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다이안과 함께 아침 식사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도대체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내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우리 애가 걱정할까 봐 최대한 평소 같은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은 했는데, 그 보람이 있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이안도 요즘 계속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많아 내가 평소와 다른 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게 산만했던 아침 식사를 끝마치고 다이안의 방에서 나왔다.
하지만 내 걸음은 어느 한 곳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복도를 방황했다. 오늘 아침의 일을 떠올리면 체스휘를 찾아가서 아까의 상황에 대해 다시 얘기를 해 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으나, 반대로 난처한 마음이 들어 그냥 이대로 자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복도를 왔다 갔다 하며 배회하던 중에,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어젯밤에 내가 꾼 꿈이 떠올라서 멈칫했다.
“마리엔 씨!”
하지만 곧 걸음을 서둘러 그녀를 쫓아갔다. 마리엔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뭐지?”
“아니요, 별 건 아니고…. 그냥 멀쩡한지 좀 보려고요.”
마리엔의 눈빛은 평소와 다름없이 온도가 낮고 고요했다. 나는 오히려 그녀의 그런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사실은 어젯밤의 꿈이 생생해도 너무 생생해서, 이렇게 마리엔을 본 순간 무의식중에 가슴이 선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꿈에서 마리엔과 만난 후의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지만, 그전에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용인 두 사람을 내 손으로 죽였던 감각만큼은 뚜렷했다. 그래서 이후에 만난 마리엔에게도 왠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그러자 마리엔이 처음에 나를 보고 구겼던 미간을 서서히 다시 펴는가 싶었다. 뒤이어 그녀가 평소보다도 누그러진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경황이 없어서 어제 정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얘기를 아직 하지 못했군. 루스카를 도와준 건 진심으로 고맙다고 말해 두지.”
나야말로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소리를 마리엔에게 듣고 나서 깜짝 놀랐다.
우와, 마리엔에게 고맙다는 말을 듣다니 이게 웬일이야?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는 거 아니야?
“아뇨, 그 자리에 같이 있었으니까 돕는 게 당연하죠.”
“다른 양육자들은 그런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마리엔 씨는 만약 다른 호실의 아이가 위험했어도 무시하지 않았을 거잖아요?”
지난번에 세르쥬가 독이 든 차를 마실 뻔했을 때도 마리엔이 그것을 막아 줬으니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신뢰할 만했다. 아니, 물론… 그 독이 든 차를 그냥 곱게 치워 준 게 아니라 담당 양육자인 올리비아의 것과 바꿔 놓은 건 좀 애매하지만.
“그러니까 혹시 다음에 다이안에게 비슷한 일이 생기면 그때는 마리엔 씨가 도와주세요. 음, 물론 그런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는 게 제일 좋지만요.”
마리엔은 내 말을 듣고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이내 내게서 시선을 떼고 짤막하게 답했다.
“그래, 약속하지.”
나는 그냥 가볍게 한 말인데 왠지 그녀의 대답은 내 생각보다 진지하게 느껴졌다.
먼저 걸음을 떼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한 마리엔을 따라갔다.
“참, 마리엔 씨는 어제 왜 갑자기 몸이 안 좋아졌던 거예요? 혹시… 정말 저랑 머리를 부딪쳐서?”
“그런 멍청한 이유 때문은 아니니 괜한 소리 하지 말도록 해.”
내가 의심스럽게 물었으나 마리엔은 헛소리라는 듯이 내 말을 일축시켰다.
“그냥 요즘 컨디션이 별로일 뿐이야. 지금은 괜찮아졌으니 어제 같은 일은 다시 생기지 않을 거야.”
“그래요. 양육자는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이죠. 먼저 집사… 아니, 양육자가 건강해야 애들을 잘 돌보지요.”
나는 어디서 주워들은 소리를 하며 짐짓 거드름을 피우듯이 말했다. 마리엔은 그런 나를 무시했다.
나는 창문에서 스민 햇빛을 받아 어젯밤처럼 창백하게 보이는 마리엔의 얼굴을 힐끔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간지러운 입을 참지 못해 그녀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그러데 마리엔 씨. 혹시 어젯밤에… 별채에서 저하고 만나지 않았어요?”
어쩌면 오늘도 이렇게 또 별채를 운운하는 내 모습이 집착 광공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무슨 소리지? 자다가 꿈이라도 꿨나?”
아니나 다를까, 마리엔은 또 시작이냐는 듯이 내게 살짝 질린 시선을 보냈다.
“아니면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을 별채에서 만났다던가….”
“안됐지만 어제 난 별채에 간 일 자체가 없는데.”
처음에는 다른 고용인들이 옆에 있어서 말을 아끼는 게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마리엔의 얼굴을 보니 진심으로 내 말이 뜬금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걸 보니 비로소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그럼 그렇지. 그런 건 꿈인 게 당연한데, 나는 도대체 뭘 확인하려고 마리엔에게 이런 질문을 한 걸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럼 마리엔 씨, 전 먼저 가 볼게요. 몸조리 잘하세요!”
아무튼 아침 내내 묘하게 기분을 찜찜하게 만들던 궁금증을 해소했더니 속이 다 시원했다. 그래서 한결 밝은 목소리로 마리엔에게 인사를 남긴 뒤 먼저 자리를 떠났다.
“이제 오네요. 아침 식사 시간은 아까 끝났을 텐데.”
아, 체스휘를 잠깐 잊고 있었다….
어젯밤의 묘한 꿈이 정말 단순한 개꿈이었다는 확신을 얻고 발걸음도 가볍게 내 방으로 향했는데, 맞은편 복도 창문 앞에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서 있었다.
‘아, 맞아. 꿈이 아닌 건 이쪽이었지….’
체스휘는 나를 보고 창틀에 걸터앉듯이 기대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웠다. 그런 뒤 주춤거리는 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 치려다가 애써 움직임을 멈췄다.
“체스휘 씨…. 제가 방으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정말요?”
내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꺼낸 말을 듣고 체스휘가 반문했다.
“왠지 아닐 것 같은데.”
이어진 말투는 가벼웠지만, 그 내용은 꼭 내 속을 꿰뚫어 본 듯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솔직히 이대로 내 방에 들어갔으면 오늘 중에 다시 마음먹고 체스휘를 만나러 가기 어려웠을 것 같았다.
사실 내가 이러는 이유는 남의 방에서 눈을 뜬 상황에 대한 뻘쭘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체스휘를 눈앞에 두고 있으면 왠지 모를 미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꼭 본능이 머릿속에서 어떤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이런 게 처음이라 나도 정확히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이렇게 체스휘와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전과는 사뭇 다른 기이한 느낌이 척추를 쓸어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도 슬쩍 눈을 움직여 체스휘와 맞대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그래도 린 씨가 그렇게 말해 주니까 기쁘네요.”
어쩌면 이것도 단순한 기분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체스휘가 꼭 그런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소리 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냥 방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보고 싶어서 먼저 찾아왔어요.”
꼭 초식 동물을 눈앞에 둔 배부른 육식 동물이 선심 써서 한 발 뒤로 물러나 주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저기, 체스휘 씨. 사실 제가 아침에 말했듯이 어제 일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요.”
나는 뭔가 이 상황이 미묘하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애써 열어 체스휘에게 말했다. 이왕 만난 김에 아침에 끝내지 못한 대화를 마저 해야 할 것 같았다.
“일단 오밤중에 마음대로 방에 찾아가서 죄송하고, 혹시 제가 체스휘 씨한테 달리 실수한 게 있으면 사과할게요. 그러니까 어제 일은 잊어 주시면….”
그런데 왠지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이을수록 점점 더 까닭 모를 요상한 느낌이 들었다.
“음, 어떤 사람들이 보는 책에서 이런 상황을 표현하는 말이 있던데.”
그게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잠시 후 이어진 체스휘의 말을 듣고 깨달았다.
“아, 분명 먹고 튄다고 했던가….”
“뭐…!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얼른 그의 말을 막았다.
먹고 튀긴 뭘 먹고 튀어…?!
나는 당황해서 아무도 없는 복도를 괜히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체스휘를 붙잡고 아예 복도의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 목소리를 더 낮추어 속닥거렸다.
“우리 어제 아무 일도 없었잖아요.”
체스휘는 얌전히 내 손에 밀려 벽에 몸을 기댄 채로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기억도 안 난다면서 어떻게 아무 일도 없었다고 확신하는지, 나는 그게 더 신기한데.”
체스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그의 머리칼이 밝은 오전 햇살에 황금빛으로 반짝이며 귀 옆으로 흐트러졌다.
꼭 신비로운 비밀이 담긴 것 같은 보랏빛 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눈을 불시에 마주한 순간,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설마 진짜 무슨 일이 있었나?’
갑자기 어젯밤의 내가 조금 의심스러워졌다.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이렇게 얄팍했다니 통탄할 노릇이었지만, 이렇게 체스휘의 얼굴을 정면에서 마주하니 갑자기 그의 말이 타당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설마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물론 멀쩡한 정신일 때는 주로 내가 체스휘에게 뭔가를 당하는 편이었지만, 어젯밤에는 나도 이상한 상태였던 데다가 내 발로 체스휘의 방에 쳐들어갔다고 하니까….
나는 오늘따라 아침 햇살에 유독 화사하게 반짝이는 내 취향의 얼굴을 보면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