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심쩍은 마음에 손을 움직여 소년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그런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리자 왠지 조심스러운 마음이 들어서, 너무 닿을 듯 말 듯한 정도로만 손을 댄 것 같았다. 지나치게 미세한 접촉에 별다른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서, 내 손가락이 소년의 어깨를 통과한 건지 아닌 건지 영 아리송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소년의 눈매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리고 뒤이어,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거짓말처럼 내 쪽으로 미끄러졌다.
‘……!’
거의 동시에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끼고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탕!
타앙…!
두 발의 총성이 찰나의 간격을 두고 연달아 울렸다. 한 발은 내 것, 한 발은 나를 공격한 사람이 발포한 것이었다. 수상한 기운을 감지하고 바로 몸을 움직인 덕분에 내게 날아온 총알은 종아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쏜 총알도 목표물을 빗나갔다.
그 직후, 가만히 서 있지 않고 곧바로 뛰었다. 역시나, 나를 기다리지 않고 다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맞은 건 없었지만, 그래도 조준해 오는 게 비교적 정확한 걸 보면 아무래도 저쪽에서는 내 움직임이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았다.
탕!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몸을 옆으로 굴린 뒤 방금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대응 사격을 했다. 이번에도 목표물에 명중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잠깐 사격이 멈췄다.
발포할 때 한순간 빛이 번쩍인 덕분에 눈에 띈 근처의 기둥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뭐야, 집사 아저씨 원거리 저격수야?
아까 벽을 두드려 보고 지하의 방음이 잘될 것 같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위에는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한데 이렇게 총을 막 쏘다니! 성격이 대범한 건지, 아니면 그만큼 날 죽이고 싶어서 눈이 뒤집힌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하기야 내가 라파엘의 손님인데도 이 저택 안에서 없앨 마음을 먹고, 그걸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것부터 범상치 않긴 했다.
“오늘 라파엘 도련님께 건방지게 굴었다고 들었습니다.”
속으로 집사를 욕하며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뒤적이는데, 이번에도 가까운 거리에서 또 다른 환영이 어른거렸다.
“미카엘 도련님이 오늘 이곳에 불려오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본인 입으로 한번 직접 말해 보십시오.”
이번에는 어딘가 스산한 분위기 속에서 어른인 남자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남자의 써늘한 물음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소년이 시선을 내리깐 채 조용히 대답했다.
“라파엘의 손을 뿌리쳐서 다치게 하고… 미카엘 카드리고로서 해서는 안 될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지요?”
“지금은 제 처지가 라파엘보다 못하지만 그렇다 해서 내키는 대로 저를 무시하고 함부로 할 권리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하…. 참,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를.”
기가 찬 듯한 메마른 음성이 어두운 지하에 스몄다. 그렇게 유쾌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웃음소리를 흘리던 남자가 돌연 손에 무언가를 쥔 채 벌떡 일어났다.
“내가…!”
짜악!
“카드리고의 은혜를, 마음 깊이 새기며 늘 낮은 자세에서 엎드려 살라고, 그렇게!”
짝!
“그렇게 입이 닳도록 말했는데!”
소름 끼치는 파열음이 재차 이어졌다. 남자가 들고 있는 게 회초리인지 채찍인지, 위치상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남자는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소년에게 계속 팔을 휘둘러 체벌을 가했다.
“그런데 감히 귀하신 분께 상해까지 입히고 그따위 개소리를 지껄여? 당신 때문에 내가 얼마나 난처해졌는지 압니까? 이래서 카타콤 출신 따위는 억지로라도 맡는 게 아니었는데! 애초에 만들어진 목적도 이루지 못하고 하등 쓸모도 없는 쓰레기가 되어 무덤에 버려진 폐품 주제에 어딜 건방지게…! 지금의 당신은 카드리고의 부속물일 뿐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이것이 지금 실제로 내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혹독한 매질에 나도 모르게 가방에서 막 무언가를 찾아 꺼내던 손을 멈추고 말았다.
소년은 용케도 작은 신음 한번 내지 않았다. 남자는 그게 더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아직도 카타콤에 가기 전의 옛 시절을 잊지 못한 모양인데, 자신의 입장이 어떤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면 오늘에야말로 확실히 새겨 드리겠습니다.”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얼굴을 우그러뜨리며 가방에서 꺼낸 것을 어둠 속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섬광탄이 터지면서 한순간 시야가 확 밝아졌다.
시스템 로딩이 계속 오류로 멈춰 있어, 아이템 창에서는 부피가 작은 물건만 꺼낼 수 있었다. 개중에 쓸 만한 게 없나 찾다가, 레드포드 저택에서는 쓸 일이 없어 여분으로만 가지고 있던 섬광탄을 하나 발견했다. 덕분에 집사의 움직임과 지하실의 구조를 대강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타앙!
내가 쏜 총알이 소년을 때리는 남자의 몸을 관통해 날아갔다. 그 순간 환영은 사라졌고, 나도 그 틈에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는 옆쪽의 다른 기둥 뒤로 재빨리 이동했다.
재수가 없게도 이 지하는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몸을 은폐할 만한 곳은 천장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거의 다인 듯했다. 여기는 평소에 관리를 잘 하지 않는 곳인지, 천장과 기둥을 타고 내려온 이상한 덩굴 식물 같은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 군데군데 바닥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래도 방금 내가 쏜 총알은 집사한테 살짝 스치기라도 한 것 같은데.’
나는 기둥 뒤에 숨어 주머니에 넣어 둔 파편 조각을 꺼내 던졌다. 그것이 어딘가에 부딪혀 소리를 내는 것과 동시에 총성이 울렸다. 나도 바로 집사가 있는 위치와 거리를 가늠해 저격했다.
타앙! 탕!
용병 출신이라고 하더니, 집사는 쓸데없이 반응 속도가 빨랐다. 내가 발포하자마자 그 뒤를 쫓아 날아온 총알이 내 손목을 빗맞고 지나갔다. 피부가 얇게 찢기며 피가 조금 튀었다.
그러고 나서 또 잠깐 어두운 지하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나는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또 멈춘 건가? 총알이 떨어진 것 같지는 않은데.’
어째서인지 집사는 아까부터 계속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사격할 뿐, 나한테 가까이 접근하려 하지 않았다.
근접전을 꺼리는 건 아닌 것 같았고, 그렇다 해서 원거리에서 적극적으로 총을 쏴 나를 바로 죽이려 하지도 않았다.
생각해 보면 집사는 처음부터 치명상을 입힐 만한 급소가 아니라 다리나 팔 쪽을 노려 저격하고 있었다.
꼭 사냥감인 쥐를 구석으로 몰며 가지고 놀려 하는 성격 나쁜 고양이 같은 행동이었다.
어쩌면 나를 이런 어두운 밀실에 가둔 뒤 초조함과 불안감에 질식하게 만들어 서서히 말려 죽이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성은 충분히 했습니까?”
그렇게 내가 집사의 동향을 살피는 동안에도 환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셋째 도련님께서 미카엘 도련님을 그만 용서해 주겠다고 하셨으니 감사하게 여기십시오. 내일 의복을 정갈히 한 뒤 다시 밖으로 내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때 라파엘 도련님께 직접 사죄드리십시오.”
몇 날 며칠 동안 이 지하에서 계속 맞기만 한 건지, 소년은 못 봐 줄 정도의 몰골이 되어 있었다.
가뜩이나 집사를 상대하느라 바쁜데 환영까지 더해지니 주의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하필 소년은 내가 등을 기댄 채 몸을 숨긴 기둥 바로 옆에 나타났다. 그는 차가운 맨바닥에 누워 잠든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아까부터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환영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이번에는 슬쩍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무래도 여기는 죽은 미카엘 카드리고가 교육을 받거나 잘못을 저질러 체벌 당할 때마다 오던 곳인 듯했는데, 그럼 혹시 이 환영은 미카엘 카드리고의 원념 같은 것인가 싶었다.
물론 지금 이게 내 눈앞에서 실제 라이브로 벌어지는 일이 아니란 건 알았지만, 그래도 차가운 맨바닥에 누워 있는 열다섯 살가량 된 어린애가 조금 불쌍하기는 했다. 그래서 인상을 쓴 얼굴로 작게 혀를 차다가 거의 충동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소년의 몸은 온통 상처투성인 반면 얼굴만큼은 멀쩡했다. 하여 머리에 살며시 손을 댄 순간, 실제로 느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으와, 씨. 뭐야? 또 촉감이 느껴지잖아?
역시 아까 느낀 감각도 착각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움직이는 루트를 따라서 여기서 번쩍 저기서 번쩍 나타나는 걸 보면 환상이 분명한데, 왜 이 소년만 이렇게 생생하게 만져지지?
잠든 줄 알았던 소년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얼른 그에게 닿았던 손을 뗐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안광으로 반질거리는 눈이 꼭 사람이 아니라 짐승의 눈 같았다.
“너… 지금 거기에 있지?”
그리고 소년의 입술이 작게 달싹였다. 꼭 귀신이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뒷덜미가 섬찟해졌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야?”
너 같으면 하겠냐? 팔에 닭살이 돋는 것 같은 느낌에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져서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타앙…!
‘에이 씨, 진짜!’
하지만 그 순간, 조금 전과 다른 방향에서 총알이 날아와서 결국 다시 원래 자리로 원상 복귀해야만 했다.
“…무덤 출신에게는 그릇을 잃고 방랑하는 영혼들이 많이 꾀인다고 들었는데, 정말인가.”
소년이 혼자 읊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손에 쥔 작은 파편들을 아까처럼 옆으로 내던졌다.
처음에는 짧게, 그다음에는 좀 더 멀리, 실제로 내가 자리를 옮겨 이동하는 것처럼 들리게 시간차 전략을 사용했다. 이쪽은 최대한 총알을 아끼고, 집사 쪽은 빨리 총알을 전부 소진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집사는 처음에는 내 계획대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저격하다가, 이내 내 생각을 읽었는지 더 이상 총을 발포하지 않았다.
“흙이나 파먹던 쥐새끼답게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군.”
잠시 후, 나지막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