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에는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
헉, 여기 체스휘 방이었구나!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니 방 안의 모습이 묘하게 눈에 익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쫓아 들어왔을 뿐인데 설마 이렇게 체스휘와 마주치게 될 줄 몰라서 당황했다.
체스휘도 느닷없이 그의 방으로 침입한 나를 보고 황당했는지, 옷을 벗다 말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상당히 급하게 뛰어 들어오던데… 무슨 일 있어요?”
“앗, 아니요…. 그, 옷 갈아입는 중인지 모르고….”
그래, 멀쩡히 자기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가 문을 벌컥 열고 당당하게 뛰어 들어오니까 체스휘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이건 체스휘의 잘못도 있었다! 옷을 갈아입을 거면 문을 잘 잠그던가, 방문을 열어 놓으니까 메이드가 청소 중인 빈방인 줄 알았잖아!
나는 체스휘가 있는 방 안으로 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바로 밖으로 튀어 나갈 타이밍도 놓친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서서 뒤늦게 손으로 눈을 가리는 척했다.
하지만 내 양심보다 사심이 더 컸던 탓인가?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오늘도 아주 옹골차 보이는 체스휘의 근육이 눈에 콕콕 박혀 들어왔다.
거참, 오늘도 아주 몸이 훌륭하시네요. 이래서 문을 그렇게 열어 놓고 옷을 갈아입었구나? 일부러 보여 주려고 그랬네, 일부러! 참나, 그럼 내가 봐 드려야지.
그렇게 누가 들으면 양심도 없다고 욕할 생각을 하면서 눈앞의 헐벗은 몸을 힐끔거리다가, 웃는 듯 아닌 듯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체스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때서야 뒤늦은 뻘쭘함을 느끼고 크흠, 헛기침을 내뱉으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에구, 제가 본의 아니게 실례를 했습니다. 지금 바로 나갈게요!”
“괜찮으니까 들어와요.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같은데.”
“아니요, 굳이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그냥 찾아온 거예요? 이유 없이?”
체스휘가 옷을 마저 갈아입고 있는지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실낱같은 웃음기가 담긴 나지막한 음성이 귀를 간지럽혔다.
“그럼 더 환영인데, 나는.”
체스휘는 겁도 없이 나를 방 안으로 들이려고 했다.
이 남자가 참, 자꾸 그렇게 사람을 꼬드기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러지 않아도 지금도 조금만 방심하면 나도 모르게 또 옆으로 곁눈질을 하게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응?’
그런데 내가 막 백스텝으로 방을 나서려고 했을 때, 내 손가락 사이로 조용히 움직이는 검은 형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지금은 해가 질 무렵이라 방 안이 어두워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점철한 여자의 모습이 바로 눈에 띄지 않았던 듯했다.
나는 애초에 내가 쫓고 있던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스르륵 움직여 체스휘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고 문으로 뒷걸음질 치던 발을 멈췄다. 얼굴을 설렁설렁 가리고 있던 손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 사이 어느새 밑으로 내려갔다.
나는 체스휘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 선 영혼을 보고 무심코 방 안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갔다. 손은 체스휘를 보고 숨긴 총에 다시 한번 닿았다.
하지만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체스휘에게 다가가 그에게 빙의를 시도하거나 위해를 끼치려 하는 게 아니라, 꼭 나한테 보란 듯이 체스휘의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녀의 손이 체스휘를 끌어안듯이 감싸는 순간 나는 움찔 몸을 굳혔다.
붉은 석양이 들어오는 곳에 선 체스휘가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등 뒤에 둔 채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린 씨, 정말 안 들어올 거예요?”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귀에 스몄다. 희미한 미소를 입술에 매단 체스휘가 다시 한번 나를 향해 물었다.
“정말 그냥 나가려고?”
이 기묘한 상황 때문인지, 체스휘의 말이 꼭 이대로 다른 여자와 자신을 방 안에 단둘이 놔두고 가도 괜찮겠냐고 나한테 묻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체스휘의 눈에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보일 리가 없었다. 죽은 유령이 저렇게 자신의 등 뒤에 매달려 있는 상황을 만약 안다면, 저렇게 침착할 수 없을 테니까.
급기야 검은 망사 장갑을 낀 손이 은밀하게 미끄러져, 체스휘의 두툼한 가슴팍을 훑듯이 움직였을 때는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을 뻔했다.
하지만 곧 기분이 몹시 나빠져서 얼굴을 굳힌 채 체스휘의 몸을 더듬는 손을 써늘히 쳐다봤다.
진짜 저 미친 여자가…. 지금 누구 앞에서 뻔뻔스럽게 성희롱을 하고 있는 거야?
엠버의 몸으로 본 장면이 있어서 저 여자가 체스휘한테 한 집착하는 것 같다고 진작 의심하긴 했지만, 설마 죽어서까지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 줄은 몰랐다.
콘라드도 이걸 봤어야 했는데. 진정한 악질 스토커는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거란 말이다.
지금 체스휘한테 ‘귀신이 지금 당신 몸을 더듬고 있어요!’라고 알려 주면 내 말을 믿을까?
“린 씨.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들어와요.”
나를 유혹하듯이 나지막하게 재촉하는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귓바퀴를 간질였다.
나는 꼭 뱀이 똬리를 트는 것처럼 체스휘의 몸을 질척하게 훑으며 동여매는 검은 손을 찌푸린 눈으로 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은은한 미소를 띤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체스휘를 보면서 삐딱하게 입술을 기울였다.
“체스휘 씨…. 알고 보니 당신,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사람이네요.”
체스휘의 입장에서는 뜬금없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지만, 그에게 붙어 있는 유령의 존재는 내 입장에서 퍽 성가시고 짜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체스휘에게 진득하게 얽혀 있는 여자를 보니 생각보다 기분이 나빴다.
손을 뒤로 움직여 아직 열려 있던 문을 닫고 체스휘가 있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금 화났어요?”
체스휘가 그런 나를 보며 입매에 묘한 미소를 그렸다.
“아니요, 화 안 났어요. 체스휘 씨 방에 느닷없이 쳐들어와서 제가 왜 화를 내겠어요?”
나는 체스휘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확 붙잡아 당겼다. 체스휘는 순순히 내 손에 끌려왔다. 체스휘의 등에 매달린 여인도 거머리처럼 그를 붙잡고 늘어졌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1/5)]
아, 진짜 뭐 이렇게까지 미친 여자가 다 있어?
이 와중에 나한테 빙의 시도까지 하고 가지가지 하고 앉았다.
입을 열면 온갖 저렴한 욕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서 잇새에 힘을 주고 체스휘를 붙잡은 팔을 한 번 더 세게 끌어당겼다. 다행히 이번에는 체스휘에게 매달린 여자가 떨어졌다.
그래도 이 거머리 같은 여자가 또 체스휘에게 다가와 달라붙으려고 하길래, 아예 체스휘를 밀쳐서 옆에 있던 침대에 강제로 눕혀 버렸다.
“체스휘 씨, 옷에 더러운 거 묻었어요.”
그러고 나서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내 몸으로 체스휘를 가렸다. 그러는 바람에 꼭 체스휘가 나한테 깔린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지만, 노골적으로 체스휘의 몸을 더듬는 유령 때문에 기분이 매우 나빠져 있었던 나는 문제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체스휘가 내 말에 가느다란 미소를 그린 얼굴을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였다.
“방금 갈아입었는데요?”
“이거 벗고, 그냥 다른 거로 다시 갈아입어요.”
체스휘의 물음에 재촉하듯이 그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냉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부스러지는 듯한 낮은 웃음이 체스휘에게서 흘러나왔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2/5)]
하, 진짜 저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유령 같으니라고.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았는지, 체스휘와 내 옆에 서서 다시 한번 나한테 빙의를 시도했다.
나는 단단히 뿔이 나서 아예 내 손으로 체스휘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린 씨…. 화 안 났다면서요.”
“화 안 났어요. 그냥 조금 짜증이 나서 그렇지.”
체스휘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계속 옅은 웃음기를 목소리에 머금고 있어 더욱 내 화를 돋웠다.
“아, 왜 이렇게 안 돼. 체스휘 씨, 가만히 있지 말고 허리 좀 들어 봐요.”
생각처럼 체스휘의 옷이 금방 벗겨지지 않아서 더 짜증이 났다.
그런데 사실 체스휘가 저 미친 유령한테 희롱을 당한 일로 이렇게까지 내 기분이 나빠진 것도 이상하다고 할 만하긴 했다. 하지만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이 체스휘를 마음대로 만지고 끌어안는 광경을 본 순간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불쾌감이 내 속을 휩쓸었다.
‘가만… 그런데 오히려 지금 내가 체스휘에게 하는 짓이 더한 희롱 아닌가?’
갑자기 든 생각에 주춤해서 체스휘의 얼굴을 힐끗 내려다봤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이 상황에 반발하거나 거부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체스휘가 나를 웃으며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연 건 그때였다.
“린 씨, 지금 내 옷을 갈아입히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알려 줄까요?”
“네? 뭐를… 읍.”
그 순간 단단한 손이 내 뒷목을 붙잡아 당겼다. 그리고 곧장 뜨거운 입술이 나를 집어삼켰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3/5)]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입술을 다물었지만, 곧 아랫입술을 아리도록 세게 빨리고 깨물려 틈을 내주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 사이로 파고든 열기가 집요하게 내 입 안을 핥고 비비고 문지르면서 정신을 쏙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4/5)]
“잠깐, 체스… 으응.”
목덜미를 붙든 손이 야살스럽게 귀를 간질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뱉을 뻔했다. 체스휘가 펄쩍 뛰듯이 몸을 크게 움찔거리는 내 허리를 팔로 감싸 붙잡고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린 씨… 숨 쉬어요.”
아니, 숨을 쉴 틈을 줘야 쉬지…!
나는 어처구니없는 체스휘의 말에 억울한 눈빛을 쏘아 보내며 숨을 허덕였다.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린 씨는 이런 게 생각보다 많이 서투네요.”
귀여워, 라고 속닥거리면서 웃은 체스휘가 잠깐 떨어뜨렸던 입술을 다시 겹쳤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5/5)]
[‘방랑하는 영혼’의 빙의 시도를 5회 방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4시간 동안 영혼들의 침입이 불가능한 육신이 됩니다.]
그러는 동안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의 빙의 시도는 모두 끝나고 시스템 창은 잠잠해졌다.
그리고 내가 다시 주변 상황을 신경 쓸 정신이 생겼을 때, 방 안에는 이미 체스휘와 나 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