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씨가 안심할 수 있게, 아무래도 내 입을 좀 더 막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린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급기야 햇빛이 가득 고여 있던 방 안에서 내 귀에 간지럽게 속삭여졌던 목소리나, 그때 나를 가까이에서 내려다보던 눈빛까지 눈앞에 어른거렸다.
워, 워어. 저리 가! 왜 생각나고 난리야…!
“아무튼 이렇게 찾아와 줘서 고맙네요. 다이안이 일어나면 2호실에서 병문안 왔었다고 전해 줄게요.”
나는 웃으면서 몸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옆으로 슬쩍 움직여, 내 얼굴을 만지고 있는 체스휘의 손에서 벗어났다. 왠지 좀 낯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괜히 머리카락을 손으로 훑으면서 헛기침을 내뱉기도 했다.
“뭘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린 씨와 다이안인데 당연히 와 봐야죠.”
체스휘는 꼭 내가 왜 그러는지 아는 듯이 순순히 나한테 손을 뗀 뒤 가늘게 미소를 지었다.
처음에는 체스휘를 보고 느긋하고 얌전한 수사슴을 연상했는데, 오늘 보고 확실히 알았다. 그는 요망한 여우였다.
“지금 둘이 뭐 해? 애가 앞에서 자고 있는데 뭘 그렇게 수상한 눈빛을 교환하면서 사이좋게 속닥거려? 당장 떨어져!”
그때, 옆에 있던 미뉴엘이 시어머니라도 된 듯이 호통을 치면서 체스휘와 나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는 체스휘와 내가 가까워 보이는 게 퍽 마음에 안 드는 듯했다.
“미뉴엘 말처럼 다이안이 이렇게 누워 있으니 방에 오래 있기도 그렇네요. 미뉴엘과 저는 그럼 내일 다시 올게요. 린 씨도 늦게까지 있지 말고 쉬어요.”
체스휘는 새끼 고양이의 앞발질을 보는 듯이 웃는 낯으로 그런 미뉴엘을 데리고 먼저 방을 떠났다.
“으으….”
“앗, 다이안 도련님! 이제 정신이 들어요?”
다행히 다이안은 취침 시간이 되기 전에 깨어났다. 여전히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막 기절했을 때보다는 다이안의 상태도 많이 안정된 느낌이었다.
물론 스트레스 지수는 아직도 50 미만으로 떨어지지 않고 있긴 한데….
“아까 그 사진, 왜 린이 가지고 있어?”
눈을 뜨자마자 목이 마른 듯이 물을 찾아 마신 다이안이 그 후에 나한테 가장 먼저 확인한 건 역시 사진에 대해서였다.
“저택을 돌아다니다가 주웠어요.”
나는 양심 없고 나쁜 어른이라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다이안에게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주웠다고?”
“네, 그래서 시간이 될 때 주인을 찾아 주려고 하던 참이었지요.”
물론 거짓말은 아이들의 교육에 안 좋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명색이 양육자인데 키우는 아이한테 ‘응, 내가 메이드 방에 몰래 들어가서 훔쳤어!’라고 해맑게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애초에 사진을 훔친 것도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시스템 창이 강제로 시켰어요, 판사님. 저는 정말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는 다이안 도련님은 이 사진을 어떻게 알아요?”
“예전에…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어.”
“그 사진을요?”
“응.”
다이안은 물컵을 쥔 손을 작게 꼼지락거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얼굴은 약간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를 둘러싼 분위기가 왠지 묘하게 어두워진 것 같기도 했다.
아무래도 지금 다이안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메이드 엠버인 듯했다. 기절하기 직전에 엠버의 이름을 불렀으니 아마 맞겠지.
그보다 다이안이 예전에 이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니…. 엠버도 세라하고 똑같은 사진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그럼 역시 저 사진은 엠버와 세라의 어릴 때 모습이 담긴 사진이 맞는 건가?
그렇게 내가 다이안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을 때, 그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다시 조용히 열어 덧붙였다.
“그 사진 주인… 아마 못 찾을 거야.”
“크흠, 왜요?”
“이제 저택에 없는 사람이거든. 왜 그 사진이 아직도 저택에 남아서 돌아다니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다이안은 이 사진이 세라의 방에서 나온 것이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다.
아니면 뭐…. 다이안의 생각대로 이 사진은 엠버의 것이 맞고, 그걸 세라가 손에 넣어서 가지고 있던 것뿐인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아무튼 나도 일단은 다이안에게 사진에 대한 다른 말을 더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거 그냥 버려.”
“버려요?”
“태우든지 찢든지, 아무튼 당장 버려.”
뒤이어 다이안이 굉장히 단호하고 매몰찬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다른 말을 더 얹기가 어려웠다.
나는 또 마음이 찜찜해졌다. 아까 사라로사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머리에 맴돌아 속이 꺼끌거리는 느낌이었다.
“알았어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서 사진에 대해 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나한테까지 은근히 벽을 세우고 있는 다이안에게 그냥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하지만 내 방으로 돌아가서 사진을 꺼내다가 나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주머니에 넣어 둔 사진이 사라진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
“오늘 메이드 방에 들어가서 찾은 게 뭔가 했더니.”
초 하나만 겨우 불을 밝히고 있는 어두운 방.
체스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손에 들고 있는 사진을 어스름한 불빛에 비춰 보았다.
사진 속에는 어린아이들뿐이었지만, 그중에 한 명이 체스휘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매일 그 얼굴을 잊지 못한 채, 저택에 있는 오랜 시간 동안 지나간 기억만을 붙잡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손에 턱을 괴고 앉은 체스휘의 고개가 느슨히 기울어지며 그의 입술이 가늘게 찢어졌다.
“어때? 당신도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죽어서도 잊지 못했을 여자 아닌가?”
체스휘는 눈매를 가늘게 접어 조금 짓궂게 웃으면서 의자 뒤쪽에 서 있는 여인에게 사진을 보여 주듯이 손을 움직였다.
꼭 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베일을 쓴 여인에게서 음산한 분위기가 강렬히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체스휘는 이미 죽은 영혼을 조롱하듯이 싸늘히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이내 아무렇지 않게 손안에 든 사진을 구겨 버렸다.
꼭 쓰레기를 버리듯이 아무렇게나 떨어뜨린 사진이 테이블 위를 굴러갔다.
체스휘가 사진 속의 여인을 오랫동안 그리워하며 찾아온 건 사실이지만 이 사진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그가 갈망하던 여인이 깃들기 전의 껍데기뿐인 육신에는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보다, 슬슬 때가 되었는데….’
체스휘는 린을 생각하며 의자의 팔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린은 꽤나 참을성이 많은 듯했지만, 조만간 어쩔 수 없이 그를 필요로 할 때가 올 것이었다.
자신에게 기대고 의지할 린을 생각하니 마음이 즐거워져서 체스휘는 느릿하게 입매를 들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두운 방 안에 체스휘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그가 문으로 향하자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듯이, 검은 베일을 쓴 영혼이 조용히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린을 기다리는 지루한 시간 동안 굶주린 영혼에게 먹이나 주며 시간을 때워야 할 듯했다.
***
‘아무래도 체스휘 같은데….’
나는 사라진 사진의 행방을 곰곰이 고민했다. 하지만 역시 다이안의 방에서 만났던 체스휘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그냥 오늘 아침에 체스휘에게 에둘러 물어봤지만, 그는 무슨 사진을 말하는 거냐고 오히려 내게 반문하면서 순진무구하게 눈을 깜빡였다.
사실 나도 딱히 내놓을 만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어서 체스휘에게 더 집요하게 물어보기는 좀 그랬다. 그냥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내 촉이 왜인지 모르게 체스휘를 가리키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혹시 내가 사진을 실수로 다른 곳에 흘렸을 가능성도 있으니, 무조건 체스휘를 의심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7호실 양육자님이 알고 계실지 모르겠는데, 제가 몹시 바쁜 사람입니다.”
그래도 계속 미심쩍은 마음이 들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살짝 짜증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니 되도록 빨리빨리 좀 확인했으면 하는데요.”
잠깐 다른 생각에 빠져서 손이 느려졌는데, 내 뒤에 있던 사람은 그걸 참아 주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 예. 빨리빨리 좋죠. 닥터 콘라드 못지않게 바쁜 건 저도 마찬가지라 원하는 바네요.”
나는 닥터 콘라드가 귀찮은 듯이 구시렁대는 소리를 듣고 슬쩍 뒤쪽으로 눈을 흘긴 뒤 단추를 풀던 손을 마저 움직였다.
처음 콘라드에게 진찰을 받은 날로부터 이틀이 지났다. 그래서 오늘은 등의 상처를 다시 확인하러 콘라드의 연구소에 찾아온 상태였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처방을 좀 내려 주세요. 지난번에 닥터 콘라드가 처방해 준 약은 하나도 효과가 없는 것 같거든요.”
“예? 그래도 제가 만든 약이 효과가 하나도 없을 리는 없는데, 무슨 말도 안 되는… 헉!”
그런데 내 말에 코웃음을 치던 콘라드가 마침내 드러난 내 등을 보고 기겁했다.
깜짝 놀라서 뒤로 물러나기까지 한 듯이 바퀴 달린 의자가 시끄럽게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이게 무슨, 등이 뭐 이렇게…!”
아니, 그런데… 남의 등짝을 보고 이렇게까지 무례하게 굴다니. 나도 내 등이 어떤 상태인지 거울을 봐서 알지만 좀 심한 거 아닙니까?
“7호실 양육자님, 아니, 지금 괜찮은 겁니까…?!”
콘라드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나한테 물었다. 꼭 심폐소생술이 필요한 환자를 눈앞에 둔 것처럼 황망함마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니요, 미친 듯이 아픈데요.”
“그런데 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고 있어요?!”
“그야 지금은 진통제를 먹었으니까요.”
“진통제! 하긴, 그런 이유라면 이렇게 멀쩡해 보이는 것도 당연하군요. 역시 제가 만든 약이 효과가 확실하긴 하지요.”
콘라드는 어울리지도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경악하던 와중에도 자신의 약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며 잘난 척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튼 천하의 콘라드가 이렇게 놀라서 펄쩍 뛸 정도로 내 등의 상태는 심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