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레드포드 저택의 수상한 고용인들
체스휘가 좀 이상하다.
“린 씨, 어디 가요?”
“아…. 다이안한테요.”
오늘도 여지없이 눈앞에 나타난 체스휘를 보고 나는 흠칫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나를 모르는 것처럼 생긋 웃으며 다가왔다.
“마침 저희 미뉴엘도 수업이 끝날 시간인데 같이 가요.”
딱히 거절할 이유도 마땅치 않아서 그때부터 체스휘와 나는 복도를 함께 걸었다. 한낮임에도 날이 흐려서 창밖은 어두웠고,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히는 소리가 간간이 고막을 두드렸다.
“린 씨, 오늘은 비가 와서 날이 쌀쌀한데 옷을 왜 그렇게 얇게 입었어요? 감기에라도 걸리면 어쩌려고요.”
“전 추위를 별로 안 타서요.”
내 말을 듣고 체스휘가 흐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따뜻한 온기가 내 손을 감쌌다.
“그런 것치고는 손이 차가운데.”
혼잣말에 가까운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나는 체스휘가 내 손을 잡은 걸 알고 몸을 움찔거렸다.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빼내려 했다. 그걸 느끼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체스휘는 천연덕스럽게 웃으면서 오히려 내 손을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냥… 손만 차가운 거예요.”
“그래도 내 손이 따뜻해서 다행이네요.”
다시 한번 빙그레 미소 지은 체스휘가 내 손을 잡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낯간지러운 기분에 헛기침을 하면서 말을 돌렸다.
“크흠. 체스휘 씨, 오늘 옷 예쁜 거 입었네요.”
“그래요? 마음에 들어요? 이런 게 린 씨 취향이에요?”
그런데 생각 없이 던진 내 말에 체스휘가 반색했다. 그래, 반색해도 너무 반색했다….
“또 좋아하는 게 뭔지 말해 줘요. 다 기억할 테니까.”
달콤하게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설탕 부스러기처럼 귓가에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체스휘가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나와 시선이 마주친 것이 기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예쁜 눈매를 가늘게 휘어 웃었다.
나도 그런 체스휘를 보고 반사적으로 딱딱하게 굳은 미소를 입가에 그렸다. 하지만 속마음은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혼란스러웠다.
‘…역시 이상해졌어!’
오늘도 이렇게 뭘 잘못 먹은 것처럼 구는 체스휘를 보자 왠지 뒷덜미가 오싹거렸다.
체스휘가 이렇게 이상해진 건, 역시 내 방 앞에서 우리가 만났던 이틀 전 밤부터였다.
그때부터 체스휘는 이런 식으로 내게 허물없이 굴었다.
물론 이전에도 나한테 친밀하게 굴며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행동이나 말을 종종 하던 체스휘였지만, 이번에는 그 종류나 정도가 확연히 달랐다. 이제는 아예 작정하고 나를 홀리려고 드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그동안 은근히 느껴지던 벽이 전보다 훨씬 옅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꼭 지금뿐만이 아니라 체스휘는 요 이틀 동안 계속 이런 식이었다.
“린 씨, 곧 저녁 시간인데 같이 식사할래요?”
“린 씨, 오늘 오후에는 뭐 해요?”
“린 씨, 지금 어디 가요?”
“린 씨….”
이런 식으로 체스휘는 무슨 분리 불안증에라도 걸린 강아지처럼 언제 어디서나 나를 찾으며 불쑥불쑥 나타나기 일쑤였다.
이틀 전 밤에 봤을 때도 그는 나를 기다렸다는 둥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면서 꼭 우리가 무슨 1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견우와 직녀라도 되는 것처럼 요란스럽게 굴었었다. 그런 것치고는 그 한밤중에 나한테 다른 급한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도 아니었던 듯해서 더 이상했지.
아무튼 그러면서 나한테 얼마나 곰살맞게 구는지, 다른 양육자들과 고용인들도 이런 체스휘를 의아하게 쳐다볼 정도였다.
당연히 이 상황이 가장 당황스러운 건 나였다. 더군다나 지금 체스휘의 호감도가 말이다….
[호감도 842/?]
나는 체스휘의 머리 위를 확인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린 씨, 역시 추운 거예요?”
체스휘가 그런 나를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안 되겠다는 듯이 자신이 걸친 카디건을 주섬주섬 벗기 시작했다.
“아니에요! 진짜 안 추우니까 체스휘 씨가 입어요.”
이러다가 진짜 옷을 벗어 줄 것 같아서 나는 체스휘가 반쯤 벗은 카디건을 잡고 다시 그의 어깨 위로 쭉 끌어 올렸다.
그 순간 또다시 호감도의 변동을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호감도 891/?]
‘…정말 이상해!’
누구보다 호감도에 짜던 체스휘가 갑자기 내가 숨만 쉬어도 호감도를 마구마구 퍼 주기 시작한 게 영 수상하면서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진짜 호감도를 올려 주는 묘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왜 이래?’
체스휘는 내 속도 모르고 다시 내 손을 붙잡은 채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린 씨, 혹시 다음 일정은 없어요?”
“글쎄요….”
“시간이 비면 온실에서 같이 꽃 구경하면서 차 마실래요?”
“미뉴엘은 다음 수업 없어요?”
“우리 둘이 가자는 말이었는데요.”
“아.”
그리고 이런 이상한 상황을 불만스럽게 여겨 가장 먼저 폭발한 건 다름 아닌 미뉴엘이었다.
“그리고 린 씨….”
“린, 린! 아주 귀에 딱지 앉겠네!”
수업이 조금 일찍 끝났는지 방문 앞에 서 있던 미뉴엘이 나란히 복도를 걸어오는 체스휘와 나를 보고 꼬리 밟힌 고양이처럼 신경질을 냈다.
“체스휘, 네가 다이안이야? 왜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7호실 양육자를 찾아? 게다가 지금은 손까지 붙잡고? 참나!”
앗, 미뉴엘을 발견하고 금방 손을 놨는데 이미 봤나 보다. 나는 괜스레 멋쩍어져서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체스휘는 내가 뿌리친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미뉴엘에게 시선을 들었다.
“미뉴엘, 왜 또 심술이에요?”
하지만 기분 탓인지, 그의 목소리는 방해받은 지금의 상황이 탐탁지 않은 듯이 약간 싸늘하게 들렸다.
“누가 누구랑 손을 붙잡았다고?”
그런데 하필이면 그때 옆방에 있던 다이안도 가정교사와 함께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네 양육자랑 내 양육자 말이야!”
“뭐?”
미뉴엘이 보란 듯이 한 음절씩 끊어서 강조해 말하자 다이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휙 돌아보았다.
“미뉴엘 말이 진짜야?”
다이안의 가정교사가 나와 체스휘에게 인사한 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며 느리게 복도를 걸어갔다. 미뉴엘이 쓸데없이 큰 목소리로 소리쳐서 그의 말을 다 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두 뽀시래기들의 박력에 밀려서 그들에게 괜히 변명하다시피 말했다.
“아니, 그…. 원래 친구끼리 손도 붙잡을 수 있고, 그런 거잖아요?”
내 말에 체스휘가 눈썹을 추어올리며 나를 쳐다봤다. 불만이 그득히 담긴 그의 눈빛이 내 얼굴을 찔렀으나 그냥 모른 척했다.
“친구는 무슨 얼어 죽을.”
미뉴엘이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한다는 듯이 대놓고 나를 비웃었다.
“친구…? 2호실 양육자랑 친구라고 할 정도로 친해진 거야?”
하지만 다이안은 나와 체스휘한테 여전히 불신과 경계심이 뒤섞인 눈빛을 보내면서도 내 말에 어느 정도 혹하는 눈치였다. 미뉴엘이 그런 다이안을 보며 답답하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야, 넌 저 말을 믿냐? 둘이 눈 맞은 거잖아!”
“린이 날 두고 그럴 리가 없어!”
다이안도 미뉴엘을 향해 뭘 모른다는 듯이 반박했다. 나는 우리 애의 굳건한 믿음에 양심이 조금 아려 왔다.
체스휘는 두 뽀시래기들의 말다툼을 제법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다이안과 미뉴엘의 접전은 오래가지 않았다.
“야, 친구끼리 무슨 손을 잡냐? 우리도 평소에 징그럽게 손 같은 거 안 붙잡잖아!”
“너랑 나는 친구가 아니잖아?”
“그…!”
다이안의 단호박 같은 말에 미뉴엘의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다.
그는 설마 다이안이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술을 뻐끔거렸다. 당장이라도 굴러떨어질 듯이 크게 부릅떠진 미뉴엘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러다 이내 미뉴엘의 하얀 얼굴이 서서히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런.”
체스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작게 탄식했다.
“당… 연히 우린 친구 같은 게 아니지! 너랑 내가 무슨…! 야, 나도 다이안 널 딱히 친구라고 생각 안 하거든?!”
미뉴엘이 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씩씩거렸다. 다이안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런 미뉴엘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원래 평소에도 마땅한 이유 없이 성질을 부리던 미뉴엘이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다이안은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그에게 깊이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너…! 진짜 재수 없어!”
미뉴엘은 자존심이 많이 상한 듯이 씨근덕거리다가 다이안을 홱 지나쳐 갔다.
“지금은 저도 가 봐야겠네요. 그럼 이따 봐요, 린 씨.”
체스휘도 미묘한 얼굴로 웃다가 내게 아쉬운 듯한 인사를 남긴 뒤 미뉴엘의 뒤를 따라갔다.
“린, 우리도 가자.”
다이안은 자신에게 한껏 짜증을 부리고 간 미뉴엘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보아하니 자신이 방금 미뉴엘에게 크게 한 방 먹였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했다.
나는 미뉴엘이 살짝 짠해졌다. 그 녀석, 아무래도 우리 다이안을 내심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던 모양인데. 그러게 평소에 좀 잘하지….
그렇게 속으로 혀를 차면서 다이안과 함께 반대쪽 복도로 걸어갔다.
“오늘 수업은 어땠어요?”
“오늘? 뭐, 그냥 그랬어. 그냥 숙제를 잘했다고 칭찬받고… 또 다른 아이들보다 이해력이 좋다는 소리를 조금 들은 정도지.”
“우와, 진짜요? 선생님한테 칭찬도 받고 너무 멋지다!”
내가 호들갑스럽게 반응하자 다이안의 입술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흠, 뭐 이 정도는 별것 아닌데. 사실 지난번에도 말이야….”
아닌 것처럼 굴었지만 다이안의 기분이 좋아진 게 한눈에 보였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옆에서 재잘거리는 다이안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문득 이틀 전 내가 봤던 과거의 다이안이 떠올랐다.
그때의 냉정하고 어둡던 소년과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소년은 확실히 표정부터 너무 달랐다.
나는 엠버라는 메이드가 진짜 1년 전 레드포드 저택에 실제로 있었는지, 또 만약 그렇다면 다이안이 그녀를 기억할지 궁금해서 조금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참, 다이안. 혹시 메이드 중에 엠버라고….”
후두둑!
그 순간 다이안의 손에 들려 있던 책들이 발밑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