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체스휘가 왜 이렇게 청순해 보이지…?’
어떨 때는 사람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요망한데, 하필 지금은 왜 이렇게 청초해 보이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아침 햇살 버프 때문인가? 그래서 이렇게 맑고 투명하고 청순해 보이는 건가?
게다가 앞서 말했다시피 원래 게임의 캐릭터들은 플레이어의 동의 없이 청소년 관람 불가의 행위를 강제로 할 수 없었다. 플레이어들에게 집단 소송을 당하고 게임 회사가 폐업할 걸 각오하지 않는 이상 이런 종류의 버그는 만에 하나라도 생기지 않도록 모든 가상 현실 게임에서 각별하게 주의하고 있기도 했다.
그러니 만약 어제 무슨 일이 있었다면, 그건 거의 99% 내가 주동한 것이란 소리인데…. 왠지 있을 법한 일인 것 같기도 해서, 체스휘의 말에 내가 절대 그랬을 리가 없다고 딱 잘라서 부정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바로 그때, 꼭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던 체스휘가 문득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린 씨,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에요?”
이어서 장난스러운 말투로 덧붙여진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렇게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어요. 그러니까 얼굴 펴요.”
“뭐예요?”
이 사람이, 그런데 아침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쓸데없이 의미심장한 척한 거란 말이야?
“진짜인 줄 알았잖아요! 지금 사람 놀려요?”
이렇게 마음대로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다니, 체스휘가 아주 괘씸했다. 이제는 아주 틈만 나면 나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데.
그래서 나를 속인 것을 응징하려고 말아쥔 주먹으로 체스휘의 가슴팍을 퍽 때렸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게, 그를 공격한 내 손만 얼얼하게 아팠다.
“그런데 정말 아무 기억도 안 난다니 이상하네요.”
체스휘는 꼭 햄스터의 발차기에 당하기라도 한 듯이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조금 전에 장난을 칠 때와는 사뭇 다른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그는 정말 내 몸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운 것처럼, 내 머리까지 양손으로 붙잡고 얼굴을 샅샅이 훑기까지 했다. 거기에 이어, 나를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고 하면서 뭔가를 확인했다.
“어제는 분명 아무 이상이 없는 것 같았는데, 혹시 어디 아파요?”
“아니요. 특별히 그런 데는 없는데요.”
“어젯밤의 일에 대해서 단편적으로라도 생각나는 게 진짜 하나도 없어요?”
“어젯밤에….”
그런데 체스휘의 유도를 따라 뭔가를 생각하려고 하자마자 머리가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대, 주교님….”
그때,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급격히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어젯밤의 기억이 뇌를 휩쓸었다.
“보고, 보고해야 하는데….”
퍼뜩, 어제의 일을 본부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나한테 있었던 일도, 그리고 레드포드 저택에 숨어 있는 이 남자의 존재도.
하지만 내가 움직이기 전에, 큼지막한 손이 먼저 내 얼굴을 양쪽으로 감싸 단단히 붙들었다.
“린 씨.”
고정된 시야에 냉정한 빛을 띤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머리 아파요?”
그의 말처럼 머리가 아팠다. 분명 더 생각할 게 있었는데, 자꾸 머리가 지끈거려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그럼 그냥 떠올리려고 하지 마요. 더 안 물어볼 테니까.”
내 가장 깊은 곳까지 관통할 듯이 날카로운 눈빛과 달리 귓가에 번지는 목소리는 부드럽고 다정했다. 달콤하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에 녹아들자, 폭풍우 내린 바다처럼 시끄럽게 요동치던 머리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나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을 따라 더 이어지려던 상념을 차단시켰다.
바로 그 순간, 뇌의 스위치가 바뀐 것처럼 퍼뜩 의식이 돌아왔다.
“아, 체스휘 씨. 미안해요. 방금 뭐라고 했죠?”
분명 체스휘가 어젯밤의 일이 정말 하나도 생각나지 않냐고 물은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잠깐 넋을 놓고 있었던 듯했다.
체스휘가 여전히 내 뺨을 양손으로 감싼 채 눈매를 설핏 가늘게 좁혔다.
“역시… 부작용인 것 같은데.”
나는 혼잣말처럼 흘러나온 체스휘의 말을 듣고 여전히 지끈거리는 이마를 찌푸렸다.
“뭐…. 어제 연못에 빠진 거요?”
어제 있었던 특이한 일이라고는 연못에 빠졌던 것밖에 없었으니까, 아무래도 그 후유증을 말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아니면 혹시 또 콘라드를 의심하는 건가? 어제도 체스휘는 콘라드의 실력을 불신하며 내가 병동에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었다. 왠지 내가 부상을 입은 것도 아는 눈치였고….
그러니 어쩌면 또 콘라드의 치료법을 믿지 못해 그 부작용을 의심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체스휘의 말을 듣고 보니 나도 콘라드에게 새로 받아 온 약이 좀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거기에 환각을 보는 부작용 같은 거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체스휘에게 자극을 받은 덕분에 콘라드의 능력치가 상승해서 이번에는 좀 믿을 만하다 싶었는데….
하지만 아직 1단계 각성에 불과한 데다, 돌팔이의 역사가 길다 보니 콘라드에게 완전한 신뢰감이 들지도 않았다.
“그래도 어제 일도 그렇고,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는 건 진짜 체스휘 씨밖에 없네요.”
아무튼…. 어젯밤의 일과 연관된 기억에 대해서는 더 떠올리기 싫어졌다.
그래서 ‘어제 병동에 다녀온 후 체스휘와 다시 만나지 못해 은근히 신경이 쓰였었는데, 지금은 그의 기분이 꽤 풀린 것처럼 보여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끝으로, 어제의 일에 대해 더 고민하는 걸 멈췄다.
“저 고개가 좀 아픈데 이제 손 좀 풀어 줄래요?”
체스휘는 내 말을 듣고 또다시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이내 아무 말 없이 내 요구대로 얼굴을 놔줬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가 완전히 나한테서 손을 뗀 건 아니었다. 체스휘가 이번에는 내 얼굴이 아니라 두 손을 맞잡고 끌어당겼다. 이것 역시 불시에 일어난 일이라, 상체가 앞으로 확 기울어졌다.
아니, 이건 또 무슨 요망한 자세야?
만약 다른 사람이 하필 지금 복도를 지나가다가 우리를 보기라도 하면, 내가 체스휘를 끌어안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체스휘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린 씨, 이번 주말에 뭐 해요?”
“주말에요? 왜요?”
체스휘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어 내게 물었다.
“왜긴요. 같이 있고 싶으니까 묻는 거죠.”
“원래 같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말고, 단둘이 있고 싶다고 말하는 건데.”
이 사람이 또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네….
나는 괜히 오기가 들어서 자력으로 그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용을 쓰던 것을 멈추고 시선을 들었다. 체스휘가 꼭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이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해 왔다.
주말….
주말에는 퀘스트와 관련해 내가 따로 주문한 비품이 저택에 들어올 테니, 그것을 확인해야 했다. 또 좀 더 알아봐야 하긴 했지만, 콘라드가 말한 수상한 단체의 비정기적 모임이 혹시 이번 주말이 아닌가 싶어서 만약 그렇다면 거기에 잠입해 들어가 봐야 할지도 몰랐고….
하지만 이런 얘기를 체스휘에게 할 수는 없었다.
“제가 좀 바빠요.”
“주말인데요?”
“할 일이 좀 많아서요.”
체스휘가 방심한 건지, 힘을 줘서 팔을 뒤로 한 번에 빼내자 그에게 붙잡혀 있던 손이 드디어 자유를 되찾았다.
그러고 나서 체스휘에게 들으란 듯이 새침하게 콧방귀를 뀌어 준 뒤, 먼저 자리를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으악!”
아, 씨! 그런데 뒤돌아서자마자 바로 코앞에 새까만 형체가 있어서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도대체 언제 왔는지 모를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었다.
이 미친 여자가, 할 일도 없이 또 체스휘를 보러 온 건가? 유령이라 기척도 없어서 자꾸 깜짝깜짝 놀라게 되네.
그래도 어쩐 일로 이번에 또 성가시게 나한테 빙의 시도를 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가만히 있지 않고 손을 들어 나와 체스휘가 있는 쪽으로 뻗었다. 누가 목적인지 모를 손짓이었으나 어느 쪽이든 달가운 일은 아니었다.
“어휴, 깜짝이야. 여기 엄청 큰 벌레가 들어와서 날아다니네.”
그래서 자연스럽게 유령이 뻗은 손길을 피해 몸을 움직인 뒤, 체스휘를 끌어당겼다.
“체스휘 씨, 이제 방으로 갈 거죠? 데려다줄 테니까 같이 갑시다.”
“린 씨가 저를 데려다준다고요?”
“네, 그러니까 가요!”
체스휘는 내가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그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그는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는 나를 따라 느릿하게 벽에 기대 있던 몸을 움직였다.
“체스휘 씨? 조금만 빨리 걸읍시다. 원래 살짝 경보하듯이 걷는 게 건강에 좋대요.”
나는 체스휘를 스토커 유령으로부터 보호하며 무사히 방까지 데려다주려고 열심히 그의 걸음을 독촉했다. 사정을 모르는 체스휘는 그런 나를 미묘한 웃음이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우리를 보고 있는지 등 뒤로 찌를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 잠깐만요, 체스휘 씨.”
그런데 그 시선이 보통 강렬한 게 아니었다. 왠지 이전보다도 유령의 기운이 강해진 것 같은데, 역시 저걸 그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 찾아들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늘 소지하고 다니는 총에 손을 대며 뒤돌아보았다.
하지만 꼭 조금 전에 내가 느낀 시선은 착각이라는 듯이, 어느새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벌레가 도망쳤나 보네요.”
나와 같은 곳을 보던 체스휘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총에 가져다 댔던 손을 뗐다.
“그러게요….”
유령은 눈앞에서 사라졌는데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찜찜했다.
그래서 차갑게 가라앉은 기분으로 복도를 살피다가, 이번에는 체스휘가 먼저 잡아끄는 손길에 이끌려 그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