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까지 이동료가 얼마….”
“돼, 됐습니다! 필요 없어요!”
마부는 린이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돈도 받지 않고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말을 몰아 자리를 떠났다. 꼭 우리에서 벗어난 야생 동물에게서 급히 도망치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린은 역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원성을 사며 또다시 미친 질주를 시작한 마차를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뒤돌아 역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지저분한 옷차림 때문인지, 아니면 아직도 꺼내 들고 있는 총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린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많았다. 혹시 몰라서 제일 더러워진 겉옷 한 겹을 벗어서 공중화장실 쓰레기통에 버렸는데, 안에 입은 옷에도 피가 묻어서 눈에 띄는 모양이었다.
린은 잠깐 주위를 살피다가, 가까이에 있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초면에 실례인 건 알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예, 예? 뭐, 뭐, 뭐죠?”
잠시 후, 린은 여자에게서 제공 받은 진회색 케이프 코트를 입고 하얀 인조털이 복슬복슬하게 달린 모자를 눌러쓴 뒤 역사를 가로질렀다.
다행히 이름 모를 여자는 초면인 린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고 자신이 입은 옷을 흔쾌히 벗어 주는 마음씨 착한 사람이었다.
다만 린으로서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어 아쉬울 따름이었다. 가방과 옷에 달린 금장식이라도 외투의 교환 대가로 떼어 주려고 했지만, 여자는 린을 역까지 데려다준 마부처럼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린에게 옷을 벗어 주자마자 헐레벌떡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린은 여인의 신원을 몰라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이드의 기능을 사용하면 입력된 코드 넘버를 스캔해 여자의 신상 정보 정도는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도체스터와 카드리고 가문에게 위치 추적을 당할지도 몰랐다.
그러다 문득 린은 자신의 바보 같은 실수를 깨닫고 작게 탄식했다.
하긴, 굳이 위치 추적 같은 걸 하지 않아도 바보가 아닌 이상 린이 그들에게서 도망쳐 어디로 향할지는 뻔히 추측할 수 있을 텐데….
“린 도체스터…!”
덜컹, 덜컹, 덜컹… 빠아아아앙!
역시나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열차가 역에 들어서면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
도체스터와 카드리고, 어느 쪽의 추적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역 안에 널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듯이 무력 진압을 시도하지는 않고 최대한 조용히 접근하려는 눈치였다.
만일 두 가문이 합심하여 린을 쫓는다면 사실상 그녀가 포위망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없었다.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 도체스터와 카드리고가 함께 작심한다면 낮이든 밤이든, 또 보는 눈이 있든 없든, 온갖 범법적인 수단을 전부 사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 두 가문은 린을 두고 완벽한 타협점을 찾지 못해, 아까의 힘겨루기를 계속 이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 린을 손에 넣는지를 놓고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를 견제하며 역사 안으로 빠르게 뛰어 들어오고 있었다.
딸랑.
린은 곧장 승차권을 발매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몰래 문도 잠갔다.
열차의 승차권은 자동 발매기에서 구입하는 게 보편화되어 있었기에, 이곳은 역 안에서도 구색 맞추기용으로만 존재하는 장소였다.
“승차권은 밖에 있는 자동 발매기를 통해 구입해 주십시오.”
지금처럼 누가 이곳에서 열차의 승차권을 구매하려고 해도 데스크에 앉아 있는 안내원은 늘 시큰둥한 얼굴로 밖에 있는 자동 발매기를 이용하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44세계의 시민들로부터 이럴 거면 뭐 하러 역에 안내원이 있는 것이냐며 푸념을 사기도 했다.
“열차가 아니라 외부로 향하는 문을 이용하려고 하는데요.”
하지만 사실상 이 작은 방은, 다른 세계로 연결된 문을 관리 및 감시하는 비밀 관리국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 비밀 관리국은 제44세계 내에 총 아홉 군데가 있었다.
일반인도 사용할 수 있는 정식 관리국과 달리, 아는 사람만 아는 샛길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비공식 관리국은 상위 귀족 가문과 국가 요직에 있는 인물들, 또 스텔라 같은 정부 비밀 기관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위치가 공유되었다.
“아, 출국 절차를 밟으시려는 거군요. 이쪽으로 오십시오.”
린의 말을 들은 안내인이 처음으로 심드렁한 표정을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은 안내인을 따라 방의 안쪽에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다.
“포털에 서 주시겠어요? 신원 확인 후 문으로 이동될 겁니다.”
바닥에 깔린 금속판에 서자 그 위에 있는 센서에 빛이 들어왔다. 그리고 머릿속에 소리가 울렸다.
[출국 절차에 따라 입력된 코드를 확인하겠습니다.]
[린 도체스터. 23세. 제44세계 중앙 비밀 기관 스텔라(stēla) 소속 3등급 심문관. 신원 보증인 릭 도체스터.]
[절차를 생략합니다.]
[인증이 완료되었습니다.]
[문으로 이동됩니다.]
“특혜 대상이셨군요. 편안한 여행길 되시길 바랍니다.”
원래 출국 절차는 입국 절차에 비해 훨씬 간단했다. 게다가 린은 특수 신분으로, 그런 간단한 절차조차 생략할 수 있는 특혜층이었다.
혹시 오늘 새벽 카드리고에서 벌어진 일로 제44세계 밖으로 출국하는 것이 금지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별 탈 없이 문이 개방된 걸 보니 다행히도 아직 출국 금지 대상에 이름이 올라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관리국에 아직 연락이 닿지 않은 건지, 아니면 관리국의 승인 허가가 아직 떨어지지 않은 건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린으로서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떠날 수 있어 좋은 일이었다.
쾅쾅쾅!
그때 밖에서 거칠게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 있던 안내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도대체 누가 저렇게 시끄럽게 문을….”
곧이어 강제로 문고리를 잡아 뜯는 소리까지 연이어 고막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포털에서 빛이 떠올랐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린은 눈에 익은 공터에 서 있었다.
사방이 자욱한 안개로 뒤덮이고, 눈앞에는 익숙한 검은 문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고 묘한 이질감을 풍기며 그 앞에 서 있는 마차 한 대가 눈에 띄었다.
린을 발견하고 마차에서 내린 길잡이가 모자를 벗어 인사했다.
“오셨군요, 양육자님. 시간보다 이르지만, 오늘은 왠지 일찍 나오고 싶은 기분이라 미리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길 잘했네요.”
린도 바로 마차에 오르면서 그에게 화답했다.
“잘하셨네요. 지금 바로 돌아가죠.”
“네, 그럼 당장 출발하겠습니다.”
뒤따라올 추격자를 생각해 뜸 들이지 않고 바로 레드포드 저택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행히 길잡이도 늦장 부리지 않고 바로 움직였다.
마차가 눈앞에 솟은 커다란 검은 문을 향해 서서히 달리기 시작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차 안에 자살 희망자라도 탔다고 오해할지도 모를 광경이었다.
그러나 길잡이가 이끄는 마차는 육중해 보이는 문에 부딪히지 않고, 그 순간 시야에 퍼진 보라색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이 삼켜졌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합체되는 것 같은 기이한 느낌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온몸의 오감이 이상해져서,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또 지금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아예 멈춘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인간이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길잡이의 목소리가 아득해진 정신을 깨웠다.
“누가 길을 찾기 어렵게 만들어 놨더군요. 그래서 도착하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
레드포드 저택은 보랏빛 밤에 잠겨 있었다.
제44세계에서 출발할 때 아직 해가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상할 정도로 시간이 오래 걸린 편이었다.
길잡이의 말대로라면 레드포드로 향하는 길을 찾기 어렵게 만든 건 44세계의 추격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린이 레드포드에 도착하기 전에 잡는 것이 목적이었을 테니, 아예 레드포드 저택이 있는 이 18세계로 통하는 문을 길잡이가 찾지 못하게 혼동시키려 했을 터였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던 건 길잡이의 능력이 뛰어난 덕분이었다.
“덕분에 오늘 안에 도착했네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양육자님.”
린은 레드포드의 길잡이 존과 인사를 나눈 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 로비에 있는 시계를 확인해 보니 밤 11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자정이 되어 주말이 지나면 레드포드의 문은 닫히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하마터면 추격자들의 속셈대로 될 뻔했다.
린은 발소리 없이 빠르게 걸어 계단을 올라갔다. 고용인들도 모두 잠자리에 든 시간이라 저택 전체가 아주 조용했다.
잠시 후 목적지에 도착해, 린은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을 열었다.
“자요? 나 다녀왔어요.”
사실 방 주인이 아직 잠들지 않은 것도 알고 있었고, 또 이런 식으로 그녀가 마음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도 화내지 않을 것도 알았기 때문에 겁 없이 취한 행동이었다.
얼마 전의 밤처럼 창가에 앉아 있던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온 린을 돌아보았다.
체스휘는 문을 닫고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온 린을 잠깐 말없이 응시하다가, 갑자기 작게 감탄하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지금 저택에 오자마자 날 제일 먼저 보러 온 거예요?”
비스듬히 기울어진 체스휘의 얼굴에 이채 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어쩐지 이 상황이 상당히 흥미롭고 유쾌한 듯이, 린을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