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전에 먼저 초대장을 보여 주십시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콘라드의 연구실에서 훔쳐 온 초대장을 내밀었다.
혹시 어정쩡하게 굴면 의심할 수도 있으니 일부러 더 당당하게 행동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미리 몸을 숨기고 이 건물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지켜봤는데, 다들 딱 이렇게 생긴 걸 보여 주고 안으로 들어가더라.
혹시 지금쯤 콘라드가 연구실에서 이 초대장을 찾고 있을지도 몰랐지만 내가 알 바는 아니었다. 어쩌면 그는 원래 이런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으니, 초대장이 없어진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콘라드가 은근슬쩍 동행을 권하기에, 일부러 나는 이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 말을 흘려두기도 했으니까.
“아! 미처 몰라뵈었습니다. 바로 입장하셔도 좋습니다.”
그런데… 콘라드 이 녀석, 생각보다 거물이었던 건가?
콘라드의 연구실에서 훔쳐 온 초대장을 본 남자가 서둘러 길을 비켜 줬다.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한결 더 정중한 태도를 취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초대장에는 등급이 나누어져 있는 모양이었다.
“1번 문으로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심지어 다른 고용인까지 다가와서 아주 공손한 모습으로 나를 직접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순간 움찔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속에서는 깊은 의혹이 자라나고 있었다.
‘뭐야? 콘라드, 설마 고위급 간부 같은 거냐? 귀차니즘에 절어 사는 인간이 도대체 무슨 활동을 얼마나 열심히 했기에 이런 단체에서 VIP 취급을 받아? 아니면 레드포드 저택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의사라서 특별 대우받는 건가?’
나는 그냥 ‘뉴 퀘스트! 뉴 맵!’ 하고 가볍게 생각하고 왔는데, 어쩌면 이 수상한 단체의 중심부에 이미 내 생각보다 더 가까이 접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만큼 오늘은 처음 계획보다 주의해서 움직여야 할 필요가 있기도 했다.
‘뭐, 일단 들어왔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고용인에게 안내받아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또 다른 고용인과 손님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눈에 띄었다.
“암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5경기. 13번 말.”
“신분 확인증은?”
“여기.”
“어서 오십시오. 회장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4번 문으로 들어가 주시면 됩니다.”
건물 밖에서 초대장을 확인하는 것으로 신원조회가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보안이 꽤 철저한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안에 그냥 숨어 들어오는 건 어려웠겠다 싶었다.
혹시 나한테도 저런 확인을 할지 몰라서 다른 사람들이 대답하는 걸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신분 확인증이 또 필요해? 흠….
나는 재빨리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옷차림을 스캔했다. 그런 뒤 일부러 걸음을 늦춰, 내 다음 순서로 건물 안에 들어온 사람과 몸을 부딪쳤다.
“앗!”
“조심하지 못해? 눈을 어디다 달고 다니는 거야?”
“아, 죄송합니다….”
내가 먼저 신경질적으로 반응하자 나와 부딪친 사람이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나는 짜증스럽게 옷을 탁탁 털면서 그 자리를 벗어났다.
“뭐야, 내가 먼저 부딪힌 게 아닌 것 같은데…?”
뒤에서 황당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방금 손에 넣은 브로치를 망토에 달았다.
“암호를….”
“1번 회장으로 모실 손님이시다.”
“아, 실례했습니다.”
그런데 복도에서 신원 확인을 하던 고용인은 나를 그냥 통과시켰다. 나를 안내하던 고용인이 한마디 하자, 그는 내게 사과하며 바로 길을 비켰다. 안내인은 나를 데리고 자연스럽게 그 앞을 지나쳐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살짝 눈을 굴렸다.
뭐야? 설마 나는 초대장을 보여 준 것만으로도 프리패스라는 거야? 그럼 방금 괜한 짓을 한 건데….
“암호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6경기. 7번 말.”
“신분 확인증은?”
“여기…. 어? 어디 갔지?”
“신분 확인증이 없으면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뒤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이 브로치가 신분 확인증이 맞는 모양이었다.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공통으로 달고 있기에 손에 넣은 건데, 자세히 보니 세라의 방에서 봤던 총과 칼의 문양과 동일한 수레바퀴와 뱀이 브로치에도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VIP는 추가 신원 확인을 받지 않는다니, 그게 더 찜찜한데.’
고용인들의 말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초대받은 손님마다 안내받는 회장의 장소가 다른 듯했다. 지금 내가 안내받아 가고 있는 곳은 1번 문으로 연결된 회장인 듯했는데, 신원 확인이 따로 필요 없는 자리라면 당연히 그게 더 위험했다.
신원이 확실한 소수의 사람만 모이는 장소라는 의미였으니까. 당연히 나 같은 외부인은 얼굴을 보이자마자 낯선 사람이라는 걸 들킬 게 분명했다. 그런 중요한 직책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라면 경비가 허술할 리 없으니, 내가 외부인인 걸 알자마자 공격해 올 것도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등 뒤로 식은땀이 삐질 배어나는 것 같았다.
건물 안쪽으로 갈수록 주변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이제는 복도를 오가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거의 다 왔습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회장으로 들어가는 문이 나올 겁니다.”
잠시 후, 목적지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 나는 걸음을 멈추고 길을 안내하던 고용인에게 말했다.
“먼저 화장실에 잠깐 들렀다가 가고 싶은데.”
“아, 화장실은 좌측 복도에 있습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십시오.”
고용인은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띤 채 내게 화장실까지의 길을 또 안내해 주겠다고 했다. 나는 일부러 까칠하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가지.”
“하지만….”
“쓸데없이 두 번 말하게 할래? 내가 이런 좁아터진 곳에서 길 하나 못 찾는 멍청이로 보여?”
예상한 대로, 고용인은 내 고압적인 태도에 더 이상 다른 말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났다.
“네, 그럼… 다시 필요할 때 불러 주십시오. 휴게실에 다녀오신 뒤 이쪽 복도로 쭉 걸으시면 금방 회장의 문이 나올 겁니다.”
그래요, 언니. 나도 다 알아요…. 이런 진상 손님한테 걸리면 재수 옴 붙었다 싶죠? 일하기 더럽고 짜증스러운 그 마음 나도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빨리 눈앞에서 사라져 드리지.
나는 여전한 비즈니스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로 서 있는 고용인을 쌀쌀맞게 지나쳐 화장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물론 진짜 볼일이 있는 건 화장실이 아니었다. 이대로 회장 안에 들어가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먼저 주변을 좀 살펴본 뒤 움직이는 게 나을 듯했다.
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자마자 다른 방향으로 이동했다.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볕에 복도가 환했다. 사이비 종교 같던 이런 수상한 단체의 사람들이라면 늦은 시간, 으슥한 장소에서 모임을 가질 것 같았는데 그것만은 내 편견이었다는 걸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도대체 몇 번이나 신원을 확인하는 건지, 매번 귀찮다니까.”
“내 말이. 새로 들어온 신입들이나 잘 관리할 것이지.”
“그런데 여긴 화장실이 어디야? 이번 장소는 왜 이렇게 길이 복잡하게 돼 있어?”
“아까 지나가다가 본 것 같은데, 저기 아니야?”
그렇게 복도를 돌아다니다가, 오늘 모임에 참석한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멀리서 지나가며 대화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무래도 여기가 수상한 단체의 본거지는 아니고, 매번 장소를 바꿔서 모임을 갖는 듯했다.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걸어가자, 곧 5번이라고 적힌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내가 안내받은 1번 문과 달리 이곳 주변에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슬쩍 그 사이에 끼어들어 5번 회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처음 오셨어요? 추천인은 누구지요?”
“아, 저는 이자크 씨의 소개로….”
“아가씨, 샴페인 한 잔 드릴까요?”
“업무 중에 나와서 안 돼요. 이따가 다시 들어가서 잔업을 봐야 하거든요.”
“그런 분들을 위해 준비한 무알코올 샴페인도 있어요.”
다행히 나를 수상쩍게 보는 사람은 없었다. 수상한 사이비 단체의 특성상, 얼굴을 가린 사람들도 많아서 나도 굳이 망토를 벗지 않아도 되었다.
중간중간 고용인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경비를 서듯이 회장 안을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중 일부는 내 앞을 지나가기도 했으나, 내가 망토에 단 브로치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회장 안에 모여 자유롭게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의외로 평범해 보였다.
나는 5번 회장을 잠깐 둘러본 뒤 밖으로 나와 다시 복도를 걸었다. 이번에는 3번 회장의 문을 찾아내 안으로 들어갔다.
“웁, 쿨럭!”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얼굴로 날아드는 자욱한 연기에 기침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오, 새로운 손님이시군.”
“한동안 이쪽에는 신입이 없었는데, 이번 모임부터 승급한 사람인가?”
그곳은 담배 연기로 빽빽했다. 얼마나 공기가 탁하고 뿌연지, 안쪽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회장을… 잘못 찾아왔네요.”
“목소리를 들으니 생각보다 어린 아가씨인데? 그러지 말고 이리 들어오….”
쾅!
안에 있던 사람이 나를 붙잡았으나 더 듣지도 않고 문을 닫았다.
고용인의 말을 듣고 예상한 대로 이곳은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모든 회장을 전부 다 들어가 보지는 않았지만, 각각의 장소마다 모인 사람들의 특징이나 방의 분위기가 전부 다른 듯했다.
“잠깐, 당신.”
그런데 그때, 내가 나온 3번 회장의 문이 등 뒤에서 열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귀에 꽂혀 들었다.
“몇 번 회장의 손님이지?”
뒤돌아본 내 눈에 낯익은 얼굴이 비쳤다.
나를 부른 것은 레드포드 저택의 메이드, 세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