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08)화 (108/300)

처음에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인지가 잘 되지 않았다. 지나치게 생생한 꿈을 꾸고 깨어난 탓인지, 아직도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내 손으로 사람을 죽이던 감각이 피부에 남아 있는 듯했다. 마지막에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울리면서 눈앞이 흔들리는 빛으로 어지러워졌던 것을 떠올리자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몸이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이상할 정도로 아팠다. 살이 찢어질 것처럼 등 전체가 화끈거리며 아픈 와중에, 가슴속에까지 지끈거리는 통증이 엄습했다. 마치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흐으….”

지금의 나는 명백히 어딘가 이상했다.

조금 전에 꾸었던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나도 꼭 내가 아닌 것만 같았다. 지금도 끔찍한 고통을 인지하자마자 내 것이 아닌 듯한 공포가 머릿속을 잠식하며 이성을 마비시켰다.

“아, 아파….”

예전에도 임무를 수행하거나 훈련을 할 때 가끔 무모하게 움직여 지금처럼 몸이 망가질 때가 있었다.

“대, 주교님….”

나는 그때마다 못마땅하게 혀를 차면서도 늘 자비를 베풀어 주었던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내 몸을 만들고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주인.

가끔 무섭도록 화가 났을 때는 화풀이 삼아 나를 복구가 어려울 정도로 망가뜨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중에는 늘 원래대로 말끔하게 고쳐 주었었다.

이번에도 뜻하지 않게 몸에 결함이 생겼을 때 바로 스텔라에 연락을 취했어야 했는데, 왜 여태 보고하지 않고 있었지?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으로 발을 딛자마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래도 겨우 몸을 일으켜 꾸역꾸역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에서 나가, 어두운 복도를 혼자 걸어갔다.

아니, 아니다. 어쩌면 지금 이것도 꿈의 연장인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이렇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는 게 분명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분명한 목표와 목적을 가지고 어딘가로 향했다. 뿌연 막에 가려진 듯이 머릿속이 혼몽한 와중에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큼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나는 육신을 재복구하기 전에 내가 인지해야 할 사항을 되뇌어 생각했다.

린 도체스터. 스텔라의 3등급 심문관. 릭 도체스터의 수양딸. 나이는 23세.

직속상관은 2등급 심문관인 라파엘 카드리고. 현재 레드포드 저택에 잠입해 1급 비밀임무를 수행 중.

현재까지 육신을 복구한 횟수 43회.

스텔라의 내부 실험으로 확인된 최대 복구 횟수 72회. 그러나 개인차가 있어 평균적으로는 60회로 상정.

육신의 기능을 복구하고 나면 새로운 인격이 형성돼, 완전히 융합되기 전에는 혼란이 올 수 있으니 위의 사항을 항시 인지할 것.

그렇게 머릿속으로 내가 기억해야 할 정보를 읊조리며 걷던 중에, 마침내 눈앞에 내가 간절히 갈망하던 사람이 있는 방이 나타났다.

실제로는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 텐데, 몸이 천근만근으로 무거워서 그런지 굉장히 오랫동안 복도를 걸어온 것 같았다.

나는 갈증과 비슷한 갈급한 마음을 느끼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있던 남자는 꼭 내가 이곳에 올 줄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달빛을 등진 채 창가에 기대서서 내게 조용히 시선을 보내 왔다. 서늘하면서도 고요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입 안이 한결 더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를 도와줄 사람을 눈앞에 두자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정작 상대방은 나를 반기지도 않고, 먼저 내게 말을 걸어 주지도 않아서 서운한 원망이 밀려들었다.

“아… 파….”

그래서 입술을 달싹여 서러운 투정을 부리듯이 읊조렸다.

“나 아파….”

하지만 그는 나를 여전히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당연히 내 앞에 있는 남자가 나를 만든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를 보자마자 이 사람이 내 새로운 주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방에서 나와 꼭 짙은 꿀 냄새에 홀린 벌이나 나비처럼 저절로 걸음이 이곳으로 향했을 때부터 이미 나를 도울 수 있는 건 이 남자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 좀….”

“싫어.”

그러나 귀에 울린 것은 짤막한 거부의 말이었다.

그 순간 하늘이 무너졌다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심장이 쿵 떨어졌다.

“이 지경이 되어야만 찾아와서 도와 달라고 하고,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그래서 도와주기 싫어.”

남자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입을 다물고 내 반응을 확인하듯이 적막한 시선만을 보냈다. 나는 처음 겪는 상황에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바닥….”

그렇게 입술만 뻐끔거리다가, 여전히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에 다행히 내가 잘 아는 방법 하나가 겨우 떠올랐다.

“바닥에, 엎드려서… 빌까?”

“지금까지 그렇게 하라고 배웠나?”

하지만 시야에 비친 얼굴에 미묘한 찡그림만 더해졌다.

“하지 마. 더 화날 것 같으니까.”

그 말에 머리가 더 새하얗게 굳었다.

“그럼 어떻게 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 상황이 재미없는 듯이 지루함을 담은 나른한 어조의 목소리가 느릿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스스로 생각하라는 듯이 그는 다시 입을 다물고 나를 응시했다.

나는 문 앞에 서서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하는 걸 멈추고 창가에 있는 남자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잠시 후,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가 얕은 한숨과 실소가 뒤섞인 애매모호한 혼잣말을 읊조렸다.

“왜 그렇게 귀엽게 쳐다보지…. 원래는 좀 더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마음 약해지게.”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나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내가 불안감에 숨이 막힐 때쯤, 나를 지그시 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주지는 않을 거야.”

나지막한 음성이 달빛에 실려 귀에 울렸다.

“직접 나한테 와. 난 여기서 움직이지 않을 거니까.”

갈망했던 허락의 말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나한테 기회를 주려는 것 같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조각나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창가에 있는 남자에게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는 자신에게 조금씩 다가오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내 걸음이 아주 느려서 답답했을 텐데도 나를 재촉하거나 힐난하지도 않았다.

마침내 그의 바로 앞까지 다가가, 걸음을 멈췄다.

“이제… 다리에 매달려서, 빌까…?”

“난 그런 취향 아닌데.”

하지만 이다음에는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주저하다가 조심스럽게 묻자, 앞에서 작은 헛웃음이 내뱉어졌다.

“그거 말고, 다른 거 해 봐.”

그래도 남자는 친절하게 힌트를 줬다.

“다른 새끼의 역겨운 취향에 맞춰서 하던 거 말고.”

그런 뒤 그는 이다음은 정말 알아서 생각하라는 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내려다봤다.

“방금 그 손으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내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제일 하고 싶던 거.”

“…….”

“생각해 봐. 답은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나는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또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는 그런 나를 조용히 기다렸다.

밤의 적막함 속에서 마주한 사람의 눈을 올려다봤다.

여전히 고민스러웠지만 그래도 이 사람은 확실히 원래의 내 ‘아버지’와 다른 것 같았다.

나는 망설이다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창밖에 뜬 달이 좀 더 가까워졌다. 싸늘한 복도를 걸어오는 동안 차갑게 식은 몸에 따뜻한 온기가 스몄다. 달빛을 받아서 유독 희게 빛나는 남자의 뺨과 목덜미에 얼굴이 비벼졌다. 지금은 환한 금발로 보이는 머리칼이 내 옆머리를 간지럽혔다.

남자는 잠깐 아무 말도 없었다. 그 반응에 혹시 실수했나 싶어서 몸이 굳었다.

사과하며 다시 몸을 떼려는 순간, 내 몸에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나한테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어?”

낮게 흘러나온 숨결이 내 어깨와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희미하지만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에는 분명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그 반응을 놓칠세라 무의식중에 그의 어깨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다행히 맞닿은 사람은 나를 밀어내지 않고 내 행동이 기꺼운 듯이 낮은 웃음을 내뱉었다.

“그것 봐…. 역시 나밖에 없잖아.”

꼭 아주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쓰다듬듯이, 애정이 담긴 손길이 식은땀에 젖은 등과 머리를 쓸어내렸다.

“그런데 왜 자꾸 한눈을 팔고 그래요, 마음 아프게.”

귓가에 다정한 속삭임이 내려앉는 순간 비로소 완전한 안도감이 찾아들었다.

이제야 내가 알던 체스휘 같았다.

두려움에 굳었던 몸이 풀리면서 어느새인가 고여 있던 눈물이 체스휘의 어깨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걸 느낀 듯이 체스휘가 물었다.

“우는 거야?”

“아니….”

“왜 울어? 무서워서?”

혹시 또 화를 돋울까 봐 안 우는 척하려고 했는데, 이제는 완전히 마음이 풀린 듯이 체스휘가 나를 달래는 것처럼 다정하게 물어봐 줘서 눈물이 자꾸 더 나왔다.

나는 목멘 음성으로 아주 작게 “응….” 하고 말하면서 체스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가 화난 것 같아서, 그게 무서웠나?”

서러움과 안도감이 엉망으로 뒤섞여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체스휘가 나를 끌어당겨 아예 그의 다리 위에 앉혔다. 나는 체스휘에게 완전히 폭삭 안겨서 이불 속에 머리를 숨기면 온몸이 다 가려지는 줄 아는 멍청한 개처럼 눈물에 젖은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더 깊게 파묻었다.

“이상하네…. 나 때문에 우는 걸 보니까 기분이 좋아.”

체스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 말처럼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나는 이렇게 억울하고 서러운데, 체스휘는 웃는 걸 보니 불쑥 모난 마음이 자라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