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구, 발등 괜찮아요?”
나는 허리를 숙여 떨어진 책들을 주웠다.
그런데 다이안은 내가 책을 다 줍고 일어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 굳은 듯이 가만히 서 있었다.
나는 살피듯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명백히 동요한 것처럼 보이던 행동과 달리 다이안의 얼굴은 조금 건조한 느낌이 들 정도로 무덤덤해 보이기만 했다.
“그 메이드는 갑자기 왜?”
다이안의 목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역시 담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아는지 궁금해서요.”
“아니, 모르는데?”
알고 보니 우리 애한테는 연기의 재능이 있었나 보다!
내가 다이안과 함께 보낸 이전 43회차 동안의 시간이 아니었다면 그의 말을 그대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방금 내가 엠버의 이름을 꺼내자마자 다이안이 무심코 책을 떨어뜨렸던 것도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모르는 반응이 아니었다.
나는 눈에 뻔히 보이는 다이안의 거짓말에 기분이 묘해졌다. 하지만 다이안의 얼굴이나 목소리는 너무 단호했고, 나를 응시하는 눈빛은 평소와 달리 살짝 날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
이번에는 다이안이 나를 떠보듯이 물었다.
“아…. 제가 어제 어떤 메이드한테 도움을 좀 받았는데 고맙다는 인사를 못 해서요. 이름이 엠버라고 했던 것 같은데…. 다시 생각해 보니 혹시 엠버가 아니라 엠마라는 이름을 잘못 들은 건가 싶기도 하고요.”
나도 눈치란 게 있었다. 다이안의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여기서 그에게 굳이 더 엠버에 대해 캐묻기에는 적절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당히 둘러대자 굳어 있던 다이안의 얼굴이 한결 편안하게 풀어졌다.
“그럼 엠마일 거야. 이 저택에 엠버라는 메이드는 없거든.”
“그래요…? 그럼 엠마를 찾아봐야겠네요.”
“응,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렸나 봐.”
나는 그런 다이안이 영 의심스러워졌다.
사실 나로서는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가볍게 꺼낸 말인데, 다이안의 반응은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엠버라는 메이드에게 꼭 안 좋은 기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나는 다이안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엠버에 대해 좀 더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복도를 걸어갔다.
***
그날 오후에 결국 체스휘와 온실에서 단둘이 차를 마시지는 못했다.
그 계획은 예상치 못한 사람에 의해 결국 무산되었다. 올리비아가 세르쥬를 데리고 갑자기 내 방에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으로 계속 개별 활동 시간마다 이렇게 찾아올 거라고요?”
공용 다과실로 자리를 옮긴 뒤, 나는 테이블에 놓인 과자를 사이좋게 오순도순 나눠 먹기 시작한 올리비아와 세르쥬를 떨떠름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7호실도 알다시피 얼마 전에 위험한 놈들이 나타나서 우리 쥬쥬를 공격했잖아?”
사람은 죄가 있어도 옷은 죄가 없다는 건지, 최근에 라벨의 의상실에서 구입한 의상을 세르쥬와 함께 맞춰 입은 올리비아가 태평하게 과자를 먹으면서 말했다.
“모로스만으로도 성가신데 그런 놈들이 또 나타나면 바로 대응하기 어려울 수도 있고…. 그러니까 믿을 만한 사람하고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 물론 혹시 7호실 애가 위험해지면 나도 도와줄게. 나 그렇게 얌체 같은 사람은 아니다? 나만 이득을 보자는 게 아니라 서로서로 돕고 살자는 거야.”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지난번에 세르쥬를 죽이려 했다가 실패하고 악마의 화원으로 보내진 샤벨과 마벨을 떠올렸다.
그들은 예상대로 스텔라에서 나한테 찾아내라고 명령을 내린 그 반동분자들이 맞는 듯했다.
이후에 나도 따로 알아봤는데, 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섭정 후보로 길러지는 아이들과 그들을 양육하는 양육자들을 해치려 하는 단체가 따로 있어 지금까지도 종종 저택에 숨어 들어와 사람들을 공격한 적이 있다고 했다.
애당초 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선택받은 아이들을 키우는 목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기 시작한 주인 없는 ‘빈 세계’를 없애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자신의 세계가 공허에 먹히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은 이 계획에 동의하며 선택받은 아이들의 존재를 열렬히 환영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반골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부정적인 일부 사람들은 빈 세계가 생기면 생기는 대로, 그걸 억지로 막지 말고 설령 세계 멸망이 오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기말적인 생각을 하면서 급기야 급진파를 앞세워 레드포드 저택을 습격하기에 이른 것이다.
솔직히 나는 애초에 공허에 들어가도 죽지 않는 특이 체질을 가진 아이들을 길러서 혼자 빈 세계에 집어넣는다는 이 괴상한 계획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런 만큼, 어떤 부분에서는 이 ‘세계 멸망 순응파’에 나름대로 공감이 가는 부분도 살짝 있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들을 죽이려고 하다니. 방법이 틀렸잖아.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지.’
나는 샤벨과 마벨에게서 들었던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우리는 너희 악마들을 신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신성한 임무를 위해 선발된 자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악마의 씨앗을 키우는 저주받은 놈들! 모두 다 지옥으로 떨어져라…!”
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이비 같았다. 역시 저런 나사 빠진 사람들을 두둔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떨떠름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튼, 올리비아의 의도는 알겠다만, 나로서는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올리비아가 살짝 부담스러웠다.
잠깐 만나서 의상 덕질을 할 상대로는 괜찮지만 매일 이렇게 개인 시간마다 붙어 있을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지는 느낌이기도 했다.
“네, 믿을 사람으로 생각해 준 건 고마운데… 생각 좀 해 볼게요.”
“뭐? 생각은 무슨 생각? 우리 사이에 야박하게 굴지 말지?”
“우리 사이가 뭔데요…?”
“뭘 당연한 걸 묻고 그래? 양육자 중에 단짝이잖아!”
올리비아의 해맑은 대답을 듣고 내 머릿속에 거대한 의문이 피어났다.
단짝…? 일명 베스트 프렌드? 언제부터 우리가 그런 끈끈한 사이였지요?
나는 진심으로 의혹 어린 마음이 들었으나, 올리비아는 진심으로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이 멀뚱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호감도 77/100]
‘확실히 높은 호감도이긴 한데….’
올리비아의 지금 호감도만 보면 처음에 그렇게 내게 적대적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올리비아는 단순해서 그런지, 나한테 마음을 연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호감도를 순조롭게 올려 가고 있었다. 이번에 샤벨, 마벨에게서 세르쥬를 함께 지킨 일로 나를 완전히 믿게 된 것 같기도 했고 말이다.
“우리 쥬쥬도 양육자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7호실이 제일 좋다고 그랬어.”
“세르쥬가요?”
이어진 올리비아의 말이 뜻밖이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르쥬를 쳐다봤다.
“내 말이 맞지, 쥬쥬?”
“응.”
세르쥬는 과자를 다 먹고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건성으로 답했다.
[호감도 40/100]
나를 보는 세르쥬의 눈은 여전히 영혼이 탈곡한 듯이 심드렁했으나 그의 머리 위에 떠오른 호감도만큼은 전보다 상승해 있었다.
그래도 지난번에 올리비아와 함께 습격자를 처치해 자신을 도와줬다고 호감도가 좀 오른 건가?
고오맙다…. 이제 체스휘는 아낌없이 호감도를 퍼주는 사람이 되었으니 이 레드포드에서 호감도에 가장 짠 사람은 세르쥬가 될 것 같았는데, 설마 지난번의 일로 40을 돌파하게 되었을 줄이야.
세르쥬는 소나무 같은 일관성이 있어서, 양육자 올리비아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호감도는 30~35 사이를 꾸준히 유지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올리비아의 말처럼, 저택에 있는 다른 사람들 중에는 내 호감도가 가장 높은 게 맞긴 했다.
“안타깝네요, 올리비아 씨. 린 씨는 이미 저와 선약이 되어 있어서요.”
[‘체스휘’의 ‘올리비아’를 향한 호감도가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700/?]
그때, 호감도 변경 알림을 배경음처럼 깔며 체스휘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올리비아에 대한 호감도를 한꺼번에 통 크게 50이나 깎아 버린 체스휘는 시스템 창이 아니면 나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부드럽게 미소 지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나른한 걸음걸이로 공용 다과실에 들어온 체스휘가 내가 서 있는 소파 뒤쪽으로 다가왔다.
“그 협력인지 동맹인지 하는 거, 저하고 같이 할 거거든요.”
그가 등받이를 손으로 짚었는지, 어깨 옆쪽의 쿠션이 살짝 눌리는 게 느껴졌다.
“진짜야, 7호실?”
올리비아가 체스휘의 말을 듣고 실망한 듯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를 향해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체스휘에게도 확답한 적이 없긴 했다. 하지만 이왕 다이안을 위해 누군가와 손을 잡아야 한다면 올리비아보다 체스휘가 나은 건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생각에 내가 굳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사이, 체스휘가 한결 온화해진 목소리로 올리비아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그리고 방금 올리비아 씨가 한 말은 전제부터 잘못되었는데, 린 씨와 제일 가까운 양육자는 저라서요.”
그 말에 올리비아가 반발했다.
“무슨 소리야? 한 명을 꼽자면 당연히 나지.”
“올리비아 씨, 이제 보니 착각을 잘하는 성격인가 봐요.”
“뭐라고? 그러는 2호실은 이제 보니 생각보다 성격이 나쁘네!”
[‘올리비아’의 ‘체스휘’를 향한 호감도가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55/100]
체스휘에 대한 올리비아의 호감도가 소폭 하락했다.
“두 사람 지금 뭐야? 내가 없는 사이에 치사하게 새치기를 해?”
공용 다과실에 또 한 사람이 난입한 건 바로 그때였다.
“7호실은 내가 제일 먼저 찜했거든? 7호실, 내 말이 맞지! 난 그 이상한 의상실 직원이 저택에 온 날 바로 얘기했잖아!”
그 말대로, 얼마 전에 나한테 제일 먼저 협력 제안을 했던 레이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