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자리를 떠난 듯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부터 옆에서 느껴지던 찌를 듯한 시선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아니, 이제 그만….”
하지만 체스휘는 아직까지도 나한테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질식할 것 같아서 결국 있는 힘을 다해 그를 확 밀쳐 냈다.
“그만하라고, 헉… 했잖아요.”
그제서야 떨어져 나간 체스휘가 나한테 깨물린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그런데 흐트러진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남자의 모습이 참… 참….
체스휘 씨 진짜… 그렇게 안 봤는데, 왜… 왜 이렇게….
‘왜 이렇게 갑자기 사람이 야해 보이지?’
당혹감에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몰리면서 그렇지 않아도 단기간에 급속도로 늘어 있던 심박수가 수직 상승했다. 지금 체스휘와 내가 어떤 자세로 있는지, 갑작스러운 깨달음마저 머리를 스치자 화들짝 놀라서 몸을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내가 좀 억울한데….”
하지만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는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체스휘는 내 뒷머리를 붙들고 있던 손가락을 세워 내 목덜미를 간지럽게 살살 쓸면서 젖은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 올렸다.
이후에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충격에 빠트리기에 충분했다.
“린 씨가 먼저 내 옷을 벗겼잖아요.”
“네? 아니, 그건…!”
“방에 들어오자마자 갑자기 이렇게 나를 침대에 밀친 것도 린 씨고.”
“그건…! 아니, 그렇긴 한데….”
기가 막히긴 했지만,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라서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체스휘를 보던 눈도 흔들렸다.
나는 그런 의도로 한 행동이 아니었는데 막상 체스휘의 입으로 들으니, 내가 먼저 굉장히 적극적으로 그를 꼬드긴 것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렇게 억울한 눈으로 날 보면 어떻게 해요.”
체스휘는 유감스럽다는 듯이 짐짓 표정을 흐리며 나를 보았다. 나는 입술만 달싹이면서 황당함에 헛숨을 내뱉었다.
그래, 객관적으로 봤을 때 체스휘의 말에 틀린 구석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래도 억울한걸!
나는 진짜 체스휘랑 이런 질척한 짓을 할 생각으로 그런 게 아니라, 좀 더 순수한 마음이었단 말이다. 그런 나를 먼저 건드린 건 체스휘였는데, 왜 내가 순진한 사람을 먼저 잡아먹어 놓고 발뺌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된 거지?
“그래도… 그래도 내가 언제 이런 것까지 해도 된다고 했어요?”
결국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이런 조잡한 것이었다.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잖아요?”
그리고 체스휘는 내 생각보다 더 뻔뻔스러웠다. 꼭 말장난하듯이 여유로운 말투로 반박하는 그에게 한마디 더 쏴붙여 주고 싶었지만, 다음 순간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면서 속삭이는 목소리에 다시 한번 목이 막혔다.
“혹시 싫었어요?”
체스휘의 보라색 눈이 정면으로 나를 비추자, 왠지 입 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 들어서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꼭 반응을 살피려는 것처럼 체스휘의 손이 내 목덜미를 스치듯이 천천히 훑었다.
“응? 싫었어?”
채근하듯이 내 눈을 보며 다시 한번 물어 오는 목소리에 기묘하게도 목이 탔다.
참나, 어이없어…. 뭐 그런 걸 물어봐?
당연히 싫었으면 이렇게 우스운 실랑이를 하는 게 아니라, 당장 주먹을 말아쥐고 분노의 보복을 가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런 말을 하자니 왠지 낯부끄러운 기분이 들었고, 그렇다고 해서 체스휘에게 보란 듯이 반발해서 ‘그래, 싫었다!’라고 말하자니 입에 풀칠이라도 한 것처럼 쉽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속으로 갈팡질팡하던 때, 간지럽게 내 목덜미를 쓸고 내려간 손이 등에 닿았다. 그 순간 잊고 있던 통증이 밀려들어서 몸을 움찔 떨었다.
때마침 또 체스휘에게 홀릴 뻔했던 정신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원래 체스휘에게 지난번에 내 등의 상처를 치료할 때 사용했던 약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분위기 파악을 못 하지는 않았다.
“몰라요. 난 나갈래요…!”
나는 체스휘의 팔이 살짝 느슨해진 틈에 서둘러 벌떡 몸을 일으켰다.
체스휘는 모르겠지만, 조금 전까지 이 방에는 우리 둘만 있던 게 아니었다. 비록 유령이기는 하나, 어쨌거나 체스휘하고 그런… 그런 걸 하는 모습을 남에게 보였다는 생각에 더 창피해졌다.
체스휘의 말대로 사실 난 이런 데 그렇게 익숙하지 않아서, 체스휘와 이 이상 더 붙어 있으면 또 나도 모르게 은근슬쩍 그에게 휩쓸려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경계심과 위험성을 느끼고 체스휘와 거리를 벌렸다.
“가는 거예요?”
체스휘는 도망치듯이 서둘러 침대 밑으로 내려가 뒷걸음질 치는 나를 찌푸린 듯이 애매한 미소를 띤 낯으로 지켜보았다.
“그렇게 도망가면 더 쫓고 싶어지는데….”
체스휘는 문이 있는 곳으로 빠르게 달음박질치는 나를 보다가, 침대 위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한숨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요. 지금은 안 붙잡을게. 참을 수 있으니까요, 아직은.”
기묘한 광채를 머금은 고요한 눈에서 왠지 시선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요, 린 씨. 나도 내가 언제까지 여유로운 척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까.”
나는 간지럽게 속삭이는 목소리를 뒤로한 채로 체스휘의 방을 빠져나왔다.
***
‘하마터면 미인계에 넘어갈 뻔했다!’
체스휘의 방에서 나온 뒤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은 그것이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체스휘에게 넘어가 그와 입술을 부대낀 것도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체스휘는 내 생각보다 더 요물 같은 남자였고, 나는 다음에 또 그런 그에게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미친 유령은 어디로 사라진 거지?’
그런데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다가 문득 잊고 있던 것이 떠올라서 인상을 찌푸렸다.
조금 전까지 체스휘의 방에 있던 검은 베일을 쓴 여인.
꼭 나한테 보란 듯이 체스휘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녀의 모습까지 떠오르자 무심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정신 나간 여자가 내 눈앞에서 체스휘를 건드렸겠다? 게다가 그냥 살짝 건드리기만 한 것도 아니고 아주 대놓고 몸을 막 쓰다듬고 더듬었지.
지금까지는 아주 가끔 옆에서 체스휘를 지켜만 보고 이런 식으로 접촉한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짓이지?
아니면 혹시 지금까지도 내가 안 보는 곳에서 이렇게 체스휘에게 손을 댄 적이 있는 거 아니야?
또 스멀스멀 불쾌한 기분이 올라와서,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체스휘에게 다시 돌아가서 당신에게 집착하는 여자 유령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경고해 줘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경고한다고 해서 그가 유령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갑자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사람들에게 빙의를 시도하던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속에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이럴 거면 차라리 마리엔의 동생이든 뭐든, 그 검은 베일을 쓴 여인도 그냥 악령으로 치부해서 처리해 버리는 게 마음 편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역시 여동생의 영혼을 찾아 밤에 혼자 별채를 떠돌던 마리엔을 생각하면 마음이 찝찝해지는 것도 사실이라, 나는 인상을 쓴 채로 다시 걸음을 옮겨 사라진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체스휘에 대한 집착이 남다르던 여자이니, 혹시 방에서 본 광경에 충격을 먹고 모습을 감췄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찜찜함이 두 배로 커진 것을 느끼며 결국 별다른 수확 없이 내 방으로 향했다.
***
그날 밤, 시스템 창을 열어 진행 중인 퀘스트를 확인했다.
▶new퀘스트: 세라의 방을 조사한 뒤 무사히 탈출하자!(퀘스트 ‘메이드 세라의 비밀’ 연계)
제한 시간: 10분
찾아야 할 단서: 3개
-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 보상 수령 가능.
※성공 보상: ‘메이드 세라의 비밀’ 퀘스트 1단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