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 ‘잡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향해 뻗어지던 손은 내 몸에 닿지 못하고 어깨 부근을 그냥 통과해서 지나갔다.
아래로 내리깔린 주홍색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 있었다. 왠지 숨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거리라서 무심코 호흡을 멈췄다.
“사라졌나….”
잠시 후, 미카엘 카드리고가 고개를 작게 갸웃거리며 손을 거두어들였다.
“분명 착각이 아니었는데.”
그는 빈손을 내려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나는 미카엘 카드리고가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뭘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거람?
바로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갑자기 무언가가 톡 떨어졌다.
“앗, 차가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소리를 내 놓고 깜짝 놀라서 다시 앞을 쳐다봤다.
이번에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환영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머리를 더듬거려 보니, 위에서 떨어진 건 물인 듯했다.
가만, 그런데 물? 위에서 물이 떨어졌다고?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상태에서도 여전히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형체를 어렴풋하게 구분할 정도는 되었는데, 천장에는 덩굴 식물이 주렁주렁 자라 있었다.
잠깐 눈을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부터 위협 사격이 전혀 없는 걸 보니, 집사는 지금 이곳에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옆에 있는 기둥으로 다가가 밑으로 타고 내려온 덩굴 식물을 손으로 잡아당겼다.
‘제법 튼튼한 것 같은데.’
줄기가 꽤 억센지, 아무리 세게 잡아당겨도 손에 잡힌 덩굴 식물은 끊어지지 않았다. 몇 번 더 확인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서, 가방과 총을 어깨에 메고 식물의 줄기를 밧줄 삼아 손에 쥔 채 기둥을 타고 올라갔다.
천장까지의 높이가 대략 7m 정도는 되는 것 같았는데, 그중 5m쯤 올라갔을까?
손을 옆으로 뻗어 더듬거리자, 사박사박거리는 이파리의 감촉과 미약한 물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무성한 덩굴 식물에 가려진 동그란 원형 통이 만져졌다.
이건… 배수관? 배수관을 따라 덩굴 식물이 자라난 건가? 밑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던 물도 여기에서 샌 것 같았다. 손에 만져지는 감촉으로는, 일반적인 배수관보다 여기에 있는 것의 크기가 더 크고 단단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한 손으로는 덩굴 식물의 줄기를 쥔 채 시험적으로 다른 한 손을 뻗어 배수관을 붙들고 매달렸다. 배수관은 생각보다 튼튼해서 안정적으로 내 체중을 버텨 냈다.
‘출입구는 찾지 못했지만 이건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윽고 나는 마음을 굳히고, 몸을 좀 더 위로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아예 배수관을 두 발로 딛고 섰다.
이렇게 온몸을 실은 상태에서도 배수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린 도체스터의 균형 감각은 좋은 편이라 배수관 위에서 움직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았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
늦은 저녁, 카드리고의 충직한 집사 토마스는 다시 린 도체스터를 가둔 지하로 향했다.
카드리고 저택의 지하 창고는 원래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사람을 가두고 고문할 필요가 있을 때 사용되던 장소였으나, 이후에 개조되어 죽은 둘째 도련님 미카엘의 전용 교육실로 쓰였다.
그리고 그가 죽은 지금은 완전히 방치되다시피 해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겁 없는 벌레 하나를 처리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카드리고 가문의 셋째 도련님 라파엘은 현재 사라진 린 도체스터를 찾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집사인 토마스를 의심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는 카드리고의 고용인들을 다그치다가, 린 도체스터가 카드리고 저택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거짓 진술을 듣고 잔뜩 열이 오른 얼굴로 외출했다.
툭!
툭…!
그렇게 지하로 향하는 비밀 통로로 들어가 린 도체스터가 있는 곳에 도착하자마자 또다시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처럼 돌멩이를 던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러나 일부러 상대를 교란시키려는 듯이 사방으로 소리를 흩뜨려 놓던 아까와 달리, 지금은 계속 같은 방향에서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번에는 토마스를 유인하려는 속셈인지도 몰랐다. 토마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사냥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로 다가갔다.
그는 린 도체스터를 오늘 당장 죽일 마음은 없었다. 그러기에는 감히 주제도 모르고 카드리고 가문의 귀하신 도련님을 탐낸 버러지가 너무 괘씸했다.
하여 린 도체스터에게 최대한의 좌절과 절망을 맛보여 준 뒤, 후회 속에서 죽어 가게 만드는 것이 토마스가 원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가스 같은 것을 살포해 린 도체스터를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 가게 하는 것도 생각해 봤으나, 혹시 저택의 사람들이 있는 위쪽으로 공기가 샐 수도 있으니 좋은 방법은 아니었다.
그러니 일단은 린 도체스터가 가지고 있는 총알이 전부 다 떨어질 때까지 쥐 몰이를 하듯이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팔다리의 힘줄을 하나씩 끊어 진짜 벌레처럼 바닥을 기게 해 줄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에 숨이 끊어질 때까지 갖가지 고통을 맛보게 해 줘야지.
토마스도 린 도체스터가 중앙 비밀 기관인 스텔라에서 미카엘의 뒤를 이어 도살자라 불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저렇게 가냘픈 체구를 가진 어린 여자가 미카엘 만한 무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대주교 도체스터의 후광을 입어 얻어 낸 허울뿐인 이름일 것이 분명했다.
아까 보니 사격 솜씨가 그럭저럭 쓸 만한 것 같긴 했으나, 그건 특별한 재주 축에도 들지 못했다.
툭…!
탕!
그렇게 생각하며 집사 토마스는 린 도체스터가 숨어 있는 곳으로 예상되는 기둥 뒤쪽에 위협 사격을 했다.
이후 잠깐 동안 주변이 조용해졌다가, 곧 다시 작은 돌멩이 같은 것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토마스는 다시 총을 발포하면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이번에는 린의 모습이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젊은 시절 용병 생활을 했던 토마스는 다른 사람보다 오감이 놀랍도록 발달해 있었다. 밤눈도 몹시 밝은 편이라, 아까도 린 도체스터의 움직임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리 살펴봐도 그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직감이 본능을 일깨우지만 않았다면 그는 멍청하게 방심하다가 총알에 머리를 꿰뚫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타앙…!
미세한 공기의 파동을 느끼고 고개를 비트는 순간,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며 지나간 총탄에 관자놀이가 찢어져 피가 튀었다.
총알이 날아온 것은 위쪽이었다. 빗맞힌 것이 아쉬웠는지, 위에서 ‘칫!’ 하고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탕, 탕, 타앙!
토마스도 총구를 들어 올려 연사했다. 꼭 쥐가 천장을 뛰어가는 것처럼 가벼운 발소리가 위쪽에서 들려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한 발 정도는 맞출 생각이었는데, 린 도체스터는 정말 쥐새끼라도 되는지 잘도 총알을 피해 움직였다.
오히려 토마스가 쏜 총알이 배수관을 관통하면서 더러운 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이 순간적으로 그의 시야를 가렸다.
철컥!
하필이면 그때 총알이 떨어졌다. 그리고 토마스가 총알을 보충하기 전에,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대뜸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어딜…!”
토마스는 들고 있던 총으로 자신의 위로 뛰어내린 사람을 후려쳤다. 그러나 린은 들고양이처럼 가볍고 날렵한 움직임으로 허공에서 몸을 틀어 총을 든 토마스의 손목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뼈가 어긋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토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쪽 팔꿈치로 린의 턱을 가격했다. 그러나 무슨 조화인지, 그녀는 토마스의 팔이 닿기 전에 다시금 가볍게 허공으로 떠올라 토마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퍼억!
“큭!”
그리고 다음 순간 린의 무릎에 세게 차인 토마스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린은 배수관 밑으로 내려온 덩굴 식물을 손에 감아 허공에 매달린 채 다시 자신에게 날아든 집사 토마스의 공격을 피했다. 그러고 나서 다시 한번 그가 들고 있는 총을 걷어차 멀리 날려 보냈다.
“이… 쥐새끼 같은 계집이!”
설마 이런 식으로 린 도체스터가 자신을 상대로 근접전을 시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방심했던 토마스가 이번에는 정말 진심으로 린을 제압하려 마음먹고 몸을 움직였으나, 린이 조금 더 빨랐다.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이 순식간에 집사 토마스의 목을 휘어 감았다. 그러고 나서 린이 체중을 실어 바닥으로 뛰어내리자, 반대로 토마스의 발뒤꿈치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허억…!”
토마스는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올가미를 손으로 붙잡았다. 그것은 생각 이상으로 질기고 튼튼했다.
린도 토마스를 진짜 죽일 생각은 아니라, 일단 기절만 시킬 생각이었다. 집사가 죽으면 밖으로 나갈 통로를 찾는 데 애를 먹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 거 아저씨, 되게 버둥거리네…!”
카드리고의 집사 토마스는 육안으로 보이는 만큼 실제로도 근육의 총량이 엄청난지 굉장히 무거웠다. 그래서 그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반대로 위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까지 악물며 힘을 써야만 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버둥거리던 토마스의 몸이 서서히 둔해지기 시작했다.
린은 그의 움직임이 거의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완전히 질식하기 전에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러자 줄기에 매달려 허공에 떠 있던 토마스의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해치웠나?’
린은 토마스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그를 묶어 둘 생각으로 다가갔다. 가까이 접근해도 토마스는 쥐 죽은 듯이 움직임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적의 부활 신호로 쓰이는 불길한 대사를 방금 속으로 읊은 것을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퍽!
“윽…!”
바닥에 얌전히 엎어져 있던 토마스가 갑자기 팔을 휘둘러 린의 옆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한 것이다. 오죽 힘이 셌던지, 린은 골이 뒤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단숨에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리고 ‘린 도체스터’가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