락과 그의 입술에서 내뱉어진 숨결이 귀를 간지럽혀서 린은 움찔거렸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씻어서 그런지, 그녀에게 살짝 닿은 금갈색 머리카락에서 미약한 물기가 느껴졌다.

체스휘에게서는 체향과 비누 향이 섞인 좋은 냄새가 풍겼다. 반면 자신은….

갑자기 린은 달갑지 않은 깨달음을 얻고, 지나치게 밀착한 체스휘의 몸을 꾹 밀어냈다. 하지만 체스휘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기, 저 그만 갈게요.”

“갑자기 왜요?”

“지금 저 냄새 날 것 같아요.”

“좋은 냄새만 나는데요.”

체스휘는 린의 말을 흘려 넘기듯이 짤막하게 대꾸한 뒤,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아예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린의 몸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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