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그럼 저는 이만….”
나는 그냥 지금 여기서 체스휘와 대화를 더 이어 가지 않기로 하고 그에게 애매한 인사를 건넸다.
물론 체스휘가 마리네즈에게 알아듣게 잘 얘기해 두 번 다시 나를 해코지하는 일이 없을 거라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었으니까.
체스휘도 먼저 그를 지나쳐 걸어가는 나를 붙잡지는 않았다.
“체스휘! 거기 가만히 서서 뭐 해?”
그때, 1년 전이나 후나 변함없이 까칠한 미뉴엘의 목소리가 내 뒤에서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내가 저기서 계속 불렀는데 못 들었어? 도대체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아, 미뉴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날 불렀어요?”
“그래! 도대체 어디다 정신을 빼놓고 다니는….”
나는 복도의 모퉁이를 돌기 전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바쁘게 오가는 고용인들 사이로 얼굴을 마주 보고 서 있는 체스휘와 미뉴엘의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광경에 나도 모르게 살짝 정겨운 기분마저 들었다.
‘흑, 나도 우리 다이안 보고 싶다.’
갑자기 구슬픈 기분이 들어서 나는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뗀 뒤 걸음을 서둘렀다.
***
결국 그날도 엠버 그린로스로서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지난밤에 갑자기 건물에 난 불 때문에 바쁘게 저택 안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늘은 낮 중에 좀처럼 지하실에 가 볼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 얘기 들었어? 어쩌면 어젯밤에 누가 일부러 불을 낸 걸지도 모른대.”
“뭐, 진짜?”
고용인들의 식당.
한참 식사 중이던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들려온 소리에 나는 귀를 쫑긋거렸다.
“그렇지 않아도 이상하긴 했잖아. 그 늦은 밤에, 더군다나 사용하지도 않는 빈방에 왜 불을 켠 촛대가 놓여 있었던 건데?”
그러게…. 그건 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고용인들이 속닥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곰곰이 어젯밤에 목격한 장면을 떠올렸다.
확실히 그 늦은 시간에, 더군다나 평소에 사용할 일이 없는 빈방에 불이 붙은 촛대를 가져다 둔 건 좀 수상했다.
게다가 촛대가 놓인 위치도 이상했다. 꼭 일부러 불을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커튼 바로 밑에 있는 사이드 테이블에 촛대가 세워져 있지 않았나?
“사실은, 이건 나도 언뜻 들은 얘기인데….”
그렇게 나도 화재의 고의성을 의심하고 있을 때, 메이드 한 명이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렸다.
“어제 불이 난 것 때문에 총괄 집사님이 손님을 깨우러 갔었다나 봐. 그런데 어째서인지 방이 비어 있었대. 그래서 혹시 귀한 손님이 다치기라도 했을까 봐 총괄 집사님이 고용인 두 명을 시켜서 조용히 찾게 했다는 거야. 그런데… 결국 지금까지도 발견을 못 했다는 거 있지?”
“뭐? 그럼 손님이 불을 내고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거야?”
다들 뜻밖의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이 저택 안에 있을 텐데… 사실이라면 어떻게 아직도 발견하지 못한 거지?”
“그러게. 어차피 갈 만한 곳은 고만고만하잖아?”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진 게 아닌 이상은….”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기이한 이야기에 고용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의아하긴 마찬가지였다.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내내 사람 한 명을 못 찾았다니, 사실이라면 이상한 일이었다. 레드포드 저택의 주변은 텅 빈 공터인 데다, 지금은 주말도 아니라 다른 장소로 이동하지도 못하니까.
“넌 그 얘기 어디서 들었어?”
“루셸한테.”
“아, 네 새로운 애인?”
“아직은 아니거든!”
그렇게 의문 속에서 식사를 마친 뒤, 나는 다시 다이안을 보러 갔다.
“앗! 다이안 도련님!”
하지만 또 눈치를 보면서 그의 방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었다. 다이안이 방 앞의 복도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희한하게도, 그는 방문을 살짝 열어 놓고 바로 옆쪽의 벽에 기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잔뜩 굳은 얼굴과 몸을 보니, 꼭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주위를 경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는 계단을 올라온 나를 보고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막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도 괜찮은 거예요?”
다이안은 그에게 반갑게 다가가는 나를 얼굴이 뚫어질 것 같을 정도로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가 내 말을 듣고서 몸을 움찔 떨었다.
“…나온 지 얼마 안 됐어. 금방 들어갈 거야.”
나를 빤히 쳐다보던 다이안이 이윽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이쿠, 그런데 왠지 방금 내가 한 말을 오해한 것 같은데? 나는 일전에 고용인들이 다이안에 대해 떠들던 모진 소리들을 떠올리며 서둘러 덧붙였다.
“아뇨, 아뇨! 이젠 몸이 괜찮은지 걱정돼서 한 말이에요! 좀 더 누워서 쉬지 않아도 괜찮아요? 혹시 필요한 게 있어서 나와 있었던 거예요? 앗, 아니면 혹시 어디가 아파요? 닥터 콘라드라도 불러 줄까요?”
나도 모르게 집사 모드로 돌아가 호들갑을 떨자 다이안이 다시 슬며시 눈을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잠시 후, 꾹 닫혀 있던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이름이 뭐야?”
헉, 지금 우리 흑화 버전 뽀시래기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물어본 건가?
여전히 얼굴은 차갑고 목소리도 싸늘했지만, 그래도 그의 눈은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요? 리… 엠버예요.”
아차, 그러고 보니 원래 내 이름을 말할 수가 없잖아? 몹시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상황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이 몸의 주인인 엠버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자 다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리엠버? 이상한 이름이네.”
“아니, 그냥 엠버예요.”
문득 44회차로 게임이 시작된 첫날 다이안이 나한테 했던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날 뻔했다. 그때도 내 이름을 린 로그아웃으로 오해해서 지금과 비슷한 말을 했었는데.
“어제 내 방에 왔던 거 너야?”
“아…. 낮에 잠들어 계셨을 때요?”
“그래. 그때 마음대로 내 방에 들어와서 허락도 없이 나한테 손댔던 게 너야?”
헉, 혹시 기분 나빴나?
하긴, 그럴 수도 있는 일인데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나 보다.
지금의 나는 양육자도 아니고 서로 마주칠 일도 거의 없는 메이드일 뿐인데, 제멋대로 방에 들어간 걸로도 모자라서 건방지게 머리까지 쓰다듬었으니.
나는 황급히 반성하면서 다이안에서 사과했다.
“죄송해요! 많이 아파 보여서 걱정돼서 그런 건데…. 그냥 잠드실 때까지 머리만 좀 쓰다듬다가 금방 나갔거든요! 그래도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드릴게요….”
다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또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작은 콧방귀를 뀌며 먼저 고개를 돌렸다.
“됐어. 그냥 누구인지 제대로 확인해 두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 뒤 그는 문을 콩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알쏭달쏭한 기분으로 다이안이 사라진 방문을 바라봤다.
‘…화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은 것 같았지?’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다이안이 남기고 간 콧방귀에서 나름대로의 긍정적인 신호가 읽힌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돌아서기 직전의 다이안에게서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알고 있는 우리 개복치 고양이와 조금 비슷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휴, 아무튼 다행이다.”
어쨌든 우리 고양이 기분이 좋으면 나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아까보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뒤돌아 계단을 총총총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엠버?”
“앗!”
그리고 하필이면 메이드장 제인과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눈썹을 추어올렸다. 나도 불길함을 감지하고 몸을 움찔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인은 화를 참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그렇게 돌아다니는 걸 보니 이제 좀 살 만한가 보구나. 그럼 당장 오늘부터 손님 시중을 들도록 해라. 지금은 방이 비어 있으니 먼저 청소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다.”
결국 나는 제인의 싸늘한 명령에 등을 떠밀려 다시 직장인 생활로 돌아가야 했다.
하, 기껏 얻어 낸 휴가였는데 이런 보람 없는 일이….
하지만 방에 가만히 틀어박혀 있지 않고 싸돌아다니다가 걸린 건 내 책임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탓할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손님 방으로 향했다.
제인의 말대로 방은 주인 없이 비어 있었다.
“어휴, 쓸데없이 넓어.”
레드포드 저택에는 그래도 손님 방이 여러 개 있었는데, 이번에 머무는 손님에게 내준 방은 그중에서도 제일 크고 좋은 방이었다.
아무튼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니 후딱 해치우고 나가자.
나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청소를 시작했다. 아직 몸이 쑤시고 팔이 아팠지만, 그럭저럭 움직일 만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인 엠버는 일머리가 없는 편인 듯했다. 그래서 다들 내가 손님 접객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불안한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누구냐? 메이드 직업에 진심인, 보람찬 게임 인생을 보냈던 플레이어 아니겠어?
나는 누가 따로 지시하지 않아도 이것도 척척, 저것도 척척, 아주 신속 정확하게 손님방의 청소를 끝냈다.
“휴, 역시 완벽하네.”
잠시 후 나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해지고 또 아주 질서정연해진 방을 보면서 뿌듯하게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창밖에는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청소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너무 심취해 버렸나 보다.
그런데 방의 주인은 이 시간까지 돌아올 낌새가 없어 보였다. 혹시 진짜 식당에서 들은 고용인들의 말처럼 어젯밤부터 쭉 부재중인 건가?
“어? 여기서 악마의 화원이 보이잖아?”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에 나는 창문 가까이 다가갔다. 구석에 작게 위치하고 있을 뿐이었고, 안개가 껴서 그나마도 화원 안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저 눈에 익은 문은 분명 악마의 화원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아…. 저기 다시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데.”
일전에 저 안에서 그리웠던 과거의 꿈을 꾸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다시 들어가 보고 싶다니, 설마 심연 화원에?”
나른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흘러들어 고막을 간질인 건 바로 그때였다.
흠칫 놀라서 뒤돌아보자, 언제 열렸는지 모를 문 앞에 서 있는 검은 머리 남자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