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저택의 도련님을 지키는 방법 (90)화 (90/300)

흡족한 미래를 상상하자 불쾌감이 약간이나마 사그라들며, 저택의 해충들에 대한 살의도 한 꺼풀 가셨다.

마음이 한결 너그러워진 체스휘는 린의 체취가 남은 듯한 소파에 몸을 더 깊게 기댔다.

그는 조금 전 공용 다과실을 떠난 린을 생각하며 손가락을 문질렀다. 아까 묻은 린의 체온이 아직도 손가락 끝에 배어 있는 듯했다.

이렇게 그녀의 모습을 되뇌어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그리고 저택에 새로 남은 그녀의 자취를 쫓고 또 쫓아도 조금도 질리지 않았다. 매일매일이 지겹고 권태로워서 몸서리칠 지경이던 저택 생활을 그동안 기나긴 인내심으로 잘 참아 낸 보람이 있었다.

이렇게 그가 오랫동안 찾던 사람을 만날 수 있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호기심도 느끼지 않았을 신입 양육자에게 처음부터 이상하게 눈길이 가고 관심이 생겼던 이유가 있었다.

이 무딘 육신의 오감보다, 그의 본능이 먼저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린은 알 리 없겠지만 그는 그녀를 아주 오래 기다렸다. 그녀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로 아주 오랫동안.

하여 이번에 린이 그가 찾던 사람과 동일인임을 마침내 확신했을 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희열이 들끓어서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지금도 린과 단 일 분 일 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체스휘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린이 겁을 먹고 도망치려 하기라도 하면 난감해졌다. 만약 그러다가 이 끔찍한 기약 없는 기다림이 또 시작되기라도 한다면, 이번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그때는 정말 린을 움직이지 못하는 육신에 가둬 버리고 싶은 충동에 패배할지도 몰랐으니….

체스휘의 눈이 검은 잉크가 고인 것처럼 음습하게 가라앉았다.

어떻게 하면 린의 경계심을 사지 않고 야금야금 그녀를 독식할 수 있을까.

두꺼운 암막이라도 덮인 듯이 어둡고 탁해서 좀처럼 속내를 가늠하기 어렵던 체스휘의 눈이 옆으로 느릿하게 미끄러졌다.

검은 베일을 쓴 레드포드 저택의 유령이 체스휘의 시선을 받고 몸을 파르르 떨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 꼴같잖은 모습을 보며 체스휘는 입술을 미세하게 비틀었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지금처럼 종종 체스휘의 앞에 나타나 추잡한 집념을 보이곤 했다. 정작 체스휘의 시선이라도 받으면 두려운 듯이 주춤거리는 주제에 용케도 달아나지는 않는 것이 제법 근성 있다고 할 만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시린 눈빛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여인의 몸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죽은 마리네즈는 초상화의 영혼을 먹고 힘을 조금 얻은 듯했다. 겉보기에는 이전과 비교해 별로 달라진 부분이 없었지만, 체스휘에게는 그녀의 기운이 약간 더 선명해진 것이 느껴졌다.

그래도 아직 손을 대기에는 시기가 일렀다. 어쩌면 이 레드포드 저택을 청소하는 데 이 부패한 냄새가 나는 영혼을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응? 이거 뭐야? 차가 왜 벌써 식었어?”

그때 막 맞은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들려온 레이븐과 올리비아의 대화 소리에, 싸늘한 빛이 스며 있던 체스휘의 눈이 움찔 찌푸려졌다.

“4호실 바보야? 그거 아까 7호실이 쓴 찻잔이잖아.”

“아, 맞네. 어쩐지 방금 따른 차가 벌써 차가워져서 이상하더니.”

레이븐이 작게 혀를 차며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올리비아의 말마따나, 그것은 레이븐이 조금 전에 들고 마시던 찻잔과 무늬가 약간 달랐다. 아무래도 올리비아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까이에 놓인 찻잔을 잘못 잡은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다른 사람도 아닌 린이 사용하던 찻잔이라는 점이었다.

만약 린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면, 레이븐에 대한 체스휘의 호감도가 마이너스 1000을 돌파한 순간을 목격했을지도 몰랐다.

체스휘의 눈이 방금 레이븐의 더러운 손과 입술이 닿았던 찻잔을 아주 써늘하게 응시했다.

“이렇게 주의력이 없는데 어떻게 양육자가 되었지….”

“뭐?”

“레이븐 씨, 왜 남의 걸 허락도 없이 써요. 불쾌하게.”

소파에 기대앉은 체스휘의 입에서 깜짝 놀랄 정도로 한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레이븐은 처음 보는 체스휘의 냉정한 말과 태도에 놀라고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곧 그는 무안한 듯이 얼굴을 붉히며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굴어? 게다가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사람이 실수 좀 할 수도 있지….”

하지만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올리비아가 정색해서 레이븐은 그 이상 성질을 더 부리지는 못했다.

“아니, 나도 내가 쓰던 컵이나 식기를 나 없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그대로 사용한다고 하면 기분 나쁠 것 같거든? 이런 건 4호실이 앞으로 좀 조심해 줬으면 좋겠어.”

“그, 그래…?”

레이븐이 뻘쭘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는 메이드가 왜 테이블을 바로 치우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구시렁거리면서 린의 찻잔을 더 멀리 밀어 두었다.

그 후로 레이븐과 올리비아는 대화를 몇 마디 더 나누었다. 하지만 곧 세르쥬가 방에 가고 싶다고 말해 올리비아는 그를 데리고 공용 다과실을 먼저 나섰고, 이후에 체스휘와 단둘이 있기 불편했는지 레이븐도 슬그머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체스휘만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차갑게 내리깐 눈으로 아까 레이븐이 만졌던 찻잔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다가 이내 체스휘의 몸이 느릿하게 움직여졌다.

쨍그랑!

무심하게 테이블을 툭 건드린 발짓에 그 위에 있던 다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린과 레이븐의 흔적이 함께 남아 있던 찻잔도 깨져 더는 세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소리를 듣고 와서 난장판이 된 다과실을 놀란 눈으로 보는 고용인에게 체스휘가 빙그레 웃었다.

“실수로 찻잔을 깼네요. 테이블에 남은 것들하고 같이 치워 줘요.”

잠시 후 창밖을 응시하는 체스휘의 얼굴은 조금 전보다 만족스럽게 풀려 있었다. 그는 다시 린을 생각했다.

지금쯤 그녀는 콘라드의 연구실에서 뭘 하고 있을까?

사실 린이 이렇게 굳이 콘라드를 찾아간 이유가 뭔지 짐작 가는 부분은 있었다.

일단은 얼마 전에 린의 껍데기를 흉내 냈던 어린 영혼과 부딪쳤을 때 그녀의 몸에 남은 상처 때문일 것이다.

‘가엾게도.’

하지만 린의 기대와 달리 콘라드는 절대 그녀를 도울 수 없었다. 콘라드뿐 아니라 다른 누구라 해도 불가능했다.

린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때 분명 린의 육신은 기능을 멈췄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복구한 것은 체스휘였다. 그러니 그녀를 도울 수 있는 것도 체스휘뿐이었고, 그녀의 소유권 또한 그에게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곧 린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에게는 그가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내 창밖의 새하얀 빛이 스민 체스휘의 얼굴에 지나치게 달콤해서 어딘가 오싹거리는 느낌까지 풍기는 짙은 미소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한시라도 빨리 린이 자신의 품에 먼저 안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

똑똑!

“콘라드 선생님, 안에 계세요?”

레드포드 저택의 의원에 도착한 나는 이번에도 대답 없는 연구실의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경마 신문을 벌건 눈으로 유심히 읽고 있던 콘라드가 ‘또 너냐?’ 하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뭡니까? 허락도 없이 왜 마음대로 들어오는 거죠?”

“그러는 선생님은 왜 안에 있으면서 대답을 안 해 주세요?”

“명상 중이라 못 들었습니다.”

콘라드는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세상에, 누가 경마 신문을 보고 있던 걸 명상이라고 하나요?

나도 이제는 그의 나태한 행태에 기가 막히지도 않아서, 그냥 똑같이 뻔뻔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래요? 그래도 명상에 그렇게 집중하고 계시지는 못하셨나 보네요. 문을 열자마자 바로 알아차리신 걸 보면. 그럼 어차피 이렇게 된 김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콘라드는 약간 짜증스럽게 인상을 찡그리며 경마 신문을 옆으로 치웠다.

[‘콘라드’의 ‘린’을 향한 호감도가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65/100]

콘라드의 호감도가 변하는 알림이 울렸다. 나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묘한 기분을 느끼며 콘라드의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최근에 복도에서 지나가는 콘라드를 봤을 때도 느낀 건데 그의 호감도는 좀 이상했다.

생각보다 높은 콘라드의 호감도는 일전에 총괄 집사에게서 그를 도와주고 받은 퀘스트 보상 때문이었다.

그런데 내가 이상하다고 한 건, 저 퀘스트를 진행했을 때 나는 린 도체스터의 모습이 아니었는데도 이 육신을 대상으로 한 콘라드의 호감도가 올랐다는 것이다. 게다가 다른 퀘스트 보상인 콘라드의 히든 퀘스트와 연애 루트도 열려 있었다.

▶Hidden 퀘스트: 상처받은 명의, 닥터 콘라드를 갱생시켜라!

위대한 명의인 콘라드에게는 그동안 외롭게 혼자 간직해 온 비밀스러운 과거가 있다는데…. 상처받은 그의 마음을 치유해 주고, 훌륭한 명의로 갱생시키자.

※실패 페널티: 닥터 콘라드의 연애 루트 삭제, 닥터 콘라드의 의원 평생 사용 불가능. 닥터 콘라드의 흑화

※성공 보상: 닥터 콘라드의 영원한 순정 획득, 닥터 콘라드의 노예화, 닥터 콘라드의 의원 평생 무제한 사용 가능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