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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17)화 (117/300)

“이 리본 누구 거야? 방금 빨래 꺼내올 때 섞여 들어간 것 같은데.”

“앗, 그거 내 거야! 이리 줘. 하마터면 잃어버릴 뻔했네.”

“오늘 날씨 좋다. 해질 때까지 몇 시간만 널어 두면 시트가 다 마르겠어.”

눈부실 정도로 밝은 햇빛을 머금은 흰 천들이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며 은은한 향기를 퍼트렸다. 그 사이로 평소보다 편한 복장을 한 여인들이 화기애애하게 떠들면서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주말임에도 저택에 남은 고용인들이 일부 모여, 볕이 잘 드는 뜰에서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로 보이는 것들을 널어놓고 있었다. 그들은 평소에 하지 못한 개인적인 빨래와 밀린 청소를 오늘 날을 잡아 한꺼번에 처리한 것 같았다.

“이것만 하면 다 끝나는 거지?”

“응, 얼른 하고 들어가서 간식이라도 먹자.”

체스휘가 서 있는 3층 복도의 창문에서도 그 광경이 훤히 보였다. 그러나 체스휘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흰 천들이 널려 있는 곳에 모여 시시덕거리는 고용인들이 아니었다.

체스휘는 조금 전 린의 부탁을 받아 다이안에게 가는 길에 눈에 띈 것이 있어, 미뉴엘을 먼저 다이안의 방에 들여보내고 다른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시선 끝에 걸리는 것을 쫓아가자, 지금 시야에 비친 것과 같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미세하게 기울어진 체스휘의 입술에 미소라 할 만한 것이 떠올랐으나, 그것은 묘하게 냉소적인 느낌을 풍겼다.

“앗…! 저기 좀 봐.”

그때, 아래에 있던 메이드 한 명이 창가에 서 있는 체스휘를 발견했다.

“어머, 난 몰라. 언제부터 저기에 서 있었지?”

“응? 뭘 보고 그러는 거야?”

메이드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들어 체스휘를 보았다. 그 후 재잘거리던 목소리가 멈췄다. 어차피 거리가 꽤 멀어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어떤 메이드들은 재빨리 머리를 매만지거나 옷매무새를 정리하기도 했다.

폐쇄된 레드포드 저택 안에서 양육자는 제일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이번 양육자들은 대체적으로 외모도 훌륭한 편이었다. 그래서 저택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만 생활해야 하는 고용인들 사이에서 양육자는 제법 인기가 좋았다. 대놓고 표현하지는 않아도, 남성 양육자 중에 체스휘에게 호감을 가진 메이드들의 숫자도 은근히 적지 않았다.

그러나 체스휘는 메이드들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서서 무언가를 지그시 보다가 금방 자리를 떠났다.

“뭐야, 그냥 가네. 누구를 보고 있던 거지?”

“나랑 눈 마주친 것 같은데.”

“그냥 지나가다가 빨래 널은 걸 보고 있었던 거 아니야?”

그렇게 메이드들에게 아쉬움과 의문만 남긴 채 체스휘는 밝은 오후의 빛으로 물든 복도를 혼자 걸어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레드포드 저택은 확실히 평소보다 삭막했다. 하지만 이렇게 유독 저택이 비어 보이는 이유가 꼭 주말이라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레드포드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고용인의 숫자가 조금씩 줄어들어도 그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영혼이 소리 소문도 없이 먹혀 사라진 것이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건 린 정도였다.

“어이, 2호실.”

그때, 4호실 양육자인 레이븐이 체스휘를 부르며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복도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밑에 뭐 재미있는 거라도 있어? 방금 뭘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

그는 우연히 방에서 나와 복도를 지나가다가 체스휘가 조금 전에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것을 목격한 듯했다. 체스휘는 시답잖은 질문을 하는 레이븐에게 지나가듯이 가볍게 대답해 주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마침 밖에서 청소를 하는 모습이 보여서.”

체스휘의 말에 목을 빼고 창밖을 슬쩍 내다본 레이븐이 금방 ‘이 새끼 봐라?’ 하는 눈빛으로 체스휘를 돌아봤다.

“뭐야, 음침하게 메이드들이나 훔쳐보고 있었던 거야?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닌 척하면서 속이 시꺼메서는….”

“지금 레이븐 씨 본인 얘기하나요?”

“뭐?!”

체스휘는 발끈하는 레이븐을 무시한 채 그를 지나쳐 갔다. 그런 체스휘의 뒤로 레이븐이 따라붙었다.

“야, 2호실. 이참에 그냥 툭 까놓고 얘기해 보자. 2호실 말이야,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히 자꾸 쎄하게 구는데,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레이븐은 체스휘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도 계속 그를 따라오며 일부러 도발하듯이 속을 긁는 말을 늘어놨다.

“여자들은 겉모습만 보고 그쪽이 마냥 좋은 남자인 줄 아는 모양이지만, 나처럼 예리한 사람은 한번 보면 딱 촉이 오거든? 원래 2호실처럼 싱글벙글거리면서 성격 좋은 척하는 사람치고 정말 속까지 깨끗하고 착한 사람 못 봤….”

“아, 진짜 지겹게 구네.”

하지만 막상 자신의 말에 정말 자극을 받은 듯이 체스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자, 레이븐은 깜짝 놀라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걸리적거리게 달라붙지 말라니까 말귀도 참 못 알아듣네요.”

“뭐, 뭐? 지, 지금 나한테 한 소리야?”

“아니, 그쪽 말고.”

체스휘는 지나가듯이 짤막하게 대꾸한 뒤 또다시 레이븐을 쥐똥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로 앞서 걸어갔다.

레이븐은 당황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지금 복도에 있는 건 레이븐과 체스휘, 둘뿐이었다.

레이븐은 역시 방금 그 말은 자신에게 한 소리가 확실하다는 생각에 씩씩거리면서 체스휘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후 레이븐이 뒤따라오지 않았기 때문에, 체스휘는 또다시 아무도 없는 복도를 혼자 걸어갔다.

“쓸데없이 날뛰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

“저택을 청소하는 건 괜찮지만, 앞뒤 못 가리고 너무 까부는 거 아닌가.”

그는 방금처럼 나지막한 목소리로 또 혼잣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만약 누군가 근처를 지나가다가, 지금 체스휘를 목격했다면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지금 체스휘는 혼자가 아니었다.

“적당히 해요, 마리네즈 씨.”

얼음장처럼 싸늘한 눈이 그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는 검은 형체에게 미끄러지듯이 움직여 꽂혔다.

“요즘 특히 역겨운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겨우 봐주고 있으니까.”

조금 전 흰 시트가 까만 꽃잎과 함께 바람에 나부끼는 곳에 서 있던 유령.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그러던 중 창가에 있는 체스휘를 발견하고, 레이븐과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다가와 그의 팔에 매달리기까지 했다.

조금 전에 체스휘가 창밖으로 지켜본 광경은, 검은 이리 한 마리가 하얀 양 떼 사이로 숨어 들어가 조용히 포식하던 모습이었다.

긴 굶주림 끝에 한번 영혼의 맛을 알게 된 유령은 요즘 식욕이 대폭 늘어난 상태였다. 그만큼 저택이 빠른 속도로 쾌적해지고 있어 그건 나쁘지 않았지만,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탐욕을 부리는 영혼의 모습은 확실히 눈에 거슬렸다.

“2호실, 너 진짜 그런 식으로 살지 마! 그렇게 내숭 떨면서 앞뒤 다르게 살다가 언젠가 뒤통수 맞는다!”

게다가 이왕 청소할 거면, 역시 저런 걸 먼저 치우는 게 낫지 않나.

등 뒤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레이븐의 목소리를 흘려들으면서 체스휘는 생각했다.

무정한 시선을 받은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몸을 한번 움찔거렸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그녀는 이 정도로 겁을 먹고 체스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영혼을 먹고 힘을 키워, 지금은 체스휘나 다른 사람, 혹은 사물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도 전보다 커졌다. 그 덕분에 지금은 이렇게 체스휘를 직접 만질 수도 있었다.

체스휘는 요즘 따라 더 귀찮게 달라붙는 유령을 냉혹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다가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역시 그의 손길은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통과해 지나갔다.

“2호실 양육자님? 왜 거기 그렇게 서 계세요?”

“아, 팔에 뭐가 묻어서요.”

마침 복도를 지나가던 고용인 한 명이 체스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체스휘는 가볍게 빙긋이 웃어 보인 뒤 잠깐 복도의 한가운데에 멈춰 있던 걸음을 옮겼다.

그는 정말 옷에 먼지나 벌레라도 붙은 것처럼, 더는 자신에게 거머리처럼 매달린 영혼을 신경 쓰지 않았다.

원치 않는 동행자와 복도를 걷는 동안, 문득 얼마 전 린이 갑자기 복도에 나타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보고 놀라서 그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던 게 생각났다. 체스휘의 침실에 찾아온 린이 그에게 달라붙은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보고 언짢은 기색을 비쳤던 모습도 연이어 떠오르자 짜증이 어려 있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체스휘는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귀여웠는데.’

린을 떠올린 체스휘의 얼굴에 조금 전 창밖을 볼 때와 달리 제법 달짝지근한 미소가 그려졌다.

차라리 린이 있을 때 이런 식으로 벌레가 달라붙으면 그런 귀여운 모습이나 볼 수 있지, 지금처럼 보여 줄 사람도 없는 데서 쓸데없이 설쳐 봤자 그의 짜증만 늘어날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갑자기 체스휘의 머릿속에 어떤 신호가 울렸다.

일전에 레드포드 저택에 방문한 라파엘 카드리고에게서 갈취했던 가이드에서 울리는 교신이었다. 스텔라에서 온 전언은 간략했다.

복귀 요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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