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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104)화 (104/300)

햇볕이 따뜻하고 풀 냄새가 상쾌한 다음 날 오후.

“마리엔 씨, 좋은 오후네요. 루스카도 안녕!”

나는 마침 정원에서 마주친 마리엔과 루스카에게 친근한 이웃집 사람처럼 인사를 건넸다.

사실은 마리엔이 이 시간에 주로 루스카와 산책을 나온다는 걸 알고, 다이안이 수업을 듣는 동안 겸사겸사 일광욕도 할 겸 일부러 정원에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마리엔이 벤치 뒤쪽의 덤불 사이에 쭈그려 앉아 있던 나를 이제야 발견한 듯이 싸늘한 시선을 미끄러뜨렸다.

어휴, 춥다. 지금은 가을인데 마리엔의 눈빛을 받으면 꼭 여기가 시베리아 벌판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루스카. 너무 멀리 가진 말고 근처에 있으렴.”

“네.”

그리고 마리엔은 꼭 내가 병풍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무시했다.

루스카는 햇볕이 따스한 정원에서 혼자 책을 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다. 지난번처럼 오늘도 그는 마리엔의 시선이 닿는 큰 나무 아래로 가서 혼자 책을 펼쳤다.

“저기요, 마리엔 씨?”

“…….”

“1호실 양육자님? 저기요, 마리엔 언니?”

“…….”

자리에 가만히 서서 루스카를 지켜보는 마리엔에게 계속 말을 걸었으나 그녀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흐음, 내가 꽃 덤불 속에 있으니까 꽃처럼 보이나…. 저기요, 마리엔 씨. 그래도 일단은 제가 사람인데요. 제가 아무리 꽃 같아도 대답은 좀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도 덤불 사이에서 마리엔에게 들으란 듯이 꿋꿋하게 종알거리자 마침내 그녀가 반응을 보였다. 그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얕은 실소를 흘린 것뿐이었지만, 나는 그것을 똑똑히 듣고 귀를 쫑긋 세웠다.

“어제 7호실이 루스카의 방 앞에서 봤다는 쥐새끼가 설마 본인이었나? 그런 곳에 숨어서 사람을 훔쳐보고 있다니 취미 한번 저급하군.”

물론 마리엔에게서 다정하고 상냥한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마리엔은 나를 피해 자리를 옮기지는 않고 옆에 있는 벤치에 그대로 앉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가 더 질척대도 채찍을 뽑아 들지는 않을 듯해서, 나도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해예요! 전 우리 다이안한테 주려고 행운의 부적을 찾고 있었단 말이에요.”

옷을 훌훌 털고 걸어가서 냉큼 마리엔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내 말이 마리엔의 관심을 조금은 끌었는지, 여전히 차가운 푸른 눈이 내 쪽으로 힐끗 움직여졌다.

“행운의 부적?”

“이거요. 아까 보니까 저택 정원에 클로버가 있더라고요?”

하지만 마리엔은 내 손에 들린 귀여운 네 잎 클로버를 보고 비웃음을 보냈다.

“지천에 깔린 게 그 초록 풀인데 뭐가 행운의 부적이라는 거지?”

“에헤이, 뭘 모르는 말씀을. 이파리가 세 개인 건 많지만 네 잎짜리는 아주 드물거든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찾아온다고 하잖아요. 설마 처음 들어 봐요?”

혹시 이 세계에는 그런 속설이 없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마리엔은 내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한결 냉담해진 눈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다가 시선을 거둔 채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마리엔은 오늘도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레이스 리본으로 느슨히 묶인 붉은 머리카락이 꼭 장미 다발처럼 흩날렸다.

나는 마리엔의 옆모습을 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마리엔 씨, 요즘도 밤에 별채에 가요?”

“내가 별채에 가든 말든, 7호실이 무슨 상관이지?”

마리엔은 나한테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밤에 혼자 그렇게 움직이는 건 위험하니까요.”

“7호실이 할 말이던가?”

그러다 내 말이 우습다는 듯이 마리엔의 붉은 입술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 전 밤에 별채에서 나와 마주친 건 꼭 다른 사람이었다는 듯이 말하는군.”

아니, 물론 그건 그렇지만 말이다. 하지만 나는 콘라드의 약이 남아 있어서 검은 공기 중독 증상으로부터 자유로웠으니 괜찮았다.

게다가 마리엔 씨, 당신이 찾고 있는 여동생이… 요즘 좀 이상하단 말입니다.

지금도 당신 옆에 서서 루스카를 음침하게 바라보고 있다고요.

“아무튼 마리엔 씨, 이건 진심으로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되도록 혼자 움직이지 말고 루스카도….”

퍼억!

그런데 내가 막 마리엔에게 오지랖을 부리려고 할 때, 무언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아얏!”

“윽…!”

내 머리를 치고 날아간 공이 통통통, 잔디밭 위를 경쾌하게 튀어 굴러갔다. 나와 마리엔이 동시에 신음했다.

“마, 마리엔 님!”

“헉, 괜찮으세요?”

조금 떨어져 서 있던 메이드들이 우리의 참사를 보고 황급히 달려왔다.

나는 좀 서러워졌다. 아니, 물론 저 메이드들이 죄다 마리엔의 소속인 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날 걱정해 주는 사람이 이렇게 한 명도 없다니! 역시 각박하다, 레드포드 저택!

“마리엔 씨, 괜찮아요?”

하지만 사실 나도 공에 맞은 곳보다는, 공을 맞고 머리가 튕겨져 옆에 있던 마리엔과 2차 충돌한 부위가 더 얼얼했다. 그래서 일단은 눈물이 찔끔 맺힌 눈을 돌려 마리엔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리엔도 나와 부딪친 옆머리를 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마자, 장갑을 낀 손 사이로 서슬 퍼런 빛을 내고 있는 마리엔의 눈이 나를 꿰뚫었다.

나는 또 한기가 들어서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니, 마리엔 씨…. 이건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인 일로,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거든요?”

와, 눈빛으로 사람도 죽이겠다. 하지만 나도 억울했다! 나도 선량한 피해자란 말이다!

나는 이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해 공이 날아온 곳을 확인했다.

다음 순간, 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사람이 깜짝 놀란 듯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공교롭게도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은 내게도 낯익은 사람인, 마리엔의 메이드 멜로디아였다.

지난번에 화랑에서 나와 마주치고 기절했던 이후로 내 그림자만 봐도 도망쳐 다니더니, 오늘은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멜로디아를 살짝 짜증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설마 지난번에 나한테 물벼락을 내린 거로는 모자랐나? 기껏 사람이 넓은 마음으로 그냥 넘어가 줬더니, 이번에는 아예 이런 식으로 사람을 공격해? 이래서 호의를 계속 보이면 호구 된다는 말이 있는 건가?

그런 떨떠름한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멜로디아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변명했다.

“제,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이에요!”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부정하던지, 그녀의 진실됨이 눈빛만으로도 전해져 올 정도였다.

하긴, 지금도 저렇게 사색이 된 채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사람이 그런 간 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긴 한데….

그러다 문득, 나는 멜로디아의 간절한 눈빛이 꼭 무언가를 알려 주려는 듯이 그녀의 뒤쪽을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잘 보니, 멜로디아가 잔디 위에 서 있는 모습도 어딘가 어정쩡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의 치마를 붙잡고 있는 작은 손을 발견했다.

때마침 상황을 살피려는 듯이 멜로디아의 뒤에 숨어 있던 소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런데 그의 분홍색 머리통이 참으로 눈에 익었다.

“비비? 저 공 네가 던졌니?”

“히익!”

분홍 머리칼의 소년이 멜로디아의 치마를 놓고 후다닥 뛰어서 도망쳤다.

아우, 저 녀석이 진짜!

나도 오늘은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비비를 쫓아가려고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때, 무언가가 물에 풍덩 하고 빠지는 듯한 소리가 정원 안에 울렸다.

“루스카 님!”

메이드들이 놀라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도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도대체 언제 연못 가까이 다가간 건지,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루스카!”

당연히 마리엔이 곧장 자리를 박차고 뛰어갔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금방 비틀거리며 잔디 위에 주저앉았다.

“마리엔 씨!”

헉, 마리엔이 왜 저러는 거지? 설마 나랑 머리를 부딪친 후유증인가? 제 머리가 그 정도로 돌머리인 건 아닌데요? 아마도….

“루스… 카….”

마리엔은 고통스럽게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일어나 루스카에게 가려고 했다.

“제가 갈게요!”

아무튼 상황이 다급해 보였기에, 나는 비비를 쫓는 걸 그만두고 당장 연못으로 달려갔다.

물에 빠진 루스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마음이 더 급해졌다. 바로 연못으로 뛰어들자 곧장 온몸으로 냉기가 밀려들었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지난번에 체스휘가 빠진 걸 봤을 때는 수심이 그렇게 깊은 것 같지 않았는데, 막상 연못에 들어와 보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물에 잠기고도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찾던 소년을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물속에는 루스카 혼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느새 루스카를 따라 들어온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밑으로 가라앉고 있는 소년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녀가 루스카를 더 깊은 물 속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를 밖으로 꺼내 주려고 하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지금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또 루스카에게 빙의라도 시도하고 있었다면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을 테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쨌든 아직 악령이 되지도 않은 죽은 영혼이 산 사람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루스카의 반대쪽 팔을 붙잡아 세게 당기자, 여인의 손이 떨어졌다. 나는 의식을 잃은 루스카를 데리고 수면 위로 올라갔다.

“푸하!”

“루스카 님!”

연못가에 다가와 있던 메이드들이 서둘러 루스카를 끌어 올렸다. 다행히도 잔디밭 위에 눕혀진 루스카가 기침과 함께 물을 토해 냈다.

“루스카 님, 정신 차리세요!”

“마리엔 님, 루스카 님은 괜찮으세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해서 움직이지 마세요.”

“거기 뭐 해! 빨리 의원님을 불러!”

마리엔과 루스카 둘 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탓에, 정원은 메이드들의 소란으로 금방 시끄러워졌다.

그래도 두 사람 다 메이드들이 보살피고 있어서, 내가 달리 더 해 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물에 젖어 거추장스럽게 달라붙는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충 짜내며 갑자기 코가 간지러운 느낌에 재채기를 했다.

“린 씨…. 지금 거기서 뭐 해요?”

그때 누군가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앗, 체스휘다! 다들 루스카랑 마리엔만 신경 써서 조금 서운할 뻔했는데, 그래도 나한테 관심을 주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다.

하지만 반색해서 고개를 돌린 나와 달리 체스휘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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