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황급히 몸을 뒤로 움직였다.
내가 부딪친 피아노에서 작게 쿵,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체스휘가 바로 손으로 내 머리를 감싼 덕분에 딱딱한 피아노에 뒷머리를 직접 부딪치지는 않았다.
말했듯이 피아노 뒤의 공간은 생각보다 좁았고, 그래서 몸을 피할 만한 곳이 없었다.
“잠깐, 체스휘 씨….”
당황해서 입술을 벌렸지만, 오히려 상대가 침입할 기회만 주었을 뿐이다.
어정쩡하게 뒤로 기울어 있던 몸이 주르륵 미끄러지려고 해서 나도 모르게 체스휘의 몸을 붙잡았다. 티끌 하나 없던 옷감이 내 손 안에서 구겨졌다.
햇빛이 짙게 고인 공기 때문인지 점점 숨이 찼다. 어쩌면 겨우 몰아쉰 숨마저 체스휘에게 전부 먹혀 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잠시 후 깊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떨어진 뒤, 나는 정리되지 않은 숨을 내뱉으면서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자 가까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내 눈도 정처 없이 흔들렸다.
“갑자기, 이게… 뭐 하는 거….”
“가장 쉽게 내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요.”
체스휘는 조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담담한 말투로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이 파르르 떨리는 내 눈가와 뺨을 느릿하게 쓸었다.
“밖이 아직도 시끄럽네요.”
귓가에 조용히 맴도는 말처럼, 복도에서 또 사람이 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린 씨가 안심할 수 있게, 아무래도 내 입을 좀 더 막고 있을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꼭 이 모든 일이 나를 위한 것이라는 듯이 태연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내 당혹감에 불을 지폈다.
“린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이내 작게 속삭이는 음성이 귀에 부스러지는 것과 동시에, 전염될 듯한 열기가 또다시 내 입술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은 햇살이 눈앞을 희게 물들였다.
창밖에서 붉게 물든 나뭇잎이 소복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제법 싸늘해진 날씨임에도 이상할 정도로 덥게 느껴지는 가을날이었다.
***
“린, 수프가 손에 떨어지고 있어!”
그날 저녁, 나는 맞은편에서 들려오는 다이안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정신을 차렸다.
“앗, 뜨거워!”
그제서야 손가락에 와닿는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다이안의 말대로, 손에 들고 있던 스푼이 기울어져서 거기에 담겨 있던 묽은 수프가 내 손가락까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구, 우리 다이안 앞에서 이게 무슨 추태람. 나도 모르게 이 정도까지 넋을 놓고 있었다니.
“어디 봐. 데지 않았어?”
“괜찮아요.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어요.”
물론 지금 막 놀라서 펄쩍 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방금은 그냥 놀라서 반사적으로 소리쳤던 거다.
나는 뻘쭘함을 숨기며 나를 걱정스럽게 살피는 다이안에게 웃어 보인 뒤 냅킨으로 손을 닦아 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혹시 무슨 일 있었어?”
다이안은 오늘따라 정신이 없어 보이는 내가 영 이상한 모양이었다. 설핏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보고 있는 그의 얼굴에는 의혹과 염려가 가득했다.
무슨 일이… 있긴 있었지.
다이안의 물음에 반사적으로 아까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자, 방 안의 공기가 살짝 후덥지근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크흠. 일은 무슨 일이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세상에, 내가 데이터 썸남과 진도를 이 정도로 나갈 줄이야.
가상 현실 게임에서 공략 캐릭터들과 온갖 남사스러운 짓을 다 하는 플레이어들이 쌔고 쌨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난 그동안 우리 개복치 고양이의 육성과 덕질에만 열과 성을 다했을 뿐, 다른 데 한눈판 적이 없었다.
물론 지난 회차들에서는 양육자라는 직업이 없었던 만큼 체스휘도 존재하지 않는 캐릭터였다. 그러니 혹시 전부터 체스휘가 게임 속에 있었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었고, 어쨌든 내가 이런 데이터 썸남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었다. 그런 만큼 나도 막상 아까 체스휘하고 그런 일이 있고 나자 마음속에 상당한 동요가 일어났다.
더군다나 체스휘, 그렇게 안 봤는데….
그렇게 은근슬쩍 분위기를 잡으면서,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뻔뻔하게 사람의 말문을 막아 놓고, 또 그렇게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능수능란하게….
‘허 참.’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서 목이 다 탔다.
그래서 옆에 있는 물을 한 번에 들이켜 원샷한 뒤 자꾸만 머릿속에 맴도는 기억을 애써 구석으로 밀쳐 놨다.
아무튼, 나는 양육자로서 우리 어린 뽀시래기를 이렇게 걱정하게 만든 것을 반성하기로 했다.
“날이 갑자기 쌀쌀해져서 살짝 노곤해진 탓에 멍해졌나 봐요. 우리 다이안 도련님도 감기 걸리지 않게 몸 관리 잘 해야 돼요.”
“린도 조심해. 여기 온 고용인들도 레드포드의 저택은 유독 가을과 겨울이 길고 춥다고 했어. 린은 저택에 온 지 오래된 것도 아니니까 적응이 덜 돼서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야.”
“이렇게 저까지 신경 써 주시다니 우리 도련님은 어쩜 이렇게 상냥하고 귀여우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전 아주 튼튼하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렇게 다이안과 오순도순 알콩달콩하게 저녁 식사를 끝마쳤다.
“린, 방금 앉았던 의자 밑에 뭐가 떨어져 있는데 혹시 린이 흘린 거야?”
그러고 나서 메이드가 테이블을 정리하고 나간 직후의 일이었다.
식후 차를 마시기 위해 소파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던 다이안이 문득 방금 나하고 식사를 마친 테이블 쪽을 보며 내게 물었다.
“아니면 메이드가 흘린 건가?”
나는 다이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주워드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손에 들린 반으로 접힌 종이의 모양이 묘하게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급히 상의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지만 역시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
‘제일 깊숙한 주머니에 고이 넣어 놨는데 왜 저기에 떨어져 있지?’
꼭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내 주머니에서 벗어나 의자 밑에 떨어져 있던 것은 아까 메이드 세라의 방에서 가져온 세 번째 단서였다.
[단서 3: 수수께끼의 사람들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
그 사진에는 열 명가량 되는 어린아이들이 꼭 기념사진이라도 찍듯이 어떤 건물 앞에 일렬로 서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낡아서 디테일한 부분까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진에 찍힌 건 한 사람 빼고 전부 어린아이들이었다.
혹시 고아원인가? 왠지 내가 예전에 지낸 적이 있는 보육 시설과 비슷한 느낌이라, 생각이 그런 쪽으로 튀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영….
만약 내 막연한 짐작대로 이 사진 속 건물이 진짜 고아원이고 같이 찍힌 아이들은 여기에 사는 고아라면, 이곳은 딱히 가족처럼 포근한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 같았다. 아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이렇게 딱딱하고 삭막한 느낌인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사진을 샅샅이 훑어본 뒤 그 안에서 메이드 세라의 어린 시절 모습인 것 같은 소녀를 한 명 발견해 냈다. 검은 단발과 눈물점이 지금의 세라와 판박이라 몰라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세라가 아까 방에서 사라진 걸 알아차리고 소란을 부린 게 이 사진 때문인 것 같은데…. 혹시 아끼던 사진인 걸까? 아무리 퀘스트 때문이라고는 하나 남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 온 것 같아서 기분이 영 꺼림칙했다.
“아, 그거 제가 떨어뜨린 거예요.”
게다가 다이안이 반으로 접힌 사진을 주워 그것을 무심코 펼쳐보는 것까지 눈에 띄자 더 난처한 마음이 들었다.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던가. 메이드들의 사정이 다이안의 귀에까지 들어가는 일은 웬만하면 없을 테지만, 그래도 양육자의 입장에서 속이 켕기는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사진을 확인하긴 했으니, 차라리 나도 복도에서 주웠다고 그러고 다시 세라한테 돌려주는 게 나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다이안에게 다가가 다시 사진을 받아오려고 했다.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오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40/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41/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42/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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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60/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61/100)]
다이안의 스트레스 지수가 갑자기 무시무시하게 치솟았다. 당연히 나는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 다이안 도련님?”
사진에 눈을 고정시킨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다이안의 얼굴은 그의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70/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71/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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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79/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80/100)]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순식간에 스트레스 지수 80을 찍은 다이안이 휘청거렸다.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80을 돌파해 일시적인 ‘기절’ 상태에 돌입합니다.]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81/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82/100)]
[육성 대상의 스트레스 지수가 1 상승합니다.(83/100)]
“다이안!”
육성 대상의 상태 이상을 경고하는 알림이 뜬 이후에도 다이안의 스트레스 지수는 그가 완전히 의식을 잃을 때까지 계속 상승했다.
나는 경악해서 풀썩 쓰러지는 다이안의 몸을 재빨리 받아 들었다.
힘이 풀린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낡은 사진이 카펫 위로 팔랑이며 떨어졌다.
“엠… 버…. 왜….”
다이안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감기 전, 그의 바싹 마른 입술에서 마지막으로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가 내 귀에 꽂혔다.
나는 순간 옆에 떨어진 사진에 시선을 두었다.
다이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 그 안에 있는 어린 소년 소녀들 사이에서 그동안 눈에 띄지 않았던 사람 한 명이 갑자기 시야에 박혀 들어왔다.
세라로 보이는 검은 머리칼의 소녀 옆에 옅은 금빛 머리카락을 땋은 어린 소녀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빛바랜 사진이라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녀의 눈은 어디에서 본 듯한 익숙한 푸른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단순한 착각일까?
어쩐지 그 얼굴이 내가 지하실의 문을 통해 1년 전의 레드포드 저택에 가서 본 엠버의 얼굴과 비슷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