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컹!
바로 그때, 무언가가 내 앞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육중한 무언가가 몹시 기민하게 움직여 그 주변으로 파장을 퍼트리듯이, 한순간 강한 바람이 눈앞에서 일어나 머리와 옷이 마구 나부꼈다.
덜커덩거리는 커다란 소리까지 귓전을 때리자 한꺼번에 눈과 귀가 동시에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걷으며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마침내 시각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흩날리는 낙엽 사이로 눈앞을 빠른 속도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검은 물체가 시야에 비쳤다.
지금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내 앞을 지나가는 건… 열차?
눈을 옆으로 움직여 그제야 주변의 풍경을 살폈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떤 승차역인 듯했다.
“린 도체스터 님.”
문득 등 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다.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인사하듯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바로 본 기관으로 돌아가시지요.”
***
스텔라에서 이렇게 직접 마중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시스템상 어떻게든 길 안내를 받을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래서 애초에 스텔라의 위치를 모르면서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생각보다 괜찮은 대우가 아닌가 싶었다.
아니… 이 경우에는 대우가 좋은 게 아니라, 혹시 감시받는 거라고 해야 하는 건가?
나는 남자의 안내를 받아 승차역 밖에 세워진 마차에 오르면서 힐끗 시선을 움직였다.
나를 마중 나온 남자는 시종일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를 대하는 태도는 정중하다면 정중했고, 사무적이라면 사무적이었다.
내 시선을 느낀 남자가 내리깔고 있던 눈을 들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언제 그를 탐색했냐는 양 몸을 움직여 좌석에 앉았다.
“목적지에 도착하시면 다른 안내자가 나올 겁니다. 그럼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남자의 역할은 여기까지인지, 그는 나와 함께 마차에 오르지 않았다. 그걸 보면 감시당한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이었나 싶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계속 찝찝하단 말이지.’
금방 나를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그런데 이런 말은 존 아저씨에게 좀 그렇긴 한데, 승차감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타던 마차와 굉장히 달랐다.
뭐 이렇게 미끄러지듯이 부드럽게 움직여? 꼭 빙판길 위로 썰매가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도로가 그만큼 잘 포장되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마차의 바퀴가 고성능이라서?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상위 세계 마차의 놀라운 승차감에 감탄하며 창밖의 풍경을 관찰했다.
눈앞에서 휙휙 지나가는 도시의 모습은 확실히 내 예상보다 세련되어 있었다.
빼곡하게 세워진 건물들은 제법 고층이라 할 수 있었는데, 레드포드 저택과는 건축 양식이 상당히 달랐다.
레드포드 저택이 중세 배경에 가까웠다면, 여기는 꼭 근대 세계 같았다.
‘하지만 가이드 같은 이상한 기술이 탑재된 물건을 사람 몸에 이식해 사용하는 걸 보면 완전 근대는 아니고… 스팀 펑크 같은 가상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애초에 딱 나눠서 구분 짓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상위 세계일수록 문명도 더 발달한 거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어쩐지 라파엘이 볼 때마다 하위 세계 사람들을 미개인 취급하며 무시하는 발언을 늘어놓던 것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게 얼마간 도로를 달리던 마차가 이윽고 멈춰 섰다. 혹시 목적지에 도착한 건가 싶었는데, 창밖을 살짝 확인하자마자 마차가 다시 움직였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도시의 중심부 같았다. 꽤 큰 도로 위를 달리는 마차들과 그 주변에 세워진 건물들, 그리고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활기가 멀리서도 느껴졌다.
내가 탄 마차는 어딘가의 거대한 정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중이었다.
열린 철문과 담벼락의 크기를 보니, 상당히 넓은 부지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잘 가꿔진 정원의 풍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로부터 또 10분 정도 이동했을까? 이번에야말로 정말 마차가 멈췄다.
“도착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넓으면 정원만 10분을 달리나 싶었는데, 정말 내 눈앞에는 기가 질릴 정도로 웅장한 건물이 솟아 있었다.
일단 저 건물의 정문 앞까지 이어진 계단만 몇 칸이냐….
“어서 오십시오, 린 도체스터 님. 대주교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이번에는 아까 승차역에서 보았던 남자처럼 정장을 차려입은 여자가 나를 맞이하러 나왔다.
그녀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자 이번에는 먼지 한 톨 없어 보이는 대리석 바닥이 나타났다.
파리조차 섣불리 내려앉았다가 호되게 미끄러질 것 같은 눈부신 하얀 대리석 위로 속세인의 발을 내딛자니 어쩐지 송구한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무시하려고 했는데, 이 기분은 도대체 뭘까?
이상하게 이 44세계에 도착했을 때부터 은근한 불쾌감이 심장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오르는 듯했다. 마차를 타고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런 느낌은 점점 더 강해졌다.
이토록 눈부신 회백색 건물을 눈앞에 두고 있는 지금은 더욱 기분이 나빠져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힘이 들어가려고 하는 미간을 때때로 의식해 반듯하게 펴야만 했다.
더군다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마주친 사람마다 이상하게 나를 보면서 수군거리는 것도 거슬렸다.
“린 도체스터, 다행히 늦지는 않았군.”
그렇게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눈에 익은 사람이 나를 부르며 다가왔다.
라파엘이었다. 그래도 안면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를 보자 조금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라파엘 카드리고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나를 마중 온 여자도 라파엘과 구면인지 그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라파엘은 평소처럼 재수 없는 표정으로 자신에게 인사하는 사람을 힐끗 쳐다보며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성직자 복은 역시 외근을 나갈 때의 위장이었던 걸까? 지금의 라파엘은 군청색의 세련된 정장을 입고 있었다. 생김새 하나는 워낙 훌륭해서 저런 옷을 입혀 놓으니 꼭 모델이나 배우처럼 보였다.
“지난번보다 얼굴이 좋아 보이시네요, 선배님.”
“흥, 확실히 구역질 나는 하위 세계의 공기를 맡지 않으니 살 것 같군.”
난 라파엘의 얼굴에 있던 멍이 다 빠진 걸 보고 한 소리였는데, 그는 내 말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보다는 그쪽 공기가 더 좋지 않나? 여긴 문명의 발달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라고 해야 할지 영 공기가 텁텁한데 말이다.
라파엘의 취향은 별났다. 아니면 상위 세계 사람으로서의 자부심, 혹은 오만함으로 인한 사고의 오류일지도 몰랐다.
“대주교님을 뵈러 가는 거냐? 모처럼이니 문 앞까지는 같이 가 주지.”
어쩐 일로 라파엘이 평소에는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던 친절을 발휘했다.
그렇게 나와 라파엘, 그리고 나를 마중 나온 여자 세 사람은 함께 대주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러다 어느 복도로 들어서자, 벽에 걸린 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곳에는 수많은 사람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레드포드 저택에서 보았던 화랑의 모습과 비슷했지만, 이 복도에 걸린 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라는 점이 달랐다.
그렇게 벽에 있는 사진들을 가볍게 훑으며 걷다가, 나는 어느 순간 시선이 닿은 사진 속의 얼굴에 멈칫했다.
하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이으며 라파엘에게 말했다.
“확실히 이렇게 오랜만에 본국에서 선배님과 함께 걷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아까 들어 보니 선배님도 오랜만에 기관에 방문하신 것 같은데, 그동안 많이 바쁘셨나요?”
“본국에 돌아온 게 오랜만이기는 하지. 그동안 나도 장기 임무가 있어서 외부에 오래 나가 있었다.”
“그러셨군요.”
나는 라파엘과 대충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뒤, 원래 목적이었던 말을 던졌다.
“이 복도를 선배님과 걸으니 카드리고의 다른 형제분들도 생각나네요.”
인물 정보를 봐도, 라파엘은 카드리고 가문의 삼남이라고 나와 있었다. 그러니 그의 위로는 최소 두 명의 형님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라파엘에게는 생각보다 민감한 주제였나 보다.
다음 순간 라파엘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곧이어 내게 미끄러진 그의 푸른 눈도 평소보다 기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런 얘기를 왜 꺼내는 거지?”
“그냥, 여기에 걸린 사진을 보니 떠올라서.”
나는 뒤쪽을 슬쩍 돌아보며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말하듯이 대꾸했다.
라파엘의 시선이 내가 눈짓한 곳으로 따라갔다. 이내 우리가 지나온 곳에 걸린 사진을 발견한 그가 알겠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혔다.
벽에 걸린 사진들 밑에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지금 내 옆에 있는 라파엘과 같은 성을 가진 젊은 남자가 유독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미카엘 카드리고.
저 이름 위에 걸린 액자 속에는 검은 머리칼과 주홍색 눈을 가진 잘생긴 남자가 있었다. 그는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일전에 지하실의 검은 문에 손을 대 레드포드 저택의 과거를 보았을 때 손님으로 만났던 바로 그 남자였으니까.
“린 도체스터, 경고하는데 다시는 내 앞에서 저 사진을 보고 카드리고를 운운하지 마라.”
그런데 라파엘의 냉소적인 반응을 보니, 그는 저 사람을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았다. 라파엘보다 나이가 살짝 많아 보여서 그의 두 형님 중 하나가 아닐까 싶었는데, 혹시 사이가 많이 안 좋나?
“왜, 대주교님의 밑으로 들어가 도체스터가 된 너처럼 운 좋게 카드리고의 이름을 가졌던 놈이라 관심이 가기라도 하나?”
라파엘이 팔짱을 낀 채 나를 비웃듯이 한쪽 입술을 비스듬하게 끌어올렸다.
“너와 나도 언젠가 저기에 이름을 올리게 되겠지. 나는 그렇다 쳐도, 야생 개인 너한테는 분에 넘치는 대우이니 영광인 줄 알아라.”
그런데 이 자식… 말본새가 또 왜 이러지?
라파엘의 조각 같은 얼굴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서 주먹이 움찔거렸지만,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세속적인 욕망을 간신히 참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