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36)화 (136/300)

체스휘는 조금 전 아이들의 대화에 나왔던 이름을 떠올렸다. 그러자 라파엘이 그의 명령을 잘 수행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라파엘은 지금쯤 린과 함께 있을지도 몰랐다.

저택 밖에서 수족으로 부릴 만한 사람이 없어서 아쉬운 대로 라파엘을 복구시켜 돌려보내기는 했지만, 시간이 없어서 대충 손을 봤더니 상태가 영 예전 같지 않았었다.

하지만 아마 그런 라파엘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아무래도 린은 스텔라의 명령을 받고 주말 동안 본국으로 귀환한 듯했는데, 체스휘가 보기에는 그녀의 상태 역시 어딘가 이상했다. 그러니 혹시라도 누군가 린에게 오류가 생긴 것을 알아차린다면 위험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원래 린의 주인이었던 자에게 그녀의 소유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아직은 감춰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가 직접 동행해서 움직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지금은 레드포드 저택에서 출입이 자유롭지 않은 상태였으니….

하여 차선책으로나마 라파엘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래도 안전장치가 하나라도 있는 게 낫겠지.’

비록 둘 다 비교하기 어려운 썩은 물일지라도, 이 시점에서는 도체스터보다 카드리고가 린에게 조금이라도 덜 해로울 터였다. 그곳은 라파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개미굴이었으니.

그러나 만약 라파엘이 명령한 대로 제대로 린을 보호하지 못해서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쓸모없는 것은 폐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기껏 되살렸으니 최대한 오래 써먹고 싶긴 한데….”

“체스휘, 지금 뭐라고 했어?”

“오늘 날씨가 좋네요.”

체스휘는 그의 혼잣말을 들은 듯이 물어오는 미뉴엘을 돌아보면서 빙긋이 웃었다.

그 모습은 방금까지 다소 냉담한 생각을 하던 사람답지 않게 무해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데 2호실 형은 7호실 누나 좋아해?”

그때, 체스휘를 향해 갑자기 4호실의 레오가 돌발 질문을 던졌다. 체스휘는 당황하지도 않고 여전히 웃는 낯으로 반문했다.

“그래 보여요?”

“응, 계속 옆에 붙어 있잖아. 눈에 안 보이면 찾아다니고.”

“맞아. 듣고 보니 그러네. 혹시 둘이 사귀어?”

“아니야…!”

바로 그 순간, 다이안이 펄쩍 뛰면서 거의 발작하듯이 소리쳤다.

“린이 예쁘고 착하고 좋은 사람이니까 혼자서 짝사랑하는 거지! 린은 저어어어어얼대! 2호실 양육자 안 좋아해!”

다이안은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듯이 씩씩거리면서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나섰다. 오죽 그 기세가 맹렬한지, 옆에 있던 아이들이 왜 네가 그렇게 난리냐고 야유할 정도였다.

“나 왔어! 교대 시간 안 늦었지?”

“아, 딱 맞춰서 왔네요.”

마침 올리비아가 문을 벌컥 열고 방으로 들어왔다. 체스휘는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섰다.

밝은 햇볕이 오늘따라 레드포드 저택을 환하게 물들였다. 역시 지금 린의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면 좋았을 텐데, 그럴 여건이 되지 않아 아쉬울 뿐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대신 그는 린이 없는 동안 최대한 깨끗이 저택 청소를 해 두면 되니까.

“흠, 어느 쪽을 고를까요. 알아맞혀 보세요.”

복도에 멈춰 선 체스휘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마지막에 멈춘 방향을 보고 아하, 하고 소리 냈다.

“이쪽인가.”

이윽고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등 뒤에 둔 채 콘라드의 연구실로 향하는 체스휘의 걸음은 산책을 가듯 가볍기만 했다.

***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나는 손님방으로 돌아와 고용인들이 내준 차를 눈앞에 두었다. 라파엘은 아까 본 사진에서처럼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태연히 먼저 찻잔을 들어 올렸다.

“뭘 멀뚱히 보고 있는 거지? 마셔라.”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라파엘을 보다가, 잠시 후 그를 따라 앞에 놓인 차를 맛보았다.

시스템 창을 주의 깊게 관찰했으나 아무것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혹시 나를 죽일 의욕이 충만한 집사가 차에 독이라도 탄 게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그건 너무 대놓고 독살이긴 하지. 이래 봬도 내가 대주교의 수양딸인데, 꽤나 명망 있는 가문인 듯한 카드리고 저택에 손님으로 왔다가 독살당했다고 하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충직한 집사라면, 최대한 사고사로 꾸미려 하지 않을까?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차를 홀짝거렸다. 그러면서 가늘게 뜬 눈으로 맞은편에 앉은 라파엘을 힐끔 쳐다봤다.

‘있잖아, 너희 집 집사가 나를 죽이려고 하는 거 너도 아니?’

집사의 음흉한 속내를 모조리 까발리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소리를 해 봤자 라파엘이 내 말을 믿을까 싶었다.

그래도 오늘 만난 라파엘은 대주교와 만났을 때도 그렇고, 이상하게 내게 도움을 주는 쪽으로 행동하는 듯했으니까…. 나는 이번 퀘스트에서 이 녀석이 나한테 어디까지 도움이 될지 속으로 가늠해 보았다.

혹시 집사가 나를 죽이려고 할 때 그걸 목격한다면 라파엘이 중간에서 어느 정도 완충 작용을 해 줄 수 있을까? 또 만약 내가 대응하는 과정에서 집사에게 심한 상해를 입혀도 나한테 책임을 묻지는 않을까?

‘혹시 이 일이 릭 도체스터의 귀에 들어가면 또 ‘대주교와의 일 대 일 면담 2’가 잡히는 것 아니야?‘

어우, 그런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거리면서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애초에 육성 대상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해도 용인되는 배경이었던 레드포드 저택과 이곳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나도 이번 퀘스트를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고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모로스라면 그냥 총질해서 죽여 버리면 될 텐데, 상대가 라파엘의 가문에 속한 집사라서 더 애매했다.

“저녁 식사는 이 방에서 나와 둘이 들도록 하지.”

그렇게 내가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라파엘이 차를 마시다 말고 먼저 입을 열었다.

“고용인들에게도 미리 말해 둘 테니 식당으로 내려올 필요 없다. 내일 본국을 떠날 시간이 될 때까지 최대한 밖에 나오지 말고 이 방에만 있도록.”

그런데 이 녀석은 꼭 나한테 살해 위협이 있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마치 나를 과잉보호하려는 듯한 소리를 해서 내 안의 의문을 키웠다. 어차피 지금은 둘이 있으니 그냥 바로 물어봐야겠다 싶어서 나는 들고 있던 찻잔을 탁 소리 나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선배님, 오늘 유독 저한테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정말 아무 일도 없으셨나요?”

“없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요. 아까 ‘너를 내 가까이에 두라고 내 안 깊은 곳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라고 하셨죠?”

“그래.”

“내일 다시 본국을 떠날 때까지 다른 곳에 갈 생각하지 말고 선배님 옆에만 붙어 있으라고도 했고요.”

“그렇다.”

“그거, 정확히 무슨 뜻인가요? 무슨 의도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는데요.”

내 직설적인 물음에 라파엘이 코웃음을 쳤다.

“역시 못 배워서 그런지 말귀를 한 번에 못 알아먹는군.”

이놈 자식, 너야말로 배울 만큼 배웠을 놈이 말버릇이 왜 그런 거냐?

나는 저절로 입술에 그려지는 썩은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라파엘을 향해 슬쩍 빈정거렸다.

“대주교님이 들으시면 상당히 서운해하시겠네요. 이래 봬도 도체스터 가문의 수양딸인데, 선배님은 저를 욕하는 게 대주교님을 욕보이는 것이란 사실을 너무 자주 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뭐? 내가 언제 대주교님을 욕보였다는 거냐!”

역시나 대주교의 딸랑이답게 라파엘은 내가 릭 도체스터를 입에 올리자마자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곧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이 얼굴을 구기며 내 말에 반박했다.

“네가 사교 용도로 길러지지 않았다는 건 본국의 모두가 안다. 그러니 네 무식은 대주교님이 아닌 너 스스로의 부족함 탓이지. 따라서 나는 절대 대주교님을 욕보인 게 아니다.”

라파엘은 뚫린 입이라고 또 되는 대로 입에서 똥을 쌌다. 하지만 그는 내가 또 거기에 꼬투리를 잡아 빈정거리기 전에 내 물음에 답했다.

“내가 한 말은 표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위험하니까 레드포드로 돌아갈 때까지는 내 옆에 있으라는 의미다.”

“도대체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요?”

“전부 다. 이 본국에서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게 네게 위험하다.”

“선배님은 안 위험하고요?”

“나는 괜찮다. 너를 지키라고 내 머릿속에서 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아, 예….

진짜 명령어가 입력된 AI처럼 말하네. 만약 이게 컨셉질이면 참 독특한 취향이었다.

나는 찻잔 받침의 테두리를 손가락으로 의미 없이 건드리며 내 앞에 앉은 사람을 탐색하듯이 주시했다.

“얼마 전에 선배님이 레드포드 저택에 왔을 때, 온몸이 진흙투성이였잖아요. 왜 그러신 건가요?”

“비가 와서 그랬다고 말하지 않았나.”

“누군가와 싸운 것 같은 흔적이 있던데요.”

“누군가와 싸우….”

그 순간 라파엘이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싸우, 지, 지, 지, 지 않았다.”

응…? 방금 꼭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소리가 이상하지 않았나?

“싸우지지지지 않았다고요?”

“그렇다.”

“그래요? 그럼 스텔라 임무 때문에 다치신 건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아까 집사와 나눈 이야기를 들어 보니 한동안 연락 두절 상태였다고 하던데. 그동안 제가 임무 상황을 보고할 때도 답변을 주신 적이 거의 없었지요. 이건 직무 유기 아닌가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선배님… 지금 상태 이상한 거 아시죠?”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나는 찡그린 눈으로 라파엘을 쳐다봤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파엘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확신이 굳어졌다.

똑똑.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타이밍이 좋다고 해야 할지, 안 좋다고 해야 할지, 마침 그때 집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라파엘과 내 옆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지요. 혹시 더 필요하거나 불편하신 부분은 없으십니까.”

너요, 집사 아저씨.

“없다. 린 도체스터와 단둘이 있고 싶으니 지금부터 아무도 방 안에 들어오지 말도록.”

그리고 라파엘이 나 대신 대답하는 순간, 흰 장갑을 낀 집사의 손등 위로 조용히 핏줄이 솟는 것을 나는 목격했다.

“도련님, 그러지 마시고 손님께 저택 안내를 해 드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온화하게 꾸며 낸 집사가 권유한 내용을 듣고 나는 퍼뜩 눈이 뜨이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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