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보니 깨끗이 정리되어 있던 엠버의 방과 지저분하던 세라의 방에서 이 쪽지 말고 똑같은 물건을 더 봤던 것 같다. 그 두 사람뿐만이 아니라, 그들과 모종의 연결점이 있는 콘라드의 연구실에서도 같은 물건을 보았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특별한 물건은 아니고 지극히 일상적인 소품이라서, 한 번도 그것을 중요한 단서라고 의심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굳이 그들의 방에 있는 공통점을 찾자니, 의외로 가장 먼저 그 물건이 떠올랐다.
엠버의 방 테이블 위에 매일 놓여 있던 것. 또 세라의 방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 속에 구겨진 채 깔려 있던 것. 그리고 콘라드의 연구실에 갈 때마다 그가 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표시하고 있던….
‘신문?’
나는 쪽지를 다시 살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이런 비슷한 퀴즈를 어디에서 봤던 것 같기도 했다.
대충 어떤 책의 몇 번째 페이지, 몇 번째 줄, 몇 번째 단어를 조합하면 문장이 나오는 퀴즈였는데….
혹시 이 경우에도 비슷한 규칙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세라의 방에서 서랍을 뒤졌을 때 상자 밑에 깔려 있던 낡은 신문을 떠올렸다. 정작 그때는 상자 속에 곱게 보관된 것도 아니고, 그냥 서랍 밑바닥에 신문 다발째로 깔려 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었다.
실제로 세라의 방을 조사하는 퀘스트에 지정된 세 가지 단서에도 신문은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막상 지금 쪽지의 암호를 풀기 위해 고민하던 중에 그 신문이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걸 보니, 어쩌면 세라의 서랍을 처음 봤을 때부터 내심 그게 마음에 걸렸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헛다리 짚는 걸 수도 있는데… 어차피 다른 실마리도 없고, 일단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으니까.’
하지만 문제는 세라의 방에 다시 들어가서 그 신문을 훔쳐 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거였다. 방에 침입자가 들어온 걸 세라도 눈치챘으니, 전보다 경계심이 높아졌겠지.
그럼 똑같은 신문을 구해서 확인해 보는 게 차선책인데, 거기에 있던 신문이 정확히 어디의 것인지 몰랐다.
레드포드 저택이 있는 이 18세계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당연히 이곳의 사정을 담은 신문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고용인들은 보통 레드포드 저택의 정문으로 바로 연결되는 제19세계의 일간지나, 본래 자신이 살던 세계의 주간 신문을 구독하는 것 같았다.
시스템 창의 인물 정보에 콘라드는 제40세계 출신이었고, 세라는 제27세계 소속이라고 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라의 경우 감춰진 정체가 있어, 진짜 소속은 어디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언뜻 봤을 때, 서랍에 있던 신문의 날짜가 그렇게 오래전은 아니었어.’
나는 세라가 서랍에 보관하고 있던 신문에서 스치듯이 본 내용을 또 떠올려 보려고 끙끙거렸다.
분명 로젠버그의 화재 사건… 뭐 그런 게 신문 일면에 적혀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니 지명과 사건을 찾아보면 세라의 방에 있던 신문이 어느 세계의 것인지 알 수 있을 듯했다. 어쩌면 레드포드 저택의 고용인들 중에 그녀와 같은 것을 구독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고 말이다.
‘어?’
그때, 문득 창밖에서 작은 불빛이 깜빡이는 걸 발견했다.
나는 쪽지를 살피던 시선을 들어 불빛이 비친 곳을 살폈다. 잠시 후, 다시 한번 어둡던 창밖에 은은한 빛이 깜빡였다.
아무래도 위치상 저곳은 별채인 것 같았다.
‘혹시 또 마리엔인가?’
미심쩍은 마음에 창밖을 한동안 더 관찰했으나 그 후로 불빛이 다시 깜빡이는 일은 없었다.
나는 얼마 전에 별채에서 마주친 마리엔의 모습을 떠올리며 잠깐 고뇌했다.
하지만 내가 또 끼어드는 건 오지랖인 것 같기도 했고, 이러다가는 콘라드뿐만이 아니라 마리엔에게도 스토커 취급을 받을 것 같았다. 게다가 불빛이 더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별채에 있던 사람이 방으로 돌아간 것 같기도 했고.
그래서 나도 그냥 별채의 불빛에서 관심을 끄고 보던 것을 정리한 뒤 잠자리에 들었다.
***
늦은 밤.
레드포드 저택의 메이드 멜로디아는 손에 등불을 들고 혼자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었다.
“휴우, 이제 정말 가을은 가을인가. 밤이 되니까 생각보다 춥네….”
그녀는 한기가 스민 몸을 파르르 떨면서 어깨에 걸친 숄을 더 단단히 여몄다.
불안함이 깃든 눈이 조용히 주변을 살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잠에 빠진 고용인 숙소의 건물은 오늘도 아주 조용했다. 그래서인지 괜스레 피부에 스미는 저택의 고요함과 냉기가 더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멜로디아는 룸메이트인 샤밀리아를 어떻게든 깨워서 같이 나올 걸 그랬다고 잠깐 후회했다. 하지만 샤밀리아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더군다나 오늘은 금요일이라, 그들은 저녁 늦게까지 동료 메이드들과 소박한 음주 파티를 즐긴 참이었다. 그래서 곯아떨어진 샤밀리아는 멜로디아가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결국 멜로디아는 이렇게 혼자 작은 등불과 성수 꽃에 의지해 방을 나서야만 했다.
‘화장실이 급하지만 않았다면 나도 그냥 방에 있었을 텐데.’
멜로디아는 발을 재게 움직여 으스스한 복도를 서둘러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검은 그림자를 드리운 괴물이 날카로운 도끼를 들고 어둠 속에서 나타날 것만 같았다.
요즘도 그녀가 종종 꾸는 악몽 속에서 그 괴물은 7호실 양육자인 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멜로디아는 일전에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이 화랑에 갔다가 린을 만나, 그녀의 도끼질에 놀라 기절했던 적이 있었다. 그전에는 1호실 양육자 마리엔에 대한 충성심으로, 린에게 양동이째로 물을 쏟아부은 전적이 있는 메이드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밤의 사건 이후로 멜로디아는 몸가짐을 극도로 조심하며 린을 필사적으로 피해 다녔다. 당연히 그날 공포의 밤을 맛본 뒤로는 지금처럼 한밤중에 방 밖으로 나온 적도 없었다.
지금도 그녀는 후회하고 있었다.
아, 내가 왜 그렇게 술을 많이 마셨을까. 그 악몽의 밤으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그새 마음이 느슨해졌나?
이렇게 오랜만에 한밤중에 방 밖으로 나와 보니, 그때의 공포심이 다시금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래도 다행히 그녀가 화장실에 무사히 도착해 다시 밖으로 나올 때까지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저벅.
뒤쪽에서 작은 발소리가 들려온 건, 그녀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다시 방을 향해 걷던 때였다.
멜로디아는 발소리를 듣고 숨을 작게 들이마시며 걸음을 멈추었다. 잠깐 가만히 서서 귀를 기울였으나, 그녀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발소리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너희 그 얘기 들었어? 요즘 레드포드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한 명씩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
그 순간, 아까 함께 술을 마시던 동료 메이드들 사이에서 나왔던 이야기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더 이상한 건, 분명 숫자는 줄었는데 누가 없어졌는지 아무도 기억을 못 한다는 거야!”
“3호실 양육자님 방에서 일하는 에이프릴한테 들었는데, 걔가 살던 곳에서도 비슷한 소문이 있었대. 그래서 요즘 고용인들 사이에 떠도는 말이 사실이라면, 혹시 이 저택에 있는 악마에게 먹혀서 존재 자체가 잊힌 것일지도 모른다고….”
등 뒤로 배어난 식은땀이 또르륵 굴러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야, 저런 건 고용인들이 재미 삼아 떠드는 의미 없는 잡담일 뿐이었다. 어쩌면 또 지난번처럼 7호실 양육자가 밤중에 저택 안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거, 거기 누구야…!”
멜로디아는 등불을 방패처럼 손에 든 채 어깨에 걸친 숄이 휘날리도록 급히 몸을 돌렸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그래도 차라리 유령이나 악마 같은 것보다 7호실 양육자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끼를 들고 설칠지언정, 적어도 린에게 멜로디아를 해칠 생각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마침내 멜로디아의 눈앞에 나타난 건 순진무구한 미소를 띤 분홍 눈의 여인이 아니라, 싸늘한 얼굴을 한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마리엔 님?”
멜로디아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얼굴을 보자 급격히 안심한 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방금은 차라리 어둠 속에서 나타난 게 7호실 양육자이길 바랐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악마와 비교했을 때 그녀가 낫다는 것뿐이었다. 당연히 멜로디아가 모시는 주인인 마리엔과 비할 건 아니었다.
“마리엔 님… 이 늦은 밤중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멜로디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마리엔에게 서둘러 다가갔다.
마리엔은 손에 불이 꺼진 등불을 들고 있었다. 멜로디아와 마찬가지로 잠옷 차림인 그녀는 검은 상복을 입고 있을 때보다 다가가기 쉬워 보였다.
“마리엔 님…?”
그런데 멜로디아가 가까이 다가가 바로 앞에 멈춰 설 때까지 마리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멜로디아는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여인에게서 이상함을 느낀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때, 마리엔의 입술에 초승달처럼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운이 나쁜 아이구나. 오늘은 이 정도에서 끝내고 돌아가려고 했는데.”
등불의 불빛에 반사된 날카로운 무언가가 한순간 반짝였다. 낯선 통증이 멜로디아의 몸을 파고들었다. 힘이 풀린 손에서 떨어지는 등불을 마리엔이 붙잡았다.
멜로디아는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풀썩 쓰러졌다.
고요한 불빛이 아주 잠깐 시야에 어렸다가, 곧 무거운 침묵과 암흑에 덮여 완전히 사라졌다.
***
지이익….
잠시 후 무언가를 바닥에 끄는 소리가 어두운 복도에 길게 이어졌다.
흰 잠옷 자락이 밤의 끝자락에 내려앉은 새벽 공기처럼 어둠 속에서 희게 물결쳤다.
붉은 머리칼을 가진 여인은 죽은 메이드를 데리고 눈앞에 열린 짙은 암흑 속으로 몸을 들였다.
쿵!
그리고 잠시 후, 지하실의 문이 조용히 닫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