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무슨 일이야? 나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그냥 생각이 나서 한번 들러 봤어요.”
기분이 이상해져서 다이안을 구석구석 뜯어 봤으나, 그는 어느새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다이안은 그냥 자신의 생각이 나서 방에 들렀다는 내 말에 기분이 조금 좋아진 듯이 표정을 폈다.
하지만 곧 그는 잠깐 잊고 있던 방 안의 참사를 뒤늦게 떠올린 것처럼, 서둘러 나를 밖으로 몰아내려고 했다.
“린은 주말인데 외출 안 해?”
“조금 이따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아직 생각 중인데….”
“그럼 나갔다 와! 모처럼 주말인데 기분 전환도 할 겸! 내내 저택에만 있으면 답답하잖아!”
다이안은 나를 생각해 주는 척하며 내 등을 직접 떠밀기까지 했다. 더 버틸 수도 있었지만, 그의 노력이 가상해서 나는 그냥 솜털 같은 손에 밀려 방을 나가 주었다.
아무래도 중요한 작업(?) 중에 내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당황한 것 같은데, 일단 지금 당장은 캐묻지 말고 그냥 넘어가야겠다 싶었다. 어린이의 프라이버시도 존중해 줘야 마땅한 것이었고, 또 어찌 되었든 간에 다이안이 이렇게 기운을 차려서 무언가를 할 의욕을 낸 건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그렇게 의욕을 내서 한 게 인형의 수술을 집도하는 일인 건… 좀 미묘했지만.
“아, 참! 다이안 도련님. 혹시라도 제가 없을 때 누가 찾아오면 함부로 문 열어 주지 마세요.”
막 방문을 나서기 직전에, 세라의 방에서 찾은 쪽지를 해독한 내용이 문득 떠올라서 혹시 하는 마음으로 다이안에게 당부했다.
“누가 뭐라고 꼬드겨도 절대 따라가지 마시고요. 메이드여도 조심해요. 알았죠?”
다이안은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이 싫은지 내 말에 얼굴을 구기다가, 마지막으로 덧붙인 소리를 듣고 멈칫했다.
“알았어.”
잠깐 나를 머뭇거리는 눈으로 올려다보던 다이안이 작게 웅얼거렸다
“린도 조심해. 혹시라도 다치지 않게. 특히 나 때문에 린이 잘못되면 엄청 슬플 테니까.”
우리 고양이가 집사 걱정도 해 줄 줄 알고 다 컸다고 한바탕 요란하게 다이안을 귀여워해 주고 싶었지만, 수줍음 많은 다이안이 곧바로 도망치듯이 눈앞에서 문을 쿵 닫아서 그러지 못했다.
‘크흡, 그래. 육아가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이 맛에 힘내는 거지!’
나는 오랜만에 흐뭇한 마음을 느끼며 다이안의 방을 떠나, 방금 창문으로 확인했을 때 비어 있는 듯했던 콘라드의 연구실로 향했다.
***
린을 밖으로 내보내고 문을 닫은 뒤, 다이안은 돌아서서 방 안을 둘러봤다.
아직도 공중에 떠다니는 솜털과 이리저리 뜯긴 채 널브러져 있는 인형들. 이렇게 보니 생각보다 더 방이 엉망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린에게 이런 꼴을 보이다니…!’
“안 돼….”
다이안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소리 없이 절규했다. 하지만 아무리 후회하고 좌절한들, 시간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결국 다이안은 허탈하게 다시 손을 내리고 침울한 얼굴로 떨어진 인형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다이안이 이렇게 만약 누군가 목격하면 깜짝 놀랄 만한 짓을 벌인 이유는, 갑자기 오래된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짠, 선물이에요. 다이안 도련님을 닮아서 귀여운 인형이죠?”
애써 잊으려고 한 기억이었지만, 사실은 예전에…. 그러니까 다이안에게 양육자가 없던 시절에 혼자 있던 그에게 먼저 다가왔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이제는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혼자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외롭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끝내 좋은 기억으로 남지는 않은 사람이었기에, 지금까지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 시도가 성공했던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것이라, 이후에 다시 혼자가 되는 것에 익숙해지면서부터는 그 사람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또 시간이 좀 더 흘러 린이 그의 양육자가 되어 준 이후로는 정말 꿈에서라도 그 얼굴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린의 입에서 나온 그 이름을 다시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리고 실은 제가 이 선물들 중 하나에 보물을 숨겨놨는데요. 그게 뭐냐고요? 음, 지금은 비밀이에요. 나중에, 좀 더 시간이 지나서 만약 …했을 때. 그때 찾아보세요.”
다이안은 솜털이 삐져나온 인형을 줍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래.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뭐라고 대답했었는지도 기억났다.
“그럼 영영 그럴 일 없겠네. 엠버는 계속 나랑 같이 있을 거잖아.”
하지만 그때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그런 건 지금 굳이 떠오를 필요가 없었는데….
왠지 기분이 좀 더 가라앉아서, 다이안은 고개를 양옆으로 휘저어 머릿속의 잡념을 떨쳐 버렸다.
역시 괜한 짓을 했다 싶어서 뒤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옛 기억이 떠올랐든 말든, 그냥 무시하면 되지 왜 굳이 그 말을 따라 이 안에 든 걸 찾아내려고 했을까.
다이안은 일부러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채 더러워진 방을 정리하려고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문득, 침대 위에 있는 무언가가 다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린이 막 방으로 들어왔을 때 그가 가위로 가르고 있던 인형의 몸통에서 아주 살짝 드러난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그 순간 다이안의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언제 마음을 바꾸기로 결심했냐는 듯이 서둘러 몸을 날려 인형 속의 솜뭉치를 또 마구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고 마침내 시야에 완전히 드러난 것을 본 다이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
“린 씨, 외출하시나 봐요?”
다음 날 오후, 외출 준비를 끝내고 막 저택의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2층 복도 창문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체스휘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정말 저를 여기에 혼자 버리고 가시다니 무정하기도 해라.”
체스휘는 손에 턱을 괸 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면서 투정을 부리듯이 말했다. 나도 어제 그가 데이트 신청 비슷한 걸 했을 때 단칼에 거절했던 생각이 나서 괜히 헛기침을 내뱉었다.
“잠깐 볼일이 좀 있어서요.”
“그렇게 꽃단장을 하고요?”
꽃단장은 무슨…. 최대한 눈에 안 띄려고 제일 수수한 차림으로 나왔는데.
“아무튼 체스휘 씨, 마침 잘 만났네요. 저는 지금부터 잠깐 밖에 나갔다가 올 건데, 혹시 시간이 날 때 다이안이 잘 있는지 한번 확인해 줄 수 있을까요?”
내 말에, 팔 위에 기대고 있던 체스휘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그는 가느다란 미소를 입가에 그린 채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저한테 다이안을 맡기고 가다니, 제가 린 씨에게 상당히 믿을 만한 사람인가 봐요?”
꼭 그래도 되겠냐고 나한테 묻는 듯한, 묘하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어투였다. 나는 새삼스럽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코를 찡긋거리며 말했다.
“당연히 그러니까 체스휘 씨한테 부탁하는 거죠.”
“…….”
“아니면 달리 누구한테 다이안을 맡기겠어요?”
체스휘는 내 대답에 잠깐 말이 없었다.
“차라리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네?”
뒤이어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린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다시 되물으려고 했을 때, 체스휘가 창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짤막하게 답했다.
“린 씨의 부탁이니 할 수 없네요. 대신 빨리 와야 돼요.”
“네, 금방 다녀올게요.”
내 말에 체스휘는 또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진득한 시선을 등 뒤로 받으며 걸어가 대기 중인 마차에 올랐다.
“어디로 모실까요?”
“제일 가까운 마을로.”
마부의 말에 대답하자 바로 마차가 출발했다.
그렇게 나는 수상한 반동 단체의 비정기 모임이 열리는 장소로 향했다.
***
“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양육자님.”
이번에도 마부인 존 씨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아, 머리야…. 이번에도 또 이러네.”
나는 뻐근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마차에서 내렸다.
지난번에 외출할 때도 그러더니, 오늘도 레드포드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바로 의식이 끊겼다. 눈앞에서 정문이 활짝 열리고, 그곳을 막 지나갈 때 보라색 빛 같은 게 눈앞에 번쩍인 건 어렴풋이 생각나는 것 같기도 한데…. 그 이후로는 완전히 필름이 끊기듯이 기억이 날아가 버렸다.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중간 과정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역시 세계와 세계를 건너서 장소를 이동하는 셈이니… 그 충격이 몸에 끼치는 영향력이 작지 않은가 본데.’
나는 혼자만 멀쩡해 보이는 마부 존 씨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힐끗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걸으면서 광장의 시계탑을 보니 거의 3시가 되어 있었다. 시간이 촉박했지만, 적어도 이곳의 지리는 익숙해서 길을 헤맬 걱정은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레드포드 저택의 아이들을 노리는 반동 세력은 저택에서 바로 연결된 제19세계의 번화가에서 오늘 그들의 모임을 가질 예정이었다.
콘라드의 방을 뒤지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웠다. 세라의 방을 뒤질 때처럼 제한 시간 같은 것도 없었고, 콘라드가 허술해서 그런지 뭔가를 꽁꽁 감춰 놓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초대장을 경마권으로 둔갑시켜 놨을 줄은 몰랐지만.’
잠시 후, 목적했던 장소에 도착했다. 일단 겉보기에는 제법 평범해 보이는 3층짜리 건물이었다. 유니폼으로 보이는 옷을 입은 사람이 문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겉옷에 달린 모자를 대충 뒤집어써서 얼굴을 가리고 당당하게 정문으로 걸어갔다.
“오늘 초청받으신 손님입니까?”
문을 지키던 사람이 나를 발견하고 질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