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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95)화 (95/300)

그래도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나오길 잘했다.

린은 그렇게 안심하면서 아래층 창문에서 보이지 않게 위로 접어 올리고 있던 몸을 폈다.

벌컥!

그런데 그 순간, 다시 한번 세라의 방 창문이 활짝 열렸다. 린은 숨을 멈추고 얼른 발을 들어 올렸다. 곧바로 창밖으로 빼꼼히 나온 검은 머리통에 하마터면 발이 닿을 뻔했다.

잠시 후, 경계심 어린 눈으로 다시 한번 창밖을 살피던 세라가 천천히 창문을 닫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그녀는 커튼을 쳐서 방 안의 풍경을 완전히 가렸다.

‘방심하고 있는 틈을 노리다니, 진짜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네.’

린은 벌렁거리는 가슴을 끌어안고 조심스럽게 몸을 끌어올렸다. 생각보다 세라가 예민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지금 아래로 내려가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그래서 끙끙거리면서 찬 바람 속에 뻣뻣하게 굳은 몸을 움직여 위층의 창문 난간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그 방은 비어 있었고, 린은 그곳을 통해 다시 복도로 나갈 수 있었다.

그런데 린이 막 계단을 내려가려던 때, 갑자기 아래층에서 ‘쾅!’ 하고 큰 소리가 들렸다.

“방금 내 방에 들어갔던 거 누구야?!”

그리고 세라의 성난 목소리가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갑자기 왜 그래?”

“내 방에 있던 물건이 없어졌다고…!”

“뭐?! 방에 도둑이라도 들었단 말이야?”

메이드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계단을 타고 올라왔다. 방에 있던 메이드들도 소란을 들었는지 하나둘씩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뭐야, 방에 도둑 들었대?”

“누구 방에?”

린은 서둘러 아래층으로 몰려가기 시작한 메이드들 사이에 섞여 움직였다. 설마 다른 사람이 메이드복을 입고 숨어들어 이렇게 당당하게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에, 다들 바로 옆에 있는 린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래도 세라는 방에서 사라진 물건이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챈 듯했다. 린은 뒤에서 느껴지는 소란을 뒤로한 채 세라의 눈에 띄기 전에 후다닥 자리를 피했다.

***

잠시 후, 나는 메이드들의 숙소를 완전히 빠져나왔다. 그때서야 완전히 마음을 놓고 안도할 수 있었다.

“어휴, 하마터면 잡히는 줄….”

“잡히다니, 누구한테요?”

그때 갑자기 내 머리카락이 위로 살짝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거의 동시에 나른하게 소곤거리는 듯한 목소리도 귀에 울렸다.

고개를 돌리자 계단 난간에 상체를 기대듯이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지금은 어두운 곳에 서 있어 갈색으로 보이는 머리칼이 부드러운 굴곡을 그리며 반듯한 이마 위에 헝클어져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에 살짝 가려진 채 희미한 미소를 그리고 있는 눈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체스휘 씨, 기척 좀 내고 다녀요.”

그래, 이번에도 너일 줄 알았다.

얼마 전부터 꼭 나한테 위치 추적기라도 달린 것처럼 하도 여기저기서 나타나니까, 이제는 체스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도 딱히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나를 발견한 게 체스휘라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체스휘가 햇빛 아래에 늘어진 고양이처럼 계단 난간에 느슨히 기대선 채 내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휘감고 만지작거리면서 가지고 놀다가 느릿하게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었다.

“미안. 습관이라 좀처럼 쉽게 고쳐지지가 않네요.”

그나저나, 요즘 들어 특히 느끼는 건데 이 남자는 진짜 인기척이 없었다. 지금은 그나마 적응이 되어서 그렇지, 처음에는 얼마나 깜짝깜짝 놀랐는지 모른다.

“그보다 린 씨, 오늘은 의상이 새롭네요. 기분 전환용인가요? 아니면 새로 생긴 취미?”

나는 이어진 체스휘의 말에 머쓱해졌다. 체스휘가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는 건 알았지만, 하필 지금도 그럴 줄은 몰랐다.

“고용인들 소집! 당장 숙소 1층 로비로 모여!”

그때,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고용인들을 소집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조금 전 메이드 숙소에서 일어난 일 때문인 것 같았다.

나는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라의 방에서 가져온 물건은 그녀 역시 당당하게 분실을 주장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암호가 적힌 쪽지가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 그러고 보니 세 번째 단서는 뭔지 잘 확인하지 못했지.’

왠지 수상한 느낌이 들어서 마지막 순간에 육감을 따라 다급히 낚아채 오긴 했는데, 혹시 그것 때문인가?

나는 마지막에 주머니에 서둘러 쑤셔 넣었던 것을 꺼내 보려다가 문득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의식하고 시선을 들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잠깐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체스휘가 다시 나를 내려다보면서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살짝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훑듯이 보았다.

이내 그의 입술에 알겠다는 듯한 미소가 비스듬하게 걸렸다.

아무래도 이 소동이 나 때문이라는 걸 눈치챈 것 같아서 나는 괜히 속이 뜨끔거렸다.

“거기, 뭐 해? 당장 숙소로 모여!”

급기야 집사장과 메이드장이 저택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른 고용인들을 직접 불러 모아 데려가는 듯한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따라와요.”

나는 일단 체스휘를 끌고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다가 가까이에 있는 빈방에 들어갔다.

그곳은 저택의 소년들이 수업을 받는 방 중 하나였다. 그중에서도 음악 교양 수업을 받는 장소인 듯, 방 안에는 커다란 피아노가 있었다.

나는 체스휘를 데리고 그 뒤쪽에 숨었다. 피아노 위에 덮인 천이 바닥까지 길게 늘어져 있어서, 문에서는 우리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쉿. 잠깐만 조용히 하고 있어요.”

아직 옷을 갈아입지도 못했는데 집사장과 메이드장에게 걸리면 일이 번거로워졌다. 혹시 그들이 내 얼굴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그게 더 문제였다.

잠시 후 체스휘와 내가 숨은 방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방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금방 다시 문이 닫혔다.

“체스휘 씨, 오늘 나 본 거 비밀이에요.”

나는 문밖의 소음이 멀어지는 걸 느끼며 체스휘에게 말했다.

사실 오늘 이런 상황에서 체스휘와 마주친 게 그렇게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언제 이런 신뢰가 생겼는지는 모르겠지만, 체스휘라면 내 수상쩍은 행적을 다른 사람들에게 고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묘한 믿음이 있었다.

원래도 내게 상냥하기도 했고, 요즘은 특히나 미친 호감도를 폭발시키며 내게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는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와 피아노 뒤에 얌전히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내가 비밀을 지키면 뭘 해 줄 건데요?”

그래서 체스휘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질 줄은 몰랐다.

고개를 돌리자 생각보다 가까이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가 몸을 숨긴 곳은 보기보다 좁았다. 특히 체스휘의 체격이 생각보다 커서 그런지, 이렇게 둘이 몸을 숨기고 있으려니 팔과 어깨가 완전히 닿을 정도로 가까이에 붙어 있어야 했다.

창문에서 들어온 햇볕이 체스휘의 얼굴에 환한 빛을 드리웠다. 그의 머리칼도 황금색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보석 같은 보라색 눈을 감싸고 있는 속눈썹도 은은하게 반짝였다.

“응? 내가 비밀을 지키면 뭘 해 줄 건데요?”

고개를 기울인 채 나를 보고 있던 체스휘가 다시 한번 물었다. 채근하는 듯한 내용과 달리 귀에 울리는 목소리는 낮고 느릿했다.

“어….”

나는 데이터 썸남의 갑작스러운 밀고 당기기에 살짝 당황했다.

그런 나를 잠깐 물끄러미 보던 체스휘의 입에서 이내 묘한 말이 흘러나왔다.

“린 씨하고 이러고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나네요.”

“옛날이요?”

무슨 옛날을 말하는 거지?

아, 초상화 놈하고 술래잡기를 할 때 메이드복 차림으로 다녔던 걸 말하는 건가?

하지만 그건 옛날이라기에는 최근인데…. 아니면 설마 예전에 내가 메이드 언니들한테 정보를 얻어 내려고 메이드복을 입고 돌아다니던 걸 본 건 아니겠지?

아무튼 나는 왠지 살짝 미묘해진 분위기를 환기시킬 겸 어색하게 말을 돌렸다.

“그런데… 체스휘 씨는 어떻게 매번 이렇게 날 잘 찾아내는 거예요?”

체스휘는 잠깐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내 그의 얼굴에 빛이 녹아드는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린 씨가 어디에 있든 나는 찾아낼 수 있어요.”

작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기이할 정도로 선명하게 귀에 울렸다.

나는 그 순간 시야에 비친 체스휘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체스휘의 얼굴은 확실히 내 취향을 저격하고 있었다. 특히 이렇게 정면에서 본, 미소가 떠오른 그의 얼굴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예뻤다.

그래서인가? 나는 체스휘의 얼굴이 다가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숨을 죽인 채 바라보고만 있을 뿐, 꼭 몸이 굳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체스휘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니 피하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왠지 그때는 그런 생각 자체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가까워지는 체스휘의 눈을 마주하다가 속절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말았다.

입술에 살짝 뜨겁게 느껴지는 온기가 닿았다. 그 순간 꼭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내가 미처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자, 내 입술을 얕게 덮고 있던 온기가 떨어졌다.

햇빛이 스며 유독 오묘한 색채로 반짝이고 있는 보라색 눈이 지척에서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꼭 그 안에 거부감이 들어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처럼 유심히 나를 들여다보던 체스휘가 이내 눈을 슬며시 접어 웃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다시 고개를 숙여 잠깐 떨어뜨렸던 입술을 또 내 위에 겹쳤다. 이번에는 좀 더 깊고 밀접한 접촉이었다.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돌아와서 나도 모르게 숨을 잘게 들이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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