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 씨가 그렇다고 하니 그런 걸로 치죠.”
“아니, 그런 걸로 치는 게 아니라 그런 거라고요.”
“네, 그러니까 그런 거로 해요.”
아니, 지금 내 말 안 믿고 있잖아요.
하지만 더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서 그냥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렇게 만족스럽고 기쁘다니, 그냥 그런 거로 해라….
나는 체스휘에게 해명하는 것을 포기한 채 그의 손에 이끌려 콘라드의 연구실 앞 복도를 벗어났다.
그런데 지난번에도 느꼈지만, 이제 손잡는 것쯤은 되게 자연스럽네. 게다가 지금은 은근슬쩍 손깍지까지 끼고 있었다.
호감도가 한 자릿수였을 때도 이상하게 나한테 친밀하게 굴었던 체스휘인데, 호감도가 갑자기 수직 상승한 지금은 더군다나 거리감이 훅 줄어든 느낌이었다.
사실 지난번에 체스휘의 한 자릿수 호감도를 확인하고 커다란 정신적 타격을 입은 뒤, 데이터 썸남과는 이제 작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지금 체스휘의 호감도는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900점대까지 치솟아, 기존의 게임 공략 캐릭터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한 애정도를 과시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호감도가 지나치게 높아도 이상하게 경계심이 드네…. 진짜 시스템 오류나 버그가 아닌지 의심스럽고 말이야.’
“참, 혹시 정말 거슬려서 치워 버리고 싶은 사람이 생기면 나한테 말해요.”
그렇게 내가 복잡하고도 미묘한 감정을 느끼던 중에 체스휘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린 씨가 귀찮지 않게, 다시는 눈에 띄지 않도록 내가 대신 치워 줄 테니까요.”
내 귀에 대고 장난스럽게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퍽 귀염성 있었다.
그런데 농담인 게 분명한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 뒷덜미가 오싹거렸다.
내 시야에 비친 체스휘는 여전히 무해해 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을 뿐이었다.
순간 진심 100퍼센트인 것처럼 느껴져서 흠칫했는데, 역시 그냥 기분 탓이었나 보다. 하긴, 당연히 그렇겠지.
“그리고 지난번에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한 거, 언제든 유효하니까 잊지 말아요.”
그런데 꼭 속삭이듯이 다시 한번 귓가에 나지막하게 흘러든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가을 낙엽이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소리보다 더 스산하고 적요하게 느껴졌다.
내가 기묘한 느낌에 멈칫한 사이, 체스휘가 빙긋이 웃으며 다시 내 손을 잡고 복도를 걸었다.
나는 그런 체스휘의 옆얼굴을 관찰하듯이 주시하며 잠자코 그 뒤를 따라갔다.
***
“와, 여길 언제 다 뒤져 보냐.”
나는 오랜만에 옷장 속에 처박혀 있던 메이드복을 꺼내입었다. 그러고 나서 최대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메이드들이 사용하는 숙소로 향했다.
목적했던 곳에 도착하자마자 재빨리 문을 열고 그 안으로 숨어들어 갔다. 하지만 곧 눈앞에 비친 광경에 놀라서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 언니…. 그렇게 안 봤는데 방이 왜 이렇게 지저분해?
지금 내가 몰래 숨어들어 온 곳은 메이드 세라의 방이었다. 퀘스트를 따라 세라의 방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남의 방에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들어오기에는 너무도 환한 대낮이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고용인 숙소가 비는 시간은 업무 시간인 낮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이나 밤중에는 고용인들이 대부분 방으로 돌아가 쉬었기 때문에 이렇게 세라의 방에 몰래 들어오는 게 불가능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면서 바닥에 널린 옷가지와 물건들을 밟지 않게 조심해서 움직였다.
양육자를 제외한 고용인들의 방은 대개 2인 1실이었다. 그런데 혼자 쓰는 것도 아닌 방이 이렇게 어지럽다는 건, 세라의 룸메이트나 세라나, 둘 다 결벽증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는 의미였다.
‘세라 언니…. 세상에서 제일 깔끔 떨게 생겨서는 의외네.’
나는 꼭 나보다 먼저 누가 들어와서 방을 들쑤시기라도 한 것처럼 어지러운 방을 보고, 어디에 제일 처음 손을 대야 할지 고민스러워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눈앞에 떠오른 시스템 창에, 오래 생각할 시간도 없었다.
▶new퀘스트: 세라의 방을 조사한 뒤 무사히 탈출하자!(퀘스트 ‘메이드 세라의 비밀’ 연계)
제한 시간: 10분
찾아야 할 단서: 3개
※실패 페널티: ‘메이드 세라의 비밀’ 퀘스트 실패
※성공 보상: ‘메이드 세라의 비밀’ 퀘스트 1단계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