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화원이라고 불리는 곳에 자발적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눈이 마주치자 남자가 고개를 슬며시 옆으로 기울였다.
그는 지금 내가 있는 이 방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저택의 손님이었다.
그런데 언제 왔지? 기름칠이 지나치게 잘 돼 있는 탓인지, 문이 열리는 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다. 게다가 무슨 사람이… 유령처럼 기척도 없고 말이야.
남자는 내가 방에 있건 말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새로 문을 닫은 뒤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 나서는 또 내가 쳐다보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듯이 몸에 걸치고 있던 것을 한 꺼풀씩 벗기 시작했다.
“화원에 중요한 볼일이라도 있나? 아니면 흥미로?”
나는 겉옷, 타이, 장갑 순서로 벗겨지는 걸 보다가 남자와 다시 시선이 마주친 순간 퍼뜩 정신을 차리고 청소 도구를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아뇨, 뭐….”
어젯밤부터 사라졌었다더니, 일단 남자의 행색은 가볍게 산책이라도 나갔다 온 것처럼 멀쩡했다.
게다가 지금도 행동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처음에는 딱히 의식하지 못했지만, 상황이 뭔가 좀 그랬다. 내가 방에 있는데 아무렇지 않게 옷을 벗고 말이야.
물론 눈앞에서 대단한 탈의 쇼가 벌어진 건 아닌데, 검은 장갑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손목 같은 데 묘하게 시선이 끌려서 괜히 좀 겸연쩍어졌다.
그래도 남자는 흰 셔츠까지 벗지는 않고 테이블로 다가가 그 위에 있는 물병에 손을 뻗었다.
이어서 묘한 권태로움이 느껴지는 음성이 살짝 느릿하게 고막을 울렸다.
“사는 게 질린 거라면 막을 생각은 없지만, 심연 화원은 별로 추천하고 싶은 자살 장소는 아닌데.”
웃음기를 머금은 듯, 아닌 듯한 무심한 눈이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확실히 분위기가 특이한 남자였다. 지금도 무슨 유리잔에 물을 따르는 것뿐인데, 꼭 저 병에 든 게 비싼 양주고 여기는 고급 호텔이나 오피스텔인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와 그에게 스민 붉은 노을도 한몫했다.
‘아닌가…? 얼굴 때문인가?’
하지만 가장 결정적인 건, 별것 아닌 것 같은 남자의 행동에서도 느껴지는 묘한 기품과 위압감이었다.
아, 어디에서 이런 느낌을 받았나 했더니 스텔라 선배인 라파엘을 처음 봤을 때 느낀 것과 조금 비슷했다. 하지만 이 정도의 위압감과 서늘함은 라파엘에게도 없던 것이었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왠지 상대하기 껄끄럽게 느껴지는 상대였다. 그래서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애매하게 얼버무렸다.
‘그보다 심연 화원이라니, 악마의 화원을 그렇게도 부르나 보네.’
그런데 붉은빛이 맺힌 유리잔을 기울이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남자가 갑자기 걸음을 옮겨 내 쪽으로 다가왔다.
뭐야? 갑자기 왜 가까이 와?
게다가 성큼성큼, 주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걸음이었다. 심지어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손이 나한테 뻗어지기까지 했다. 나는 맹수의 접근을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주춤 뒷걸음질 쳤다.
끼이익.
다음 순간, 내 뒤에 있던 창문이 더 활짝 열렸다.
“…….”
남자가 태연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나도 모르게 방어하듯이 들어 올리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렸다.
“크흠! 아, 여기 창틀에도 걸레가 하나 있었네.”
왠지 모를 뻘쭘함에 괜히 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기라도 하는지, 남자가 서 있는 창가 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다 내 머리 위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이름이 엠버 그린로스라고 했던가?”
“네.”
그런데 얼굴에서 진득하게 느껴지는 시선이 좀 묘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굳이 표현하자면…. 꼭 실험용 생쥐를 우리에 풀어놓고 관찰하는 것 같은, 무미건조하면서도 집요한 눈길이었다.
“몸이 좀 더 나으면 올 줄 알았더니.”
메이드장님이 일하라고 시켰어요….
갑자기 또 직장인의 애환이 불쑥 고개를 들었지만, 고객님… 아니, 손님에게 저런 소리를 곧이곧대로 할 수는 없었다.
“그럭저럭 움직일 만해서요.”
그러다 문득 얼마 전 모로스에게 당하기 직전에 이 사람이 나타나서 구사일생했었다는 걸 떠올리고는 덧붙였다.
“참, 얼마 전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별말씀을.”
이번에는 확실히 목소리에서 묘한 웃음기가 느껴졌다.
진짜 귀족인가…? 별말도 아닌데 억양이나 발음 같은 게 왜 이렇게 우아해?
나는 기묘한 호기심을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하지만 창문을 등지고 기대선 남자의 얼굴은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남의 방에 더 비비고 있기도 좀 그래서, 나는 그에게 인사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볼게요. 편히 쉬세요, 손님….”
“미카엘 카드리고.”
그리고 다음 순간, 불쑥 두 귀를 파고든 이름에 얼굴이 굳었다. 나는 잠깐 가만히 서 있다가 곧 표정을 갈무리한 뒤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남자의 얼굴은 그림자에 먹혀 어떤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오직 느릿하게 호선을 그리며 끌어올려지는 입술만 시야에 비쳤다.
“한동안 얼굴을 볼 사이이니, 호칭은 편하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미카엘 카드리고…?’
남자의 방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나는 깊은 의혹에 사로잡혀 있었다.
‘라파엘 카드리고랑 지나치게 비슷한 이름이잖아.’
린 도체스터와 함께 스텔라 소속인 재수 없는 선배.
‘설마 가족이냐? 가족인 거냐…?’
이름 빼고는 닮은 데도 없는데? 물론 두 사람의 귀족다운 행동거지가 살짝 비슷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 말고 외모는 정말 눈곱만큼도 닮지 않았단 말이다.
하지만 저건 가족이 아니고서야 설명되지 않을 정도로 연관성이 높아 보이는 이름이었다.
“이 레드포드 저택에서 선택받은 아이들을 양육할 수 있도록 돕는 시설과 연관된 분이라고만 알고 있으렴.”
가만, 그럼 메이드장 제인이 말한 그 시설은 스텔라였던 건가. 왠지 그럴 것 같은 느낌이 살짝 들긴 했지만….
나는 손님 방에서 본 남자를 생각하며 찜찜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다.
뼛속까지 귀족인 것 같은 남다른 자태와 달리 딱히 고용인에게 일일이 시중을 맡기는 성격은 아닌지, 그날 저택의 손님은 다시 나를 찾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몰래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만진 순간, 그토록 기다려 온 보라색 빛이 눈앞에 번쩍였다.
앗, 된다! 드디어 반응이 있다…!
오래 기다려 온 순간이니만큼 일단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엠버 언니, 만나서 반가웠고 모로스 때문에 다친 거 미안합니다! 마리네즈한테서도 무사하길 기원할게요!
순식간에 보라색 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붉은 머리 여자가 서 있었다.
“7호실?”
“악…!”
아우, 씨! 깜짝이야. 순간 또 눈앞에 마리네즈가 나타난 줄 알았네.
“지금까지 어디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지?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주변에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러나 경계심과 의혹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사람은 마리네즈가 아니라 그녀의 언니인 마리엔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도 확실히 엠버 그린로스가 아닌 린 도체스터였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살폈다.
어두운 복도. 어디선가 본 듯한 무늬의 벽지와 장식.
“별채?”
지금 이곳은 지하실이 아니라 별채였다.
지난번에는 지하실의 문 앞에서 눈을 떴는데, 이번엔 뜬금없이 웬 별채지?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리엔 씨, 혹시 오늘이 며칠이죠?”
“그 난데없는 질문은 뭐지?”
마리엔은 등불을 든 채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탐색하듯이 훑었다.
“아까 자정이 지났으니 이제 29일이군.”
그래도 그녀는 내 물음에 대답은 해 줬다. 나는 마리엔의 입에서 나온 날짜를 듣고 헛숨을 들이켰다. 왜냐하면, 내가 지하실의 문을 만져 엠버의 몸에서 눈을 뜬 것이 28일 밤이었기 때문이다.
댕, 댕-
마침 1층의 괘종시계가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계추는 2번 울고 그쳤다.
의아함에 무심코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는 엠버의 몸으로 며칠이나 있었는데 고작 3시간밖에 안 지났다고? 지난번에는 그쪽에서 고작 15분 정도 있었을 뿐인데, 현실에서 5시간이나 지나 있었잖아?
설마 시간이 흐르는 속도나 다시 눈을 뜨는 장소는 랜덤인가?
아무튼, 난 또 시간이 많이 지났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아직 밤도 지나지 않았다니 천만다행이었다.
“마리엔 씨, 이 시간에 별채에서 뭐 해요?”
나는 무심코 마리엔에게 물어 놓고 입을 다물었다.
사실 일전에 별채 쪽에서 비친 불빛을 보고 마리엔이 아닐까 혼자서 의심하기도 했고, 그 이유로도 짐작 가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괜한 질문을 했다 싶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등불에 비친 마리엔의 얼굴은 차가웠다. 나를 보는 시선에도 서늘함이 가득했다.
“혼자 이 별채에는 왜 온 거지?”
이 야심한 시간에 이런 으슥한 곳에서 딱 마주쳐 버렸으니, 서로에게 수상한 느낌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마리엔이 자신의 동생일지도 모를 별채의 유령을 찾으러 왔다고 확신했다.
‘그 여자, 지금 당신 뒤에 서 있는데요.’
하지만 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조금 갈등이 됐다.
나는 마리엔의 뒤에 조용히 서 있는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보고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왠지 아까부터 저러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인데, 마리엔에게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1/5)]
그때, 불쑥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그 내용을 보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또냐?’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2/5)]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3/5)]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4/5)]
[레드포드 저택의 ‘방랑하는 영혼’이 린 도체스터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실패(5/5)]
[‘방랑하는 영혼’의 빙의 시도를 5회 방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24시간 동안 영혼들의 침입이 불가능한 육신이 됩니다.]
나는 오늘도 빙의에 실패한 뒤 시무룩한 분위기를 풍기는 유령, 검은 베일을 쓴 여인을 노려보았다.
가뜩이나 엠버의 몸으로 뺨까지 처맞아서 좋은 감정이 안 생기는데, 이런 진상 짓까지 해?
살아서나 죽어서나,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여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