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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18)화 (118/300)

그때, 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굴욕적인 방식으로 체스휘에게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다. 꼭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방법밖에 배우지 못한 것 같았다.

도대체 그동안 그런 짓을 얼마나 많이 시켰기에, 그렇게 익숙하다는 듯이 말하던 건지….

그런 생각을 하자, 또 구정물 같은 불쾌한 기분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슬금슬금 차올랐다.

창문에 비친 보라색 눈이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급격히 저조해진 체스휘의 기분을 느낀 듯이 아직까지도 그에게 들러붙어 있던 유령이 파르르 몸을 떨었다.

체스휘에게 밀착해 있던 여인의 몸이 살짝 느슨히 떨어졌다. 물론 집요한 그녀의 성격상 이 정도 두려움에 완전히 체스휘에게서 손을 떼지는 않았지만,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체스휘는 고개를 돌려 계단 근처에 놓인 시계를 확인한 뒤 창가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시간이 오래 지나지는 않았으나, 아이들이란 원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노릇이니 처음의 목적이던 다이안의 방으로 이만 가 보는 게 나을 듯했다.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뉴엘과 다이안이 단둘이 있는 것도 신경 써야 할 부분 중의 하나였다. 물론 알고 보면 미뉴엘은 다이안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 해서 그 둘이 성격이 잘 맞는다고는 빈말로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러니 혹시 체스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둘이 싸우기라도 하면 귀찮아질 터였다.

하여 다이안의 방으로 걸어가면서 체스휘는 조금 전에 창밖을 보며 하던 생각을 다시 이어 갔다.

역시 조만간 라파엘 카드리고를 스텔라에 보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얼마 전 밤에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인 데 이어, 다음 날 그 일을 아예 기억하지 못하던 린의 모습을 떠올리면 더욱이 스텔라에서 알아봐야 할 게 있었다.

어쩐지 처음부터 스텔라 출신 같은 느낌도 들지 않고, 또 제 몸에 생긴 문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둔한 모습을 보여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더군다나 체스휘가 자신의 육신을 복구해 소유권을 손에 쥔 것도 여태 눈치채지 못하다니.

그런데 이제 보니 육신에 결함이 생겨서 그런 거였구나 싶었다.

체스휘는 여전히 그에게 그림자처럼 매달린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무시하며 옛 기억을 되감았다.

애초에 린의 이름에 붙은 ‘도체스터’는 그리 특이한 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에 린이 이 레드포드 저택에 와서 자기소개를 했을 때에도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연 린 도체스터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이 한 명 스텔라에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분명 릭 도체스터였던가.’

이 정도로 이름이 비슷하다면, 분명 린이 말한 대주교는 그자가 맞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자신의 부속품에는 비슷한 이름을 주는 법이었으니.

물론 체스휘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릭 도체스터의 직위는 대주교가 아니었지만,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릭 도체스터라면 늘 금욕적이고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던 남자였는데, 그런 자가 린을 저렇게 만들었다는 건 의외인 면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스텔라에는 자신을 포함해, 정상인 인간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다음 순간 시야에 비친 광경에 체스휘는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그 방에는 무슨 일로?”

“어맛!”

돌연 복도에 울린 나른한 목소리에 다이안의 방문 앞에 서 있던 메이드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동그랗게 떠진 눈에 무료한 얼굴을 한 채 느슨히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안녕하세요, 2호실 양육자님.”

메이드는 막 노크를 하려는 듯이 들어 올렸던 손을 내리고 곧바로 체스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 다름이 아니라 방금 복도에 떨어진 손수건을 우연히 발견해서요. 그런데 거기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니 아무래도 다이안 도련님의 소지품인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체스휘는 그 말을 듣고 눈앞에 있는 메이드를 가볍게 한번 훑어보았다.

그녀는 정말 손에 곱게 접힌 손수건을 들고 있었다. 그런데 손수건보다 그녀의 손목에 묶인 붉은 리본이 더 눈에 띄었다.

저걸 보니, 지금 다이안의 방에 찾아온 메이드는 1호실 양육자인 마리엔의 담당 메이드 중 한 명인 게 분명했다. 이 메이드는 저택에 있었던 시간이 꽤 길어서 체스휘도 그녀의 이름을 어렴풋이 기억해낼 수 있었다. 분명 멜로디아였던가.

“그랬군요. 그럼 그거, 이리 줘요.”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메이드가 체스휘의 눈길을 잠깐이나마 끈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침 나도 여기에 볼일이 있어서 안으로 들어가려던 참인데, 다이안에게 대신 전해 줄 테니까.”

체스휘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띤 채 멜로디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의 손에 들린 손수건을 가져갔다.

“아, 네. 감사합니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메이드는 딱히 반발하지 않고, 체스휘의 호의에 고마움을 표한 뒤 순순히 자리를 떠났다.

그때, 체스휘를 휘감고 있던 팔이 스르륵 떨어졌다.

오랜 굶주린 끝에 욕망의 화신이 된 유령은 또 식사를 할 셈인지, 체스휘를 놓고 메이드를 조용히 따라갔다. 체스휘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그 모습을 잠깐 응시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 저택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든 그가 알 바는 아니었고, 저 메이드의 상태를 보니 특히나 불필요하게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체스휘는 굳이 과식하려 하는 유령을 말리거나 사냥당할 위기에 처한 메이드에게 친절히 경고해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린에게 다이안의 안전을 부탁받은 체스휘의 입장에서는, 저런 존재들이 한시라도 빨리 저택에서 사라져 버리는 편이 나았다.

아, 그나저나 린의 생각을 했더니 벌써 또 보고 싶어졌다. 그녀가 빨리 돌아오면 좋을 텐데.

우우웅.

마침 저택의 공기가 또 한 번 요동치는 느낌이 들었다. 산 자와 죽은 자가 뒤바뀌는 시간이 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체스휘는 전보다 길어져 눈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대충 뒤로 쓸어넘기며 돌아섰다.

“나 왔어요. 다이안, 미뉴엘. 사이좋게 잘 놀고 있었어요?”

곧 평소처럼 가볍게 미소를 지은 체스휘가 다이안의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

“내 말 안 들려? 몇 번 회장의 손님이냐니까?”

내가 바로 대답하지 않자, 눈앞에 선 여인이 반듯한 눈썹을 살며시 추켜들며 다시 한번 내게 물었다.

아니, 이렇게 세라와 딱 마주쳐 버리다니?

나는 3번 회장을 문을 열고 나를 쫓아 밖으로 나온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서 멈칫했다.

오늘은 메이드복 대신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는 데다 화장도 평소와 달라서 좀 낯설었지만, 저 눈에 띄는 외모와 익숙한 목소리는 아무리 봐도 분명 레드포드 저택의 예쁜 메이드 언니 세라의 것이 확실했다.

아니, 그런데 이 언니, 이렇게 작정하고 꾸미니까 진짜 장난 아니잖아? 지금 내가 처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언니, 너무 예뻐요!’를 외치며 제2의 덕질판으로 끌려 들어갔을지도 몰랐다.

“아, 크흠. 저는 지금 화장실을 찾고 있었는데요.”

하지만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아 변조시킨 뒤 내 소속을 묻는 세라에게 답했다. 처음에는 순간적으로 아무 번호나 찍을까 싶었지만, 그것도 위험부담이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노선을 바꿔 둘러댔다.

“아, 이번 모임 장소가 길을 찾기 어렵긴 하지. 따라와. 마침 나도 같은 곳에 가려던 참이니까.”

세라는 살짝 붉어진 눈을 손으로 비비며 나를 지나쳐 앞서 걸어갔다.

아무래도 그녀 역시 방금 있던 방 안의 자욱한 담배 연기가 부담스러워서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나도 잠깐 그 방에 들어갔다가 나온 후유증으로 기침이 나오고 아직까지도 눈이 매웠으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뭐야? 따라오라니까 왜 그러고 서 있어? 급한 거 아니었어?”

세라가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독촉했다.

나는 어떻게 할까 하다가 일단 중간에 빠져나갈 기회를 엿보기로 하고, 세라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세라는 나한테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뒤 나한테 굳이 말을 걸지 않고 그냥 혼자 앞장서 복도를 걸었다.

“어라, 이게 누구신가?”

그런데 조금 걷다가,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세라를 보고 알은 척을 해 왔다.

“니아 아니야? 오늘 오랜만에 모임에 나왔네.”

니아? 혹시 다른 사람하고 세라를 헷갈린 건가?

아니면… 설마 정보창에 밝혀지지 않은 세라 언니의 진짜 이름이 니아?!

그럼 퀘스트 보상으로 알게 되어야 할 세라 언니의 진짜 정체를 지금 제가 이렇게 꼼수로 알게 되는 건가요?

하지만 잠깐이나마 내가 김칫국을 마신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냉큼 확인해 본 세라의 인물 정보창에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래도 방금 남자에게 불린 저 이름 역시 세라의 가명이거나 애칭일 뿐, 진짜 본명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무튼 능글맞은 인상을 가진 남자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세라에게 다가왔다.

“친구 찾는다는 건 잘 되어 가? 다들 가망이 없을 거라고 하던데, 너도 참 끈질기네.”

“시끄러워.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짜증 나게 떠들지 말고, 그냥 닥치고 신경 꺼.”

역시 세라는 그를 쌀쌀맞게 무시하고 지나쳤다. 예쁘고 도도하기로 소문난 세라 언니의 위명은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도 타격을 받지 않은 듯이, 샐샐 웃는 낯으로 그런 세라를 따라붙었다. 나는 졸지에 병풍이 되어 두 사람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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