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2호실 양육자님에게 주제넘은 마음을 품은 건 부정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7호실 양육자님이 2호실 양육자님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다가간 적이 없는걸요. 제 마음을 그렇게 간단히 접을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는 7호실 양육자님의 눈에 거슬리지 않게 그냥 멀리서 바라만 보는 걸로 만족할게요.”
그런데 그 내용이 뜬금없는 건 둘째치고, 이 안 어울리는 처연한 표정 연기는 또 뭐람?
“그러니까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보지 말아 주세요.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잖아요? 7호실 양육자님이 이렇게 화를 내시면 저는 너무 두려워서….”
나는 왜 이 예쁜 메이드 언니가 갑자기 체스휘를 들먹이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다 문득 나는 묘하게 이 상황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앗, 뭐야. 설마 세라의 입장에서는 지금 내가 마리네즈처럼 느껴지는 건가?
아니, 난 이 언니가 체스휘를 좋아하건 말건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혹시 인물 열람을 집중해서 보느라 내가 노려보는 것처럼 느껴졌나? 그래서 오해한 건가?
그보다 어차피 이 언니는 왠지 체스휘를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는데 말이다.
전에 내가 초상화의 영혼에게 린 도체스터의 외모를 빼앗겨 원래 내 모습을 하고 있었을 때, 나를 신입 메이드로 착각해 체스휘를 잘 꼬드겨 보라느니 하는 소리를 하지 않았던가? 체스휘의 몸을 확인해 보고 자신에게 알려 달라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혼자서 순애보라도 찍는 것처럼 왜 이러는 거지?
“린 씨.”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 뒤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리벙벙한 상태로 고개를 돌리자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나를 보고 있는 체스휘가 시야에 들어왔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눈가를 반쯤 가리며 흩날렸다. 지금은 가을이라 열린 창문에서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떨어져 들어오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닥터 콘라드와 이야기는 다 나누었어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체스휘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어…. 네. 체스휘 씨는 여기 왜 왔어요?”
“린 씨가 너무 늦게까지 안 와서 찾으러 왔죠.”
체스휘의 대답을 듣고도 나는 여전히 의아했다.
굳이 찾으러 와야 할 정도로 콘라드의 연구실에 그렇게 오래 있지는 않았는데?
“그런데 둘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느릿한 걸음으로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온 체스휘가 세라를 힐끔 본 뒤 다시 나를 향해 궁금한 듯이 물었다.
하지만 사실 나도 내가 지금 세라와 무슨 상황이었던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던 터라, 이걸 도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흑….”
그때 불현듯 내 앞에서 난데없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또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세라가 고개를 숙인 채 손으로 눈가를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어디로 보나 우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세라에게 느닷없는 말을 들은 데 이어 갑자기 혼자서 울기까지 하는 그녀를 보자 나는 정말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졌다.
“체스휘 님….”
더군다나 가련한 목소리로 체스휘를 부르며 촉촉이 젖은 눈으로 그를 쳐다보기까지?
그때서야 나는 왜 세라가 갑자기 내 앞에서 이런 이상한 짓을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차렸다.
허? 설마 체스휘가 내 뒤로 걸어오는 걸 보고 일부러 이런 거야? 체스휘 때문에 내가 질투라도 해서 자기를 괴롭힌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와, 이 언니…. 와아….’
나는 도도한 줄로만 알았던 예쁜 메이드 언니의 불여우 짓에 질겁했다.
아니, 나는 예쁘다고 칭찬도 해 줬는데 이런 치사한 짓을 하다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레드포드 저택의 인류애가 바닥나는 소리가 들린다, 들려.
더군다나 방금 내 칭찬을 듣고 호감도까지 올렸으면서 이건 배신이잖아요?
갑자기 체스휘가 이 저택에서 어쩌다 인간 혐오증에 걸려 이렇게 괴상한 호감도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해하지 마세요, 체스휘 님. 7호실 양육자님은 저한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눈물을 억지로 쥐어짜 훌쩍이던 세라가 서글픈 목소리로 변명하듯이 말했다.
어디까지나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지만, 세라가 이렇게 애처롭게 울면서 말하니 꼭 반대의 의미가 그 안에 내포된 것처럼 들렸다.
나는 입술에 침도 안 묻히고 사기를 치는 세라를 황당하게 쳐다봤다.
그런데 그 순간, 내 어이없는 시선을 느낀 듯이 세라의 상태 창이 변했다.
현재 상태: 죄책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