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기를 당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초상화 속 영혼과 술래잡기 퀘스트를 할 때도,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의 애처로운 모습을 보고 나도 마음이 약해져서 거기에 홀딱 넘어갔던 거잖아?
하지만 내가 직접 본 마리네즈는 절대 그런 착하고 연약한 여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연인 사이도 아닌데 체스휘한테 혼자 집착하고, 자기 남자한테 집적거린다는 어이없는 명목으로 멀쩡한 사람이나 잡는, 그런 이상한 여자였다 이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저렇게 처연한 분위기를 흘려 봤자, 속임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휴, 어차피 이미 죽었는데 뭘 더 따질 수도 없고.’
“마리엔 씨, 검은 공기 중독 증상 안 무서워요? 그만 방으로 돌아가죠.”
결국 마리엔에게 그녀의 뒤에 서 있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에 대해 알려 주지 않고 말을 돌렸다.
어차피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말해 줘도 소용없을 것이다. 혹시 또 지난번처럼 내가 자신을 우롱한다고 생각해서 마리엔이 채찍을 휘두를지도 모를 일이고.
마리엔도 내 말이 맞다 싶었는지, 가느스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등불을 손에 들고 먼저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 같이 가요. 1호실 언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오늘도 마리엔은 야박했다. 물론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마리엔을 쫓아갔다. 그래도 마리엔의 걸음이 그렇게 빠르지는 않아서 바로 옆까지 그녀를 쫓아갈 수 있었다. 나는 작게 투덜거리면서 마리엔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새삼스럽지만 마리네즈하고 닮았네…. 하지만 동생인 마리네즈가 표독한 인상이라면 언니인 마리엔은 좀 더 진중한 느낌이었다.
“왜 자꾸 쳐다보는 거지?”
내 시선이 거슬렸는지, 마리엔이 싸늘한 눈초리를 다시 나한테 돌렸다.
[호감도 51/100]
호감도가 처음 열렸을 때부터 느꼈지만, 역시 생각보다 높은 수치였다.
사실 마리엔의 호감도는 좀 의외였다. 나는 그동안 호감도가 꽤 깎여서 기본으로 주어지는 30이하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이 정도면 사실은 나를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는 마리엔이 들으면 조용히 채찍을 꺼낼지도 모를 생각을 하며 입술을 삐죽였다. 하지만 마냥 근거 없는 자신감인 건 아니었다.
그야, 미뉴엘이나 체스휘보다도 높은 호감도잖아….
“큽….”
이제는 웬만큼 적응이 되긴 했지만, 새삼스럽게 또 현타가 오는 느낌이라 이 생각은 잠깐 옆으로 치워 두기로 했다.
“마리엔 씨, 별채에 언제 왔어요?”
“…….”
“방에서 나온 지 오래됐어요?”
“…….”
“밤에 혼자 밖에 나왔다가 소리소문없이 죽은 고용인들도 가끔 있는 거 알면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 걱정 안 돼요? 봐요, 가지고 있는 성수 꽃도 다 시들었잖아요.”
마리엔의 잠옷 주머니에 삐져나와 있는 바싹 마른 꽃송이를 향해 턱짓했다.
어쩐지 그만 방으로 돌아가자는 내 말을 이상하게 잘 따르더라니, 어차피 밖에서 돌아다닐 수 있는 제한 시간이 다 되었던 모양이다.
내가 겁도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면서 말하자, 마리엔이 한쪽 입술을 비스듬히 끌어올리며 조소 비슷한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그러는 7호실은, 꽃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아주 멀쩡해 보이는군.”
뜨끔.
생각지도 못한 예리한 지적에 나는 흠칫했다. 나야 검은 공기 중독 증상을 방어하는 약 때문에 멀쩡한 것이지만, 그건 비밀이었다.
“큼, 제 꽃도 방금 다 시들어서 버렸어요.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자고 말한 거죠.”
다행히 마리엔은 나를 더 캐낼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별채를 나와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마리엔한테 계속 말을 걸고 질척거렸다. 하지만 마리엔은 거의 대꾸해 주지 않아서, 실질적으로는 나만 떠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마리엔과 내가 갈라서야 할 곳에 이르렀다.
“여기서 헤어져야겠네요. 그럼 내일 봐요!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고마웠어요, 마리엔 씨.”
“누가 누구를 데려다줬다는 건지. 7호실은 착각이 심하군.”
나는 내 인사에 콧방귀도 뀌지 않으며 나를 무심히 지나쳐 걸어가는 마리엔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등불을 손에 쥔 그녀의 뒤로 긴 그림자가 이어졌다.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은 별채를 나와 여기까지도 우리를 따라와 있었다. 나는 어두운 복도를 혼자 걸어가는 흰 잠옷 차림의 마리엔과 그녀의 뒤를 소리 없이 따르는 검은 상복의 유령을 보면서 조금 망설였다.
“저기, 마리엔 씨.”
그러다가 조금 충동적으로 마리엔을 불렀다.
그냥 나를 무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리엔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시스템 창을 통해 본 마리엔의 현재 상태는 오늘도 ‘슬픔’이었다. 마리엔은 감정 변화가 거의 없었고, 나는 그런 그녀가 어쩌면 전부터 조금은 신경 쓰이는 것 같기도 했다.
“방까지 조심해서 가요.”
하지만 결국 이번에도 장난스럽게 손을 흔들면서 그녀를 부른 데 별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처럼 굴었다.
마리엔은 그저 나를 쳐다보다가 다시 돌아섰다. 나도 멀어지는 그녀를 더 보지 않고 방으로 향했다.
사실 지금까지 저택에 퍼진 헛소문 때문에 체스휘가 연인을 잃은 줄 알고 가련하게 여겼었지만, 소중한 사람을 잃은 마음에 내가 더 공감해야 마땅한 건 체스휘보다 마리엔이었다.
여동생을 잃은 입장은 마리엔과 같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동병상련의 정이라도 느끼듯이 마리엔을 안쓰럽게 여기고 싶지는 않았다. 마리엔을 가엾게 생각하는 건 왠지 나 자신을 동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걷다가, 문득 복도의 저편에서 아스라하게 번져 오는 불빛을 발견했다. 하필 내 방이 있는 방향이었다. 나는 의문을 느끼며 다가갔다.
“체스휘 씨?”
그리고 등불을 든 채 복도에 서 있는 체스휘를 발견했다. 마리엔처럼 침실에서 잠깐 나왔는지, 그 역시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체감상 며칠 만에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마리엔과 달리 체스휘는 바로 몇 시간 전에도 얼굴을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오랜만이란 느낌은 딱히 들지 않았다. 물론 과거의 체스휘와 느낌이 미묘하게 달라서, 익숙한 현재의 그를 보니 반갑긴 한데….
“여기서 뭐 해요?”
왜 여기에 있지?
다들 밤에 왜 돌아다니고 그러나요? 혹시 오늘 양육자들 정규 모임이라도 있었나요?
“여긴 체스휘 씨 방이 있는 층이 아니잖아요?”
오히려 여긴 내 방이 있는 층이었다. 그렇다고 이 야심한 시간에 체스휘가 날 찾아올 일도… 없는데?
그렇게 내가 아리송한 기분을 느끼며 다가가는 동안, 체스휘는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어두운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있는 모습이 기이했다. 조용한 복도에 내 발소리만 울렸다.
조금씩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어느 순간부터 나도 속도를 늦췄다. 주황색 불빛이 내 발끝에 고였다. 체스휘의 얼굴에도 같은 색의 불빛이 물들어 있었다. 약간 헝클어진 어두운 금발 머리가 용광로 속에서 녹아 흐르는 쇳물처럼 보였다. 그 사이에 박힌 보랏빛 눈도 오늘따라 선명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기묘할 정도로 나를 그저 빤히 보기만 하다가, 이내 체스휘의 입꼬리가 소리 없이 올라갔다.
“린 씨.”
[‘체스휘’의 ‘린’을 향한 호감도가 변경되었습니다.]
[호감도 515/?]
“뭐?”
눈앞에 떠오른 내용이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설마 시스템이 또 망가진 건가 의심했다.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내가 숫자를 잘못 읽었거나. 하지만 몇 번을 다시 확인해도 눈앞의 숫자에 변동은 없었다.
그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체스휘의 호감도가 갑자기 500이나 뻥튀기 되다니?
내가 당황하거나 말거나, 체스휘는 바닥에 뿌리를 내린 듯이 가만히 서 있던 몸을 움직여 나한테 다가오기 시작했다.
“체스휘 씨?”
[호감도 665/?]
“아니….”
[호감도 715/?]
‘뭐야?’
체스휘가 한 발짝씩 걸어올 때마다, 호감도가 무섭게 증식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조화인지 알 수가 없어 얼떨떨했다.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뒷걸음질 쳤지만, 내가 뒤로 물러나는 것보다 체스휘가 다가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기다렸어요.”
옅은 숨결이 이마를 간질였다. 마침내 내 앞에 선 체스휘가 속삭이다시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까워진 등불 때문에 내가 서 있는 복도는 방금보다 환해졌는데, 반대로 내 시야는 바로 지척까지 다가와 선 남자의 몸에 가려져 한결 어두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불빛이 어린 그의 눈을 보고 숨을 멈추었다.
체스휘의 눈이 꼭 성운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안에서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압도적인 어둠이 불길하게 넘실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까부터 나를 집요하게 응시하고 있는 그의 눈에 박힌 저 감정들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뜻 모를 환희, 희열…. 그리고 그보다 훨씬 거칠고 진득한, 아주 위험한 무언가….
내가 거기에 시선을 빼앗긴 채 숨소리를 죽이고 있는 사이, 체스휘의 몸이 짙은 그림자를 만들며 내 위로 드리워졌다.
등불이 바닥에 떨어져 뒹굴며 복도에 어지러운 불빛을 수놓았다.
바로 앞에 서 있으면 시야를 다 가릴 정도로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고개를 숙여 내 목덜미에 머리를 푹 파묻었다. 꼭 대형견이 자기 무게도 생각하지 않고 온몸으로 짓누르는 것처럼 기대 오는 탓에, 거기에 밀려난 내 몸이 휘청이다가 유리창에 부딪혔다.
“정말 오랫동안, 당신이 오기만….”
체스휘에게 아플 정도로 세게 붙잡힌 팔이 불타는 듯했다. 나는 꼭 올가미에 걸린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기다렸어.”
바로 귓가에 속삭여져 고막에 꽂힌 음성조차 뜨거웠다.
나는 이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체스휘에게 붙들려 시야에 어지럽게 흔들리는 불빛만 눈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이대로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게 느껴지던 밤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