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택 안내?”
“원래 카드리고 가문에 방문하시는 손님께 저택을 선보이는 건 오랜 관례가 아닙니까?”
집사는 라파엘이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말을 이었다.
“이 토마스, 카드리고 가문의 집사로서 저택에 방문한 손님을 소홀히 대접할 수 없습니다. 주인어른께서도 카드리고의 손님께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은 것을 알게 되면 나중에 경을 치실 겁니다.”
누구보다도 예의 없는 살의를 속으로 품고 있는 주제에 겉모습만큼은 충직하고 품위 있는 집사 그 자체였다.
“특히 린 도체스터 님은 라파엘 도련님께서 존경하시는 릭 도체스터 대주교님의 양녀가 아니십니까? 그러니 더욱이 성심성의껏 카드리고의 품격을 보여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흠, 듣고 보니 그건 그렇군….”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단호하던 라파엘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난 저 음흉한 집사가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한다 싶었는데, 라파엘은 대주교의 딸랑이답게 릭 도체스터의 이름을 듣고 갈등을 느끼는 듯했다.
그리고 기어이, 라파엘이 갈대처럼 마음을 바꿨다.
“그래, 잠깐 저택 안내를 하는 것 정도는 괜찮겠지. 따라와라, 린 도체스터.”
야, 야…! 네가 너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위험하다며? 너 그 말 한 지 아직 1분밖에 안 됐거든?
“선배님, 조금 전에는 저한테 내일까지 이 방에만 있으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나와 함께 있으면 괜찮다.”
뭔…. 이건 논리도 없고 맥락도 없고.
나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라파엘을 쳐다봤다.
“전 그냥 방에 있고 싶은데요.”
“카드리고에는 카드리고의 규칙이 있는 법. 손님께서는 사양하지 마십시오.”
집사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여전히 정중한 척했지만, 집사의 눈에 서린 안광은 스산했다.
이건 뭐, 꼭 집안에서 금이야 옥이야 곱게 자란 꽃 같은 아가씨를 지키는 충성스러운 집사 같은 모습이었다.
…잠깐, 이렇게 묘사하니까 쓸데없이 좀 로맨틱한 느낌인데. 무슨 여성향 역하렘 게임 속 캐릭터도 아니고. 그냥 금지옥엽 아들내미가 어느 날 여자친구라면서 데려온 여자가 못마땅해서 김치 싸대기를 날리기 직전의 시어머니 같다고 하자.
물론 나는 라파엘의 여자친구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지금 이곳에서 내가 날파리 취급을 받는 건 확실했다.
“아, 예에. 뭐, 저도 유서 깊은 카드리고 저택이 궁금하긴 하네요.”
나는 속으로 조금 구시렁거리다가, 그냥 자리에서 일어났다.
퀘스트가 이미 시작되었으니 카드리고 저택에 있는 동안 집사의 공격이 들어올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어차피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라파엘이 있을 때 집사에게 손을 쓰게 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이해는 안 되지만 라파엘은 내 안위를 신경 쓰는 듯했으니까 집사가 허튼 짓거리를 하려고 하면 막으려 하지 않을까? 라파엘, 이 누님은 너만 믿는다.
“갑시다. 저택 구경 재미있겠네요, 네.”
나는 도체스터 저택에서 가져온 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멨다.
“그 가방도 가져가실 겁니까? 귀중품이라면 방을 비우시는 동안 따로 보관하겠습니다.”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가지고 있어야 편해서요.”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라파엘에게서 날 떼어 놓으려고 흉악한 짓까지 할 마음이 한가득인 사람들한테 어떻게 무기를 맡기나.
집사는 내 가방을 다시 한번 힐끔 보았을 뿐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이것까지 가져가지 못하게 하면 내가 라파엘을 붙잡고 늘어져 방에 처박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거나, 내가 뭘 가져가든 쉽게 제압할 수 있다고 생각해 상관없다고 여긴 걸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한테는 잘된 일이었다.
“그럼 가시지요. 저택 구석구석을 손님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걸어가 문을 연 집사가 입꼬리를 끌어올려 친절한 미소를 지으면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그 미소 뒤로 내게 따라붙는 섬뜩한 시선을 느끼며 방을 나섰다.
***
“이곳은 카드리고의 27대 주인이셨던 리세르비앙 카드리고 님께서 생전에 사용하신 침실입니다. 리세르비앙 님은 당시 설립된 세계 공통 평화 연합에서 최고 위원장을 역임하셨으며….”
나는 아까부터 길게도 이어지는 집사의 설명을 멍하니 흘려들었다.
“이곳은 리세르비앙 님께서 세계의 단결과 결속을 위해 하급 세계의 대표 위원회에 보낼 서신을 직접 작성하셨던 서재로, 책상에는 그때 사용하셨던 사파이어 블루 색 잉크와 겨울 서리 나무 만년필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습니다. 이는 리세르비앙 님의 업적을 기리며 지금까지도 본국에서 사랑받고 있는 애장품이지요.”
카드리고의 저택을 소개하는 게 전통이라고 하기에, 난 또 개방된 화랑이나 홀, 혹은 저택의 유서 깊은 물건이 보관된 방 정도나 보여 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내 생각보다 너무 본격적이었다.
저택이 워낙 넓으니까 아예 선조들이 살던 방을 이런 식으로 유지해 놓는 거구나….
난 역사가 긴 귀족 가문에 이런 전통이 있다는 걸 생전 처음 알았다.
원래 있던 곳에서 위인이나 유명인의 집을 뫄뫄뫄 생가, 이렇게 이름 붙여 관광지로 삼는 건 자주 봤었지만 이건 결이 달랐다.
“다음은 카드리고의 30대 주인인 소피아나 님의 장녀이시자, 비록 차기 카드리고의 주인은 아니셨지만 의학 및 과학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몸 바쳐 오늘날 본국 신민들의 평균 수명을 300세까지 늘리는 데 기여하신 니시에라 카드리고 님의 연구실을….”
집사는 벌써 일곱 개째 방을 순회하며 내게 역대 카드리고 주인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게다가 단순히 그들이 사용했던 방을 구경만 시켜 주는 게 아니라, 방 주인의 업적과 생애 등을 구구절절 자세히 늘어놓기까지 했다.
나는 급격히 인지 부조화가 오는 것 같았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사실 저 사람은 집사가 아니라 박물관 도슨트인가…?
이쯤 되자 혹시 집사가 정말 순수하게 자신이 종사 중인 카드리고 가문의 자랑을 나한테 하고 싶었던 게 아닌지 의심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는 내 호적이 올라가 있는 도체스터 가문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데, 쓸데없이 카드리고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강제 입력 당해야 하다니….
쓸모없는 TMI에 차게 식은 눈으로 라파엘을 쳐다봤으나, 그는 언제 나한테 지나친 관심을 보였느냐는 듯이 집사의 설명에 심취해 있었다.
“집사의 말이 맞다. 카드리고가 본국에 기여한 공로가 작지 않지.”
“아, 예.”
“린 도체스터, 카드리고가 왜 귀족 중의 귀족이라 불리는지 이제 알겠나?”
“으음.”
“이렇게 직접 카드리고의 역사를 눈과 귀에 담을 수 있다니, 영광인 줄 알아라.”
뭔, 이딴 거지 같은 소리나 씨불이고 말이다.
“라파엘 도련님.”
그렇게 내 인내심이 간당간당해져서 차라리 집사에게 먼저 총질이든 뭐든 하고 싶어졌을 무렵, 누군가가 라파엘을 부르며 나타났다.
집사의 설명이 잠시 멈추고, 라파엘은 불청객을 보듯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가온 고용인은 집사를 한번 쳐다보더니, 라파엘에게 말했다.
“주인어른께서 보내신 사람이 1층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파엘 도련님께 직접 전해야 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지금?”
“예, 반드시 지금 당장 얼굴을 뵙고 말씀을 전해야 한다고 합니다.”
고용인이 단호한 목소리로 강경하게 말했다. 그에 라파엘이 멈칫했다.
고용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어 내게는 라파엘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에게서 망설임이 담긴 목소리가 흘러나오는가 싶었다.
“린 도체스터의 옆에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아버님께서 내게 급히 하실 말씀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뭐, 인마?
나는 너무도 쉽게 끝난 그의 갈등에 황당해졌다.
집사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라파엘에게 말했다.
“아직 손님께 소개해 드릴 마흔여덟 개의 방이 남아 있습니다. 최대한 간추려도 네 개의 방은 더 보여 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손님께서 카드리고 저택에 다녀가셨다고 말할 수 있지요.”
“린 도체스터. 금방 돌아올 테니 너는 카드리고의 위대한 역사를 마저 숙지하고 있도록.”
그런 뒤 라파엘은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훌쩍 자리를 떠났다. 나는 또 한 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뭐야?”
나한테서 절대 안 떨어지려고 할 줄 알았더니, 이놈이 한 입으로 두말하네?
“린 도체스터 님, 그럼 다음 장소로 가시지요.”
순식간에 휑해진 복도에 집사의 정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는 내게 필요 이상의 관심은 없는 듯이 짧게 닿았던 시선을 떼고 먼저 앞서 걸었다.
현재 상태: 강한 적대감과 살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