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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27)화 (127/300)

역시 라파엘은 재수가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다른 때보다 그가 덜 까칠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이었던 게 분명했다.

라파엘은 나를 깔보듯이 한번 코웃음을 친 뒤 먼저 멈췄던 걸음을 옮겨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를 들으며 조용히 서 있던 안내인 여자도 라파엘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아까처럼 우리보다 앞서서 걸었다.

나는 주먹을 부르는 라파엘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의 옆으로 따라붙었다.

퍽!

그리고 라파엘의 옆을 지나칠 때, 그의 무릎 뒷부분을 재빨리 발로 가격했다.

폼을 잡으면서 걷던 라파엘이 기습을 피하지 못해 볼썽사납게 휘청였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벌레가 붙어서 잡아드렸어요. 너무 고마워하지는 않으셔도 돼요, 선배님.”

내 태연한 대답에 라파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우그러진 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뒷짐을 진 채 그런 라파엘을 지나쳐 먼저 총총 걸어갔다.

“그런데 살짝 건드린 걸 가지고 그렇게 비틀거리시다니, 생각보다 몸이 허약하시네요.”

“뭐?”

“이러다가 본의 아니게 벌레 대신 선배님을 잡을까 봐서요. 요즘 훈련을 소홀히 하시는 게 아닌지 후배로서 염려가 되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이 갸륵한 후배의 마음을 선배님이라면 곡해 없이 알아주시겠지요?”

나는 라파엘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네 부실한 하반신이 매우 걱정된다는 양 측은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내 뻔뻔스러운 말에 라파엘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헛숨을 내뱉었다.

“린 도체스터, 네가 이런 하극상을 벌이고도 무사할 줄… 윽.”

그런데 돌연, 라파엘이 내게 분개한 얼굴로 무어라 말하다가 말고 갑자기 두통이라도 오는 것처럼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내가 ‘님, 역시 허약 체질 아님?’ 하고 한 번 더 깐족거리기 전에 라파엘은 금방 이마에서 손을 뗐다.

“하, 됐다. 너와 입씨름해 봤자 내 품위만 상하지.”

그는 순식간에 흥분이 가신 얼굴로 돌아와 나를 무시했다.

그런데 라파엘의 눈이 왠지 조금 이상했다. 정확히 뭐가 이상한지는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방금보다 총기가 흐려 보인다고 해야 할까?

내 말에 자극을 받은 듯이 날카로운 광채를 머금고 있던 눈이 지금은 어딘가 조금 탁해 보였다. 꼭 5호실 어린이인 세르쥬의 동태 눈하고도 살짝 비슷해 보이는 게, 왠지 영혼이 탈곡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린 도체스터. 곧 대주교님을 만나 뵐 텐데 긴장되지는 않나?”

그러나 태연히 화제를 바꾸어 말을 이어 가는 라파엘에게서 다른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만이라 조금은. 그래도 이렇게 다시 본국으로 돌아와 대주교님을 뵐 수 있어 기쁘네요.”

사실은 대주교를 만나기 위해 복도를 걷는 동안 꺼림칙한 기분이 점점 강해졌지만, 내색하지 않고 입에 발린 말을 했다.

“그래, 너도 알겠지만 대주교님의 앞에서는 항상 말조심해라. 오늘도 대주교님이 물으시는 말에 대답할 때 외에는 건방지게 먼저 입을 놀리지 말도록.”

라파엘은 그런 내게 또 알아서 주제 파악을 하라는 듯이 말했다.

“늘 그랬듯이 대주교님께 순종하며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행동해라.”

그런데 왠지 그의 말을 들을수록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용 자체는 지금까지 라파엘이 내게 해 오던 말과 비슷한데, 이상하게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왠지 그의 말에 은근히 암시된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꼭 라파엘이 단순히 나를 긁으려고 이런 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내게 당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재수 없는 놈이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여기까지인 것 같군.”

기묘한 느낌에 내가 라파엘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을 때, 그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어느 문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곳에도 정장을 입은 사람이 서 있었다. 나를 안내한 여자가 그에게 나를 인수인계하듯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뒤로 물러났다.

“린 도체스터 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대주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거대한 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방 안에 있는 사람에게 따로 허락을 구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었다. 방 안이 상당히 밝은지,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살짝 비껴 서 있던 내 발밑에까지 하얀빛이 번져 들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순백의 성전처럼 눈 부신 빛이 들어찬 방이 꼭 시꺼먼 개미굴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문 앞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독촉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라파엘을 힐끗 본 뒤, 그들을 지나쳐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경고! 위험 구역에 진입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44회차 게임을 시작한 이래로 처음 보는 위험 구역 알림이었다.

허공에 떠오른 경고 표시 너머로, 창가에 서 있는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입고 있는 옷은 성직자 복처럼 생겼으나, 특이하게도 검은색이었다. 창문을 보며 서 있던 남자가 몸을 돌리자, 라파엘보다 색이 짙은 순금 같은 머리카락이 빛을 퍼트리며 흐트러졌다.

“오랜만이구나, 린.”

귀를 파고든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몸을 바짝 곧추세웠다.

꼭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것처럼 손끝이 싸늘해졌다. 내가 삼키고 내뱉는 숨도 공기 중에서 얼어붙은 듯이 차게 느껴졌다.

대주교라는 말을 듣고 막연히 나이가 지긋한 중노년층을 생각했는데, 창가에 서 있는 사람은 깜짝 놀랄 정도로 젊었다.

아무리 많게 봐 줘도 30대 중반…. 그런데 빛 속에서도 유독 새까만 눈은 깊이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어, 그를 겉모습보다 훨씬 연륜 있는 자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이 남자가 대주교인 릭 도체스터였다.

그는 전체적으로 온화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이목구비가 섬세하고 선이 부드러운 얼굴이라 그런지, 언뜻 보면 마냥 유해 보일 정도로 곱상한 느낌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기이할 정도로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겼다.

은은한 미소를 띤 얇은 입술은 자세히 보면 다소 박정한 느낌이었고,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은 그를 위험한 사람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대주교 릭 도체스터를 보는 동안 스멀스멀 올라온 이상한 긴장감이 내 입술을 바싹 마르게 했다. 그런 나를 보던 릭 도체스터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왜 그러고 서 있는 거지? 이리 가까이 와라.”

▶new퀘스트: 대주교 릭 도체스터와의 일 대 일 면담

대주교 릭 도체스터와의 일 대 일 면담이 끝날 때까지 ‘린 도체스터’로서 알맞은 선택지를 고르시오.

세 번 잘못된 정답을 고를 시 퀘스트 실패.

※실패 페널티: 린 도체스터의 사망

※성공 보상: 린 도체스터의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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