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이 그 말이야. 양육자님들이 없는 데서 모로스가 나타나면 괜히 우리도 위험해지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죽은 사람도 생겼잖아. 그냥 얌전히 방에만 있지, 진짜 눈치 없어. 어차피 필요한 것도 우리가 다 가져다주는데, 조용히 방에만 좀 있으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도대체 어제는 왜 복도에 나와서 돌아다니고 있던 거래?”
“몰라, 어느 메이드인가를 찾는다고 하던데….”
아니, 이놈들이 단체로 나이를 헛먹었나?
한 명이 다이안에 대해 입을 열자 다른 고용인들도 하나둘씩 불만스럽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어제의 일이 꼭 다이안의 탓인 것처럼 지껄이는 소리에 나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렇게 오랫동안 양육자한테 선택받지 못한 호실은 처음이지?”
그래도 참자…. 난 지금 린 도체스터가 아니니까.
“차라리 그냥 7호실이 빨리 쫓겨나고 다른 도련님이 들어왔으면 좋겠어. 어차피 양육자가 옆에 없으면 애물단지나 마찬가지인데, 고용인들이 눈치를 줘도 꿋꿋이 버틴단 말이야.”
그래, 괜한 분란 만들지 말고 참아야 하는데….
“어휴, 그렇게 능력도 없으면서 괜한 오기나 부리니까 양육자들의 선택을 못 받지.”
“뭐, 그래도 어제 보니까 도망치는 재주는 있는 것 같더라. 솔직히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그러라고 일부러 안 도와준 고용인들도 있는 거 아니야? 7호실 때문에 매일 조마조마해서 원….”
못 참겠다…!
내 뒤에서 계속 입방아를 찧는 고용인들을 도저히 그냥 무시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아니, 다들 무슨 소리를 그렇게 심하게 해요…?!”
결국 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며 분노를 폭발시키고 말았다.
“어떻게 이제 고작 열두 살… 아니, 열한 살인 어린애한테 그런 입에 담지도 못할 소리를 할 수가 있어요?”
내가 갑자기 버튼이 눌려 사납게 쏘아붙이자 고용인들이 깜짝 놀라서 말을 멈추었다.
“어제 일은 습격한 모로스가 나쁜 거지, 습격당한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잖아요! 그 어린애가 그냥 방 밖으로 나와서 복도 좀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모든 일의 원흉인 것처럼 말하는 건 너무 어른답지 못한 거 아니에요?”
“어…. 아니, 우리는….”
“물론 모로스가 무서운 건 이해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한테 방 밖으로 나오지도 말라니, 그게 감금 생활하고 뭐가 달라요? 더군다나 저택에서 퇴출당하거나 차라리 죽는 게 더 낫겠다고? 말이 너무 지나치잖아요!”
어느새 말투도 원래 내 스타일대로 돌아와 있었지만, 머리끝까지 열이 올라서 인식하지 못했다.
“다 큰 어른들이 어린애 하나 두고 뒤에서 이렇게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고 떠들다니, 부끄러운 줄 아세요!”
나는 씩씩거리면서 그렇게 쏘아붙인 뒤 엉금엉금 걸어서 먼저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나한테 한 소리 들은 고용인들이 당황한 듯이 뒤에서 숙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해 빠진 엠버가 저렇게 화를 내다니…. 우리가 좀 심하긴 했나…?”
“쟤 의외로 성깔 있었네….”
의도했던 바는 아니나, 그들은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빠르게 솟구쳤던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기 시작하자, 그다음으로는 급격한 후회가 밀려들었다.
물론 다이안을 욕하던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해 준 것 자체는 후회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이 엠버라는 메이드에게 괜한 피해를 준 게 아닌지 조금 우려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내가 이 메이드에게 빙의… 비슷한 걸 한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럼 원래 있던 곳으로 내가 돌아가게 되면 이 엠버라는 메이드가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지난번에 내가 체스휘한테 말을 걸었던 일로 마리네즈한테 찍힌 것도 그렇고, 또 어제 다이안을 구하러 모로스를 상대한 탓에 다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제부터는 이 몸 주인을 위해 자중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결심은 바로 잠시 후에 깨졌다.
“뭐야, 또 작동을 안 하잖아!”
어떻게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지하실로 가는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이놈의 문이 손으로 아무리 더듬어도 또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거 도대체 왜 이래! 지금쯤 우리 애가 이 누나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텐데…!”
쾅!
“악!”
나는 성이 나서 눈앞에 있는 검은 문을 발로 냅다 걷어찼다가, 발가락을 잘못 부딪쳐서 깨금발로 콩콩 뛰어야 했다.
“으으…. 어떻게 된 거야. 지난번에는 바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왜 자꾸 작동을 안 해?”
잠시 후, 할 수 없이 지하실을 다시 빠져나오며 이맛살을 구겼다.
저 문이 항상 내 손에 반응하는 게 아니란 건 일전에 조사하는 도중에 깨달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야 할 줄은 몰랐다.
“엠버, 방에 없어서 찾았잖아! 설마 식사 시간이라 내려온 거야? 내가 방으로 가져다주려고 했는데.”
아, 지하실에서 금방 나오길 잘했다. 복도에서 금방 모리나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넌 환자면서 왜 자꾸 조심성 없이 움직이니?”
“그래도 생각보다는 움직일 만해.”
“그래? 콘라드 선생님이 생각보다 명의인가?”
응, 그건 아냐.
“그럼 내려온 김에 식당에 갈래? 오늘 메뉴 괜찮다더라.”
모리나의 말을 들어 보니 지금은 고용인들의 점심 식사 시간인가 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1층에 내려온 핑계를 대기도 괜찮아서 모리나와 함께 고용인 식당으로 향했다.
44회차 전까지는 소나무 취향으로 메이드 직업에 말뚝을 박아서 그런지, 식당 안에서 고용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광경도 눈에 익숙했다.
내가 식당에 들어서자 식사 중이던 고용인 무리 중 하나가 조용해졌다. 아까 다이안을 욕한 죄로 나한테 한 소리 들은 사람들이었다.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사정을 모르는 모리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마리네즈 님 때문에 그런가? 참, 엠버. 아까 2호실 양육자님이 네 상태가 어떠냐고 물어보더라.”
“그래?”
“꽤나 걱정하는 것 같던데, 너 혹시 진짜 2호실 양육자님하고 친해진 거야?”
먹을 걸 들고 자리에 앉은 모리나가 나한테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이 엠버라는 메이드의 평탄한 앞날을 위해 서둘러 부정했다.
“아니야. 내가 하필 어제 2호실 양육자님이 보는 앞에서 기절해서 걱정해 줬나 보네.”
“아무튼 이왕 말이 나왔으니까 말인데…. 한동안 마리네즈 님을 조심해. 어제 네가 기절하고 나서 2호실 양육자님이 방까지 옮겨 줬거든? 그런데 마리네즈 님 눈빛이… 어휴. 완전 장난 아니었다던데.”
모리나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접시에 있는 버터에 구운 감자를 깨작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아니, 체스휘가 말하기로는 사귀는 사이도 아니라고 하더만. 아무래도 마리네즈의 짝사랑 같은데 왜 이렇게 유난을 떠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메이드장님한테 말해서 되도록 다른 양육자님들하고 얼굴 안 봐도 되는 일을 달라고 해. 나도 같이 말해 줄게.”
“으응, 고마워…. 생각해 볼게.”
“생각해 볼 게 뭐가 있어?”
모리나의 눈빛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진짜 엠버도 아니었으니 지금 여기서 내가 대신 결정을 내리기도 좀 그랬다. 그래서 일단 모리나에게 적절한 핑계를 가져다 댔다.
“어제 메이드장님이… 내가 부엌이나 세탁실 일을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하시던데.”
“아, 하긴…. 그런 문제도 있었구나.”
모리나가 답답함과 측은함이 담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녀를 향해 살짝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나 아까 저택에 있는 손님 봤다? 와, 되게 잘생겼던데.”
그때, 옆 테이블에 있던 고용인들이 수다를 떠는 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헉, 너도 드디어 봤구나? 난 그렇게 생긴 사람은 머리털 나고 처음 봤잖아.”
“혹시 말도 걸어 봤어?”
“아니.”
“왜?”
“왠지 무서워서 가까이는 못 가 봤어.”
“아…. 그건 그래. 역시 평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지?”
가만히 들어 보니, 주말부터 저택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 그들의 화제였다.
그 순간, 반사적으로 어제 본 검은 머리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주황색으로 물든 복도와 계단에서 머리와 몸통이 단순에 분리되어 허물어지던 모로스들과 그 밑에 피어나던 검은 꽃들도 함께 뇌리를 스쳤다. 그리고 나를 응시하던 남자의 눈빛도.
‘자꾸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게 이상하단 말이야….’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번에 봤을 때 토마스가 상위 세계의 성직자인 것 같다고 그랬는데.”
“아니야, 난 이 레드포드 저택의 주인과 친분이 있는 손님이라고 들었어!”
이제 고용인들은 손님의 정체에 대한 추론을 이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엠버 그린로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누군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손목에 붉은 리본을 묶은 메이드였다.
‘앗, 설마…!’
그 순간 불길한 느낌이 고개를 들었다.
저 붉은 리본은 마리네즈의 언니인 마리엔의 메이드들에게서도 본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저택에 마리엔은 없었다. 그럼 설마 저 리본이 동생 때부터 이어져 온 거였나?
내 옆에 있던 모리나가 헉 하고 숨을 들이키는 걸 보니 내 생각이 맞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몹시 냉담한 얼굴로 나를 보던 메이드가 심술궂은 미소를 입가에 그리며 입을 열었다.
“마르네즈 님이 부르신다. 지금 속히 나와 함께 마리네즈 님의 방으로….”
“엠버 그린로스 양. 잠깐 나를 따라와 주겠나?”
하지만 때마침 나타난 총괄 집사 슈나우더가 나를 살렸다.
세상에, 총괄 집사 아저씨가 이렇게 반가운 날이 올 줄이야!
물론 마리네즈의 메이드는 나를 순순히 보내 주고 싶지 않은지, 두 눈을 치켜뜨고 총괄 집사에게 반박했다.
“집사장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집사장님의 일보다 양육자인 마리네즈 님의 명령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슈나우더는 내가 처음 보는 단호한 얼굴을 한 채 딱 잘라 말했다.
“잘못 알고 있군. 양육자님보다 지금 레드포드 저택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 최우선이라네.”
그 순간 메이드가 몸을 움찔 떨었다. 나도 총괄 집사가 나를 찾은 이유가 저택에 머무는 손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두 눈을 크게 떴다.