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혼자 뭐 하냐?”
한가로운 주말 오후. 갑자기 누군가가 다이안의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안쪽으로 동그랗게 말린 금빛 단발과 하얀 프릴 소매를 살랑살랑 흔들며 방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미뉴엘이었다.
다이안은 한낮의 불청객을 보고 눈을 치켜떴다.
“뭐야? 들어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남의 방에 들어와?”
미뉴엘도 자신을 반기지 않는 다이안을 보고 못마땅한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이 그냥 있었으면서, 내가 찾아와 주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누구는 네가 좋아서 여기에 온 줄 알아?”
“그러니까, 굳이 친하지도 않으면서 내 방에 왜 찾아온 건데?”
다이안은 진심으로 미뉴엘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미뉴엘을 보는 그의 눈에는 약간의 경계심마저 깃들어 있었다. 그동안 미뉴엘과 만나서 딱히 좋은 일이 일어났던 적이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런 다이안에게 심통이 난 듯, 미뉴엘의 얼굴은 조금씩 험악한 표정을 그리며 붉으락푸르락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만약 지금 린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다이안을 향한 미뉴엘의 호감도가 약간 하락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걸핏하면 까칠한 소리를 내뱉는 것과 달리, 다이안에 대한 미뉴엘의 호감도는 상당히 높았다.
지난번에 그를 친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다이안의 말에 충격을 받았던 것처럼, 지금도 미뉴엘은 다이안의 입에서 나온 ‘두 사람이 친하지 않다’는 소리에 성질이 난 것 같았다.
미뉴엘은 잔뜩 독이 오른 표정으로 들고 있던 책을 테이블 위에 패대기치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체스휘가 너랑 같이 있으라고 했으니까 그렇지! 왜, 불만 있어?!”
“체스휘… 네 양육자가?”
미뉴엘의 말에 다이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미뉴엘은 방 주인의 허락 없이도 소파에 마음대로 털썩 주저앉으며 투덜거리는 어투로 설명을 덧붙였다.
“그래, 네 양육자가 외출하기 전에 부탁했대. 자기가 없는 동안 너 좀 봐 달라고. 하여간에, 네 양육자는 신입이라 아직 여기 사람들을 잘 몰라서 그런가? 뭘 믿고 체스휘한테 널 부탁하는지 몰라. 순진하게.”
“…….”
“아무튼 그래서 내가 특별히 네 방에 와 줬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고맙게 생각해. 보답의 의미로 간식이나 내오든가. 아, 마침 여기에 먹을 게 있네. 이거 내가 다 먹어도 되지?”
다이안이 대답하기도 전에 테이블 위에 있던 쿠키가 미뉴엘의 입 안으로 와구와구 쏟아져 들어갔다. 미뉴엘은 다이안의 간식을 거리낌 없이 동내며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다른 것까지 요구했다.
“체스휘는 잠깐 할 일이 있어서 조금 이따가 온다고 했으니까, 그동안 네가 날 좀 재미있게 해 줘 봐.”
“재미있게? 어떻게?”
“웃긴 얘기나 좀 해 보든가. 아니면 뭐, 가지고 놀 만한 거 없어?”
“그런 거 없는데…. 난 숙제하던 중이었으니까, 넌 가지고 온 책 읽어.”
다이안은 빠른 속도로 비워져 가는 쿠키 접시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면서 쌀쌀맞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정말 다시 고개를 숙이고, 손에 들고 있던 펜으로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미뉴엘은 그 모습을 보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손님 접대가 뭐 이 모양이야? 너 설마 진짜 나를 이대로 방치할 생각이야? 기껏 너를 보러 여기까지 와 준 나를?”
“나 바빠. 애초에 내 방에 허락도 없이 멋대로 들어온 건 너잖아.”
다이안은 정말 미뉴엘이 귀찮은 듯이 더 상대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미뉴엘은 또 한 번 독이 오른 눈으로 다이안을 노려보다가, 이내 김이 샌 얼굴로 작게 투덜거렸다.
“어유, 그래. 됐다, 됐어. 내가 너한테 뭘 기대하냐…. 차라리 혼자 노는 게 낫지.”
미뉴엘이 손을 뻗어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던 책을 펼쳤다. 여전히 이 상황이 불만스러운 듯이 책장을 넘기는 그의 손길은 퍽 거칠고 신경질적이었다.
‘다이안 쟤…. 확실히 양육자가 생긴 후로 기가 살았단 말이야?’
지금까지 늘 상대방을 약 올리고 승리감을 느껴 왔던 건 자신인데, 언젠가부터 이상하게 미뉴엘은 다이안 때문에 은근히 자존심이 상하고 분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도 그래. 원래 내가 이렇게 먼저 방에 찾아와 주면 아닌 척하면서도 내심 반가워했었는데.’
하지만 린이 저택에 오고 나서부터 다이안은 변했다. 그는 이제 조금, 진짜 아주 조금쯤은 진심으로 미뉴엘을 귀찮게 여기는 것 같았다.
생각할수록 괘씸한 마음이 들어서인지, 책장을 넘기는 미뉴엘의 손길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다이안, 이 의리 없는 자식…! 내가 그동안 얼마나 잘해 줬는데 감히 날 이렇게 홀대해?’
게다가 친구가 아니라느니, 친하지 않다느니, 자신도 가만히 있는데 먼저 그런 건방진 말이나 지껄이고 말이다. 당장이라도 다이안에게 뭐라고 따끔하게 한마디 일침을 놔 주고 싶었지만, 막상 자신이 먼저 입을 열자니 또 자존심이 상했다.
“미뉴엘.”
“왜?”
그래서 잠시 후 다이안이 먼저 조용히 그를 불렀을 때, 미뉴엘은 내심 몰래 반색했다. 그럼 그렇지, 역시 다이안도 정작 자신이 이렇게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신경이 쓰였던 게 분명했다.
“뭐, 나한테 할 말 있어?”
하지만 미뉴엘은 우쭐한 마음을 감추고 괜히 더 퉁명스럽게 반응했다. 그런데 다이안이 이어서 내뱉은 말은 미뉴엘이 상상했던 내용과 달랐다.
“네 양육자 말이야. 넌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도 않냐니, 뭐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기 어려운 소리에, 미뉴엘이 다이안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미뉴엘에게 다이안이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겉모습은 예전하고 똑같지만, 원래 네 양육자이던 그 사람하고 다르잖아.”
그 순간 두 사람이 있던 방 안에 기묘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책장을 마구 넘기던 미뉴엘의 손이 우뚝 멈춰졌다.
그동안 미뉴엘이 누구의 앞에서도 섣불리 입 밖으로 낸 적이 없는 비밀을, 지금 다이안이 아무렇지도 않게 꼬집어 말했다.
“야.”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담기지 않은 미뉴엘의 차가운 황금빛 눈이 마주 앉은 다이안을 날카롭게 꿰뚫었다.
“너 그런 말, 겁 없이 아무 데서나 하지 마.”
꼭 경고하듯이 낮게 가라앉은 서늘한 미성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이 저택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 싫으면.”
소년의 맑은 목소리가 이상하게도 그 순간만큼은 늦가을의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흐르는 메마른 바람처럼 음산하게 들렸다.
오후의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쪼이는 자리에서 다이안과 미뉴엘은 얼마간 침묵을 동반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가 미뉴엘이 먼저 방에 짙게 고인 적막감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는, 딱히 그 사람이 진짜 체스휘든 아니든 상관없어.”
다이안을 협박하거나 겁을 줄 생각으로 했던 말은 아닌 듯, 미뉴엘은 방금의 한기가 한풀 가신 목소리로 차분하게 설명하듯이 말을 이었다.
“너랑 달리 난 체스휘가 지금까지 페어로 묶인 유일한 양육자였던 것도 아니거든? 그전에 양육자가 교체되었던 적도 몇 번 있었고. 그러니까 딱히 너나 루스카처럼 지금 그 양육자가 아니면 죽고 못 산다거나, 뭐 그런 것도 아니란 말이야.”
미뉴엘은 조금 전에 무심코 손에 힘을 줘서 구긴 책장을 살살 펴면서 덧붙였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 날 무사히 지켜 줄 만한 능력이 있으면 그걸로 돼. 진짜든 가짜든, 변했든 변하지 않았든 그런 건 상관없어.”
다이안은 들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린 채 잠깐 말을 고르듯이 얕은 숨을 내뱉는 미뉴엘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차피 양육자는 중간에 뭔가가 틀어져도 우리를 두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 하지만 우리는 아니잖아.”
“…….”
“쓸모가 없다는 게 판명되어서 여기를 나가면 우리야말로 죽기밖에 더 하겠어?”
미뉴엘은 말하다가 속이 뒤틀린 듯이 책을 탁 소리 나게 접고 아까처럼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쳤다.
“그러니까 너도 양육자랑 너무 깊이 엮이지 마. 마음을 주고 싶어도, 필요하면 언제든 방패막이로 쓸 수 있을 정도로만 주란 말이야. 그게 남는 장사야. 내 말 무슨 의미인지 알지?”
다이안은 미뉴엘의 말에 잠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다이안이 천천히 입을 열어 미뉴엘에게 한 박자 늦은 짤막한 대답을 남겼다.
“무슨 말인지 알아.”
그 후로 방에는 조금 전처럼 묵직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두 소년 모두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종이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을 아꼈다. 방에는 시계 초침 소리만 가늘게 울렸다.
결국 이번에도 침묵을 이기지 못한 건, 불편한 얼굴로 엉덩이를 작게 들썩이던 미뉴엘이었다. 그는 입을 앙다물고 있는 다이안이 신경 쓰이는 듯이 조금 전보다 한결 온화하게 꾸며낸 목소리로 말했다.
“넌 왠지 네 양육자한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 같아서 한 소리야. 하지만 그래서야 순번이 바뀐 거 아니겠어? 애초에 그 사람들은 우리를 지켜 주려고 선발된 건데, 여차할 때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
“무슨 말인지 안다고. 그러니까 그만해.”
하지만 결과적으로 미뉴엘의 말은 다이안을 달래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셈이 되었을 뿐이라, 다이안은 고개를 들어 사나운 눈으로 미뉴엘을 노려봤다. 미뉴엘은 불만스럽게 입술을 씰룩거렸지만, 그래도 다른 말을 더 얹지 않고 이번에야말로 정말 입을 다물었다.
소년들이 있는 방에는 다시금 삭막한 침묵만 쌓여 갔다.
“흐음.”
한편 그 시각, 체스휘는 시야에 비친 광경을 보며 웃는 듯, 찡그린 듯, 미묘한 얼굴을 한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